> 이학종의 ‘망갈라숫따(행복경)’ 이야기
이학종의 ‘망갈라숫따(행복경)’ 이야기 ⓼
이 학종 2020-10-09 (금) 07:52
6. 널리, 많이 배우라
말재주가 있다 해서
배움이 깊은 사람은 아니네.
언제나 마음이 고요히 안정되어
미움과 두려움이 일지 않는 이,
그를 가리켜 배움이 깊다고 하리.
<법구경>
이른 아침에 들이키는 공기가 싱그럽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한 걸음 마당으로 나서면 제일 먼저 반기는 녀석이 살림꾼(우리 집 진돗개 이름)입니다. 어릴 때 물린 트라우마로 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 평소 살갑게 대하지 않는데도 꼬리를 흔들며 한껏 기지개를 폅니다. 아마도 밤새 집을 지키고 새벽녘에야 잠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현묘재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밤새 별일은 없었는지 뒤란까지 집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살핀 후 밭으로 나갑니다. 배추와 무는 하루가 다르게 무성히 자라고, 겨우내 먹거리가 될, 일주일 전쯤 파종한 시금치도 막 싹을 틔웠습니다.
들깨와 메주콩, 서리태는 식물체에서 조금씩 푸름을 덜어내는 중입니다. 아침 햇살에 비친 깻잎이며, 콩잎이 때마침 불어온 하늬바람에 황금빛깔을 뿜으며 일렁입니다. 계절을 이끌며 시나브로 변하는 산들에서 오묘한 자연의 법칙을 배웁니다.
그렇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배우다 가는 것이 사람의 일생입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여기저기 가르침 아닌 것이 없습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나고 죽는 윤회의 사슬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한 배움도 끝없이 윤회합니다. 어설픈 삶으로 윤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듯이 어설픈 배움도 그렇습니다. 오직 ‘깊은 배움’이라야 배움이라는 윤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따라서 언제나 마음이 고요하고 미움과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는 이, 즉 아라한의 경지를 이뤘을 때 비로소 배움이 깊다고 한 경구의 의미가 얼마다 무거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깊은 배움은 무학(無學)의 경지를 말합니다. 더 배워 닦을 것이 없는 최고의 경지가 무학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널리, 많이 배우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나 지당한 말씀입니다. 널리 많이 배워서 지혜가 증장되면 행복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완전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배운 만큼 행복해질 것입니다.
세 사람이 있으면, 그 가운데 반드시 배울만한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는 <논어(論語)> ‘술이(述而) 편’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 문장의 뜻은 도처에 스승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고 의지할만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스승을 알아보지 못하는 안목의 부족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공자님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스승은 도처에 계실지도 모릅니다. 오천 원 권과 오만 원 권 지폐의 율곡과 신사임당의 초상을 그린 화가 이종상 선생은 예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두 사람만 있어도 그 가운데 반드시 한 사람의 스승이 있다’고 한 모임에서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시상(詩想)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하소연 섞인 푸념에 ‘천지간에 시가 가득한데 그것을 읽어내는 눈이 없을 뿐’이라던 시조시인 오현 스님의 경책도 떠오릅니다. 요컨대 스승과 가르침은 법계에 두루 충만하다는 것이지요. 성현들의 말씀 그대로 처처불상(處處佛像)이요, 백초시불(百草是佛)입니다.
지금도 초보 농부의 티를 벗지 못했지만, 밭에 들어서면 아주 막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모종을 든 채 어떻게 심어야 하나, 간격과 깊이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를 놓고 고심을 거듭했었지요. 이럴 때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스승이십니다. 지나는 길에 툭툭 한마디씩 던져주는 말씀들로 한순간에 고민을 털어내곤 했습니다. 농사의 맥을 정확히 짚어주는 마을 어르신들의 조언들은 그냥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그분들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람들에게서 듣고 배우고, 실제 적용하면서 체득한 소중한 지혜이고, 이 지혜가 응축되어 한마디에 담긴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런 한마디 한마디는 아무리 저명한 농학자들이라도 할 수 없는 귀한 것들입니다. 이렇듯 산골이라고 해서 스승이 없는 것도, 또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는 건 아닙니다. 요즈음은 시류에 따라 주로 유튜브에서 농사짓는 방법을 배웁니다. 농사법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농부 유튜버’들이 꽤나 많습니다.
수확의 계절인 가을, 산골 농부의 주요 일과는 단출한 편입니다. 수확을 위해 밭에서 보내는 시간과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 긴 시간은 아니지만 수행을 위해 좌복에 앉거나 행선하는 것 등이 전부입니다. 따지고 보면 행주좌와 모든 과정들이 배우는 시간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잠을 깨우는 온갖 새들의 울음 소리와 쏴아아 파도 소리를 연상시키는 대숲 가르는 바람 소리, 낯선 차량이 나타나면 정색하며 짖어대는 개 짖는 소리, 해지면 표표히 세상을 밝히는 달빛, 아침마다 어김없이 드리운 희뿌연 안개, 하루가 다르게 누렇게 변색해가는 갖가지 이파리들…. 모두가 무상, 고, 무아를 알려주는 소중한 스승들이지요.
시시각각 다양한 버전으로 다가오는 가을의 법문을 들으며 지냅니다. 다만 사람들과 교류가 뜸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니, 집안에 머물 땐 책을 통해 선지식들을 만납니다. 주로 불서를 읽지만 종종 중국 고전도 펼쳐보곤 합니다. 한자문화권에서 사는 한 한문과 동떨어져 사는 건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중국의 고전에도 배울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적확하고 예리한 맛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점이 없지 않지만 한문이 가진 다양한 함의와 개념적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강점은 놀라울 정도이지요.
널리 배우는 것! 유가(儒家)에서는 이것을 학문(學問) 한다고 말합니다. 배우기 위해 학식이 높은 사람들과 교유하고, 때때로 강의도 들어야 하겠지만 산골에서 사는 사람에게 그런 호사는 요원한 일입니다. 배우는 것, 즉 학문하는 것의 어원은 사서(四書) 중의 하나인 <중용(中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린 나이의 노나라(魯) 왕 애공(哀公)이 공자(孔子)를 찾아가 정사에 대해 묻자 공자가 답변하는 과정에서 학문이라는 말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공자는 애공에게 ‘박학지 심문지 신사지 명변지 독행지(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하라고 답합니다. 넓게 배워야(博學之) 천하의 견문을 수집하고 사물의 도리를 두루 알게 되며, 배운 것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고 자세히 묻고 앎을 바르게 해야(審問之) 하며, 스스로 깊이 생각해야(愼思之) 학문이 정밀하게 되고 마음으로 터득하게 되고, 분명하게 변별해야(明辨之) 비로소 의리(義理)의 공사(公私) 및 선악(善惡) 시비(是非) 등을 바르게 분별하게 되며, 바르게 깊이 터득한 앎을 반드시 독실하게 실천하고 행동해야(篤行之) 덕(德)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문은 ‘박학 심문’에서 뒤 두 글자를 취해 나온 것입니다. 공자는 이 다섯 가지에 능(能)하면 비록 어리석은 자(愚)는 반드시 밝아지며(明), 유약한 자도 반드시 강(强)해진다고 하였습니다.
불교에서 수행의 출발은 철학, 세계관 등을 바로잡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를 정견(Samma ditthi)라고 하지요. 팔정도의 시작이자 완성이 정견입니다. 정견, 즉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아는 지혜를 확립하려면 평소 믿고 의지하는 스승의 가르침과 더불어 타인으로부터 배우는 것(Paratoghosa), 그리고 스스로 그 배움을 잘 익히는 적절한 방법론적 사고(Yoniso manasikara)가 매우 중요합니다. 불가에서는 지혜를 말할 때, 먼저 들어서 얻어지는 지혜(문혜, sutamaya panna)와 깊은 사고에 의해 얻어지는 지혜(사혜, cintamaya panna)의 두 가지 유형을 말합니다. 이 두 지혜는 완전한 통찰지(수혜)를 터득하기 위한 토대 및 과정에 해당합니다.
정견 확립을 위해 배우는 것의 중요성은 많은 경전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널리 배우는 것은 주의 깊게 경청(suta)하고 마음에 등록(dhata)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에 낭송(vacaya paricita)과 숙고(manasa suppatividdha)를 거쳐 배움이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가르침에 대한 진정한 지식인(Dhammannu)이 되기 위해 배운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과정은 듣기(sunatha), 배우기(dharetha) 및 연습(caratha)의 세 단어로 요약됩니다.
널리, 그리고 많이 배우는 과정은 앞서 언급했듯이 정견을 확립하기 위한 것입니다. 정견이란 아름답고, 훌륭한 견해를 완전하게 갖춘 경지를 말합니다. 정견을 갖추기 위해서는 가르침 받아들이는 원칙과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바른 스승을 따르지 않거나, 바른 스승의 가르침을 성찰하지 못한다면 널리 많이 배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초전법륜을 통해 다섯 비구가 아라한이 되었을 때, 당신을 포함하여 ‘여기 여섯 명의 아라한이 있다’며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당신이 깨달은 진리를 배운 제자들이 최상의 목표를 달성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아마도 그 순간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이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을 다섯 비구와 똑같은 레벨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는 특별히 ‘대아라한’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합니다. 대아라한에겐 열반을 성취해 완전한 해탈을 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80년 일생을 통해 실제로 보여주셨듯이 부처님은 더 많은 중생을 열반과 해탈의 길로 이끌기 위해 전법의 길로 나섰습니다.
부처님의 10대 명호 가운데 ‘세간해(世間解)’는 교화를 위해 부처님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간에 대해 바르게 이해를 했을 때, 각각의 근기에 맞춘 수기설법도 가능할 것이기에 세간을 잘 아는 것은 매우 중요했던 것이지요. 탁발 또한 단순히 공양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매일매일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르게 살펴서 잘 파악하라는 의미도 탁발에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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