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방향, 서남쪽으로 뻗은 장백산맥.
 그 장백산맥의 우두머리 산인 백두산은 험준했기에 항일 연군의 부상병들이 거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본의 전면적인 대중국 침략전쟁과 함께 중국은 전면적인 항일 전쟁 시기에 들어섰다. 하여 중국과 동북 지역에 조선인의 항일 연합부대가 결성된 것이다. 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 유격대들은 주로 백두산과 대흥안령 그리고 중·러 변경 등 산악지구에 수많은 유격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옥아는 그곳에 있었다. 옥아가 있는 곳은 바로 중국 쪽 백두산 중턱, 일명 연군 동굴이었다. 사람이 하나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을 내려가면 꽤 넓은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의 왼쪽 측면은 밖으로 통하였는데 거기는 암석으로 깎아 세운 듯한 수십 길 낭떠러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낭떠러지를 이룬 쪽에서는 아무리 보아도 동굴을 발견할 수 없었다. 백두산 밀림 속에 동굴이 있다는 것은 장백현 사람들은 물론, 백두산 일대를 다니며 사냥하는 포수들도 알지 못했다. 항일 연군의 병사들이 우연하게 이곳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연군 병사들은 일본군들이 모르게 이곳에 전투 중에 부상을 입은 병사들을 이동시켰다. 
 그래서 일본군은 백두산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연군의 주력이 떠나갈 때 필시 이곳에 부상병들을 두고 갔다는 것은 약간의 군사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도 쉽게 판단할 수 있었다. 관동군은 숱한 특수부대를 풀고, 사냥개를 동원하였다. 부근의 산촌을 샅샅이 훑었다. 자연 백두산은 관동군의 중앙에 놓이게 되었다. 장백의 헌병대에서는 경찰에 압력을 가하였고, 경찰은 지방 무장 자위단을 들볶았다. 경찰과 자위단은 나무꾼이나 벌목 노동자, 사냥꾼들에게 백두산을 이 잡듯 뒤지게 하였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옥아가 겹겹 싸인 시체더미를 뚫고 나올 수 있었던 건 분이 덕이었다. 죽은 여자들의 시체가 기관총의 세례를 막아준 것이다. 더구나 기관총은 동굴 입구보다 뒤쪽에 집중되었다. 쫓기지 않는 상황이었다면 야마모토는 분명 옥아와 분이의 시체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군이 너무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옥아가 이미 만신창이가 된 분이와 다른 한 명의 여자를 끌고 찾아간 곳은 일본군 부대와 가까운 중국인 마을이었다. 거적으로 비와 바람만 가린 외딴 집엔 늙은 중국인 부부만 살고 있었다.
“일본군과 싸우다가 이렇게 됐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있다고 연군에게 연락해 주시지요. 저는 예전 18연군 소속의 김분이라고 합니다.”
 유창한 중국말이었다.
 분이의 말을 듣자마자 바깥주인이 길을 떠났다. 안주인은 더운물을 끓여 옥아와 분이를 간호했다. 둘은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이 눈을 떴을 때는 팔로군 복장의 조선인 병사들이 놀라운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백두산으로 이동한 것이다.
“김분이 동무!”
 안전한 동굴에 와서야 대장인 듯한 사람이 분이의 손을 잡았다.
“남방으로 간 줄 알고 있었는데.”
“흐흐, 손을 썼지요. 그래서 이곳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정말 고생 많았소.”
“부대 옆 동굴에 아직 살아있는 여자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대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그곳을 지나왔소.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소?”
“천운이지요. 참, 이 사람은 강옥아라고 앞으로 훌륭한 전사가 될 겁니다.”
 옥아는 가벼운 눈인사를 했다.
“그러나 저러나 우리는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부탁이 있습니다.”
“해보시오.”
“기무라 부대에 일본군이 몇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4-50명의 오합지졸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냥 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요?”
“우리도 가게 해주십시오.”
“그 몸으로요?”
 대장이 한참을 생각하는 듯했다.
“좋아요.”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좋소. 저놈들도 철수 준비로 어수선합니다.”
“꼭 죽일 놈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꼭 살려야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알겠소. 밤에 기습합시다.”

 

  회산과 이구는 두만강변의 삼합 마을을 버리고 하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개산둔을 갓 지난 곳에 물줄기를 가르는 강섬 하나가 나타났다. 고구마 모양의 이 작은 섬이 바로 한과 설움의 두만강, 그 발원지인 사잇섬 간도였다. 그 이름이 주는 느낌처럼 간도는 화사한 햇빛 아래서도 버려진 듯 쓸쓸하고 황량했다.
 성글게 서 있는 버드나무와 이깔나무는 거센 만주 바람에 시달려 이지러지거나 뒤틀려 있고 그 사이로 여기저기 삭막한 모래 바닥이 아무렇게나 드러나 있었다. 바로 그 사잇섬 너머에 일본군 부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간도와 두만강을 모두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악명 높은 관동군의 소속 부대였다. 그 부대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몸은 한 몸처럼 동시에 떨리기 시작했다. 회산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구는 그냥 눈을 감고 있었다.
 두만강은 푸르렀다.
 사실 간도는 애초부터 특정 지역만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었다. 현실의 볼품없는 사잇섬이지만 그것은 고향에서 내쫓긴 조선 이주민들의 거친 삶을 의미하는 추상명사이기도 했다. 그들이 농사지을 땅을 찾아서 강을 건너 헤매다 닿은 곳이면 만주 벌판 어디든 그곳은 간도가 되었다. 원래의 간도는  간도로 가기 위해 첫 발을 디뎌야 했던 징검다리와도 같은 사잇섬이었던 것이다．
 간도가 한 많은 사연을 처음 만들게 된 때는 가뜩이나 척박한 함경도 땅이 연이은 가뭄으로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한 1９세기 중엽 구한말이었다. 특히 1869년과 1870년에 육진지방을 휩쓴 혹독한 대흉년은 조선 백성들의 삶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웠다. 이렇다 할 농토가 없는 데다가 많은 식구들이 딸린 조선 반도 북녘땅의 사내들은 이때부터 감자 몇 알, 곡식 한 줌을 위해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청은 자신들의 발상지인 두만강변 만주 땅을 이민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국경에 봉금령을 내리고 월강죄를 범한 사람은 사형에 처하는 가혹한 법을 시행하고 있었으나 곤궁하고 절박한 민심까지 다스릴 수는 없었다．
 이들의 필사적 도강의 구실은 사잇섬의 농사였다. 불모의 모래섬에 농사가 될 리 없었으므로‘간도에 간다’는 말은 곧 두만강 건너편 벌판에 도둑 농사를 지으러 가는 일을 의미했다. 조선인의 간도 이주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880년대 들어 청이 봉금령을 거두면서 농민들은 봇물 터지듯 두만강을 건너 천 평 벌에 논을 풀었다. 조선 농민들이 피땀으로 개간한 이곳 논은 어곡답으로 지정되었고, 간도는 압제와 수탈을 피해, 혹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건너가는 통로였으며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비원의 길목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곳마저도 일본군이 통제하고 있었다.
 고갯길의 초입은 강변에서부터 20여 리나 이어진 버들 방천, 수령 １백 년을 넘긴 버드나무가 지천이었다. 굶주린 아이들에게 먹일 게 없는 부모들은 아기 버들이었을 이 나무의 그늘 아래서 지친 다리를 쉬며　한 움큼 시냇물을 떠먹이곤 먼 하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황사에 흰구름 흩날리는 하늘가엔 지금도 길　떠나는 사내들의 한숨이 가득하고 휘적거리는 가지들은 지나가는 바람을 붙들고 거친 세월의 사연을 전했다. 바람불이 같은 못난 사내들의 노래를.

 

 밭 잃고 집 잃은 동포들아　
 어디로 가야만 좋을까보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고개를 넘어 간다.
 괴나리 봇짐을 짊어나지고　
 백두산 고개를 넘어 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이구와 회산은 메마른 언덕에 앉아 강 건너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할 말이 없었다. 회산이 입수한 정보가 맞다면, 틀림없이 옥아는 저곳 어딘가에 있는 일본군 부대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한 평이라도 농사를 지을 땅을 찾아 두만강을 건넜을 다른 사람들과 달리 다시 백두산 자락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간 곳은 두만강과 백두산맥이 만나는 강마을 계림의 백두산 포수대였다. 
 그들이 만난 사람은 젊지도 늙지도 않은 영웅, 35 살의 현정배였다. 회산은 옥아를 구하기 위해 현정배를 찾아갔던 것이다. 일본군의 눈을 피해 강을 건널 자신도 없었고, 설령 강을 건넌다고 해도 옥아를 구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현정배의 아버지는 동학 접주 중의 한 사람이었다. 회산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또랑 동무처럼 놀았다. 현정배의 본명은 용구였다. 용구는 간도 산간 송지에서 태어났다. 회산과 같았다. 회산과 용구는 같은 글방을 다니며 글을 익혔는데 둘 다 총명해서 마을 사람들의 남다른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용구는 성장하면서 이웃들의 무섭도록 슬프고 가난한 현실에 눈을 떠 아버지가 접주로 있는 동학에 입도했고, 회산은 묘향산으로 출가낙발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회산에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람은 오히려 나이가 적은 용구였다. 회산은 처음으로 용구가 주는 불경을 읽었다. 풀뿌리 죽 하나로 연명해 온 회산과 달리 일찍 간도로 넘어온 용구의 집은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용구는 회산과 달리 절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불경에 빠진 것은 오히려 회산이었다. 용구는 어릴 때부터 입버릇처럼 말했다. 동학에 빠지고 난 다음부터였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온다.
 난 그걸 알고 있어.
 
 1937년. 용구는 혜산 포수들의 일본군 습격 때부터 같은 간도 출신들의 포수들을 이끌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불온분자’가 되었다. 그는 갑산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동지들을 잃고부터 오히려 강력한 독립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남은 동지들을 이끌고 백두산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관동군은 오히려 만주의 연군 소탕에만 전력을 기울여 용구의 백두산 포수들이 활동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용구는 그만큼 전투에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부대원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오래도록 머물렀던 혜산의 서래골은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서 항상 호랑이, 곰, 멧돼지, 표범들이 많았다. 특히 호랑이는 마을로 내려와 사람들을 해쳤다.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를 물리치기 위해 포수들을 고용하기도 했고, 자신들이 스스로 사냥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래서 용구가 일본군의 눈을 피해 암약하기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그는 평상시에는 그냥 이름 없는 포수일 뿐이었다. 그는 절대로 새끼를 가진 어미는 잡지 않았고, 어린 짐승도 잡지 않았다. 물론 병든 짐승도 잡지 않았다. 그건 일본군과 싸우다가 먼저 죽은 다른 포수들과의 처음 약속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백두산의 짐승은 그냥 짐승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호랑이를 잡을 때면 항상 당당하게 정면에서 맞섰다. 절대로 등 뒤에서 총을 쏘지 않았다. 그것은 목숨을 건 일이었다. 바로 다른 포수들과 다른 이런 점 때문에 용구는 포수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그 인근의 사람들에게도 명포수로 널리 알려졌다.
 그렇게 포수로 이름을 얻은 그는 드디어 하고 싶은 일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백두산 지역에 흩어져 있던 포수들을 한곳으로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혜산를 떠나 백두산 쪽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1940년 이후부터 모든 백두산 포수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50명 이상의 포수들을 이끌게 되었다. 홍범도 장군으로 막을 내렸던 전설적인 백두산 포수대의 대장이 되었던 것이다. 
 1941년, 그는 마침내 북청군 곰바위에서 정식으로 일본군과의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독립군 부대보다 우월한 공을 세웠다. 백두산 일대의 지리에 밝은 그의 부대는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일본군 부대를 차례로 물리쳤다. 작은 부대로 일본군과 싸워야 했기 때문에 항상 유격전을 벌였다. 빨리 기습공격을 하고, 빨리 벗어나는 작전이었다.
 이구와 회산이 그를 찾았을 때 용구는 대원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명실공히 계림 쪽 두만강 양안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리 일본군이 군사적으로 앞선다고 하나 두만강변 전체에 군사들을 배치할 수는 없었다. 용구는 그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회령도 아니고, 종성도 아니고, 무산도 아닌 작은 강마을. 이 계림을 얼마간이라도 장악할 수 있다면 간도와 한반도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막중한 작전을 눈앞에 둔 용구의 군영은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병력은 간도를 중심으로 한 어떤 독립군 부대보다도 많은 수였다.
“누구냐?”
“대장을 만나러 왔소?”
 여러 명의 백포군이 몰려들었다.
“어디서 왔소?”
 제법 격을 갖춘 백포군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송지에서.”
 포군들이 승복 차림의 회산과 이구를 이상한 눈으로 살폈다.
“대장께서는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않소.”
“그럼, 이걸 전해주시오.”
 회산은 가슴에서 서찰을 하나 꺼내 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백포군 하나가 부리나케 안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용구가 나타났다. 단단한 몸집의 사람.
“이게 누구요?”
 용구가 회산을 끌어안았다.
“형님이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소. 내 곁에 있어 주시오.”
 회산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쪽은 내 사제일세.”
 이구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언제나 옥아와 자신에게는 하늘 같은 사람, 그런데 사제라니? 이구는 힐끗 회산을 쳐다보았다. 회산이 빙긋 웃었다. 고마움. 이구는 그것을 엷은 미소로 답했다.
“이구라고 합니다.”
“김용구라고 하오. 우리는 같은 구씨구려. 허허.”
 호탕한 웃음. 이구도 용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잘 오셨소.”
“남평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북산에서 왔네.”
“흐흐?”
 용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회산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에서의 싸움을 그만두게.”
 용구의 미간이 흔들렸다.
 옆에 있던 백포군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형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안 돼. 더 이상은.”
 회산은 간단하게 말했다. 이구도 할 말이 있었다. 그러나 우선은 참기로 하였다.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용구가 회산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회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참으로 의외였다. 분명 옥아를 구하기 위해서 온 길이었다. 옥아가 분명 사잇섬 너머에 있는 부대에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구는 뒷심이 풀렸다. 산정 곳곳에 널려 있는 무수한 사람들의 시체를 보던 회산의 분노와 증오의 눈빛, 그럼 그건 무엇이었단 말인가. 이구는 입맛을 다셨다.   
“자네, 산정 곳곳에 가득한 시체들을 보았는가?”
 용구가 눈을 감았다.
“자네가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런 건가?”
“그래서 그 먼 길을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난 그 무고한 시체들을 보면서 오히려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내가 싸우는 이유는 아직도 살아 있는 우리들 때문도 있지만, 그렇게 무참하게 죽은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서입니다.”
 이구는 회산도, 용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이런 잡다한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세상은 언제나 소란한 것이다. 때 없이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때 없이 사람들은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을 해결할 사람은 이 하늘 아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괜스레 호들갑을 떨어봐야 남는 것은 허망함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오직 옥아를 구하고 싶었다.
“자네에게 내 개인적인 부탁을 하려고 왔네. 그런데 이곳에 오면서 무수한 농민 시체들을 보았네. 더 이상은 안 되네. 어떤 명분을 달더라도. 무고한 생명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가솔들이 딸려 있는 줄 누구보다도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자네는 결코 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네.”
“형님?”
 용구가 손을 내저었다. 옆에 있던 포군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는 더 이상 형님과 나눌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구는 회산과 용구의 싸움 아닌 싸움을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지 못했다.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회산에게는 할 말이 많았다.
“자네는 내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나?”
“예?”
“아니야. 더 이상 부처는 나오지 않아. 누구나 수행을 하면 부처가 된다는 말은 거짓말일세.”
“형님께서 그 오랜 세월을 공부한 결론입니까?”
“그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어. 진짜로 부처가 되겠다고 수행하는 사람은 없어. 부처는 될 수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형님은 왜 그 오랜 세월 독립운동자금을 만주로 보내는 역할을 하셨습니까?” 
“할 일이 그것밖에 없었네. 그것으로 잘 먹고 잘 살았고.”
 회산은 용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총명한 자네는 처음부터 그걸 알고 있지 않았나?”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용구가 눈을 감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네는 내가 든 불경 대신 총칼을 들지 않았나?”
“형님?”
“부처가 없듯이 불국토도 없어. 부처도 우리가 만들고, 불국토도 우리가 만들어야지. 그게 자네 생각 아닌가?”
 용구가 눈을 반짝였다.
“몰아낼 겁니다.”
 이번에는 회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금, 자네는 이 땅의 가엾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어.”
 용구가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의 총칼에 일본군이나,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배를 불린 벼슬아치들이 몇이나 죽을 것 같은가. 평생 곡괭이질이나 산짐승을 잡아온 가엾은 농민군이나 포군들을 죽음으로 몰뿐이야. 이 싸움은 결국 우리만 죽는 싸움이 되고 있어. 내 말 틀렸나?”  
“이건 제 뜻이 아닙니다.”
“자네 뜻이 아니면?”
 용구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하늘의 뜻이지요.”
 회산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흐흐흐!”
 그리고 웃음을 딱 그쳤다.
“하늘의 뜻이 정말 있다고 생각하나? 하늘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어.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이 하늘을 운운하지 않나?”
 용구가 회산을 노려봤다. 회산이 용구를 노려봤다. 불꽃이 튀었다. 용구가 고개를 흔들었다. 회산도 고개를 흔들었다. 한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그 얘기를 하려고 그 먼 길을 오셨소?”
 용구의 말투에는 적잖은 실망이 섞여 있었다.
“사잇섬 너머 일본군 위안소에 있는 옥아라는 아이를 구하러 왔네.”
 회산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닐세. 옥아보다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내 욕심을 부릴 때가 아니란 걸 알았네.”
 회산의 말에는 진정이 넘쳐흘렀다. 회산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용구가 그런 회산의 손을 잡았다.
“형님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죽는 것은 일본군이 아니야, 우리야. 신식 총칼을 든 일본군을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더구나 자네가 상대해야 할 부대는 관동군이야. 별다른 무기도, 조직도 허술한 포군을 일본 최정예 부대와의 싸움에 몰아넣는 것은 근본적 살생이지. 내 말 틀렸나?”
 용구가 꼿꼿하게 고개를 들어 회산을 바라봤다.
“지금 할 일은 옥아를 구하는 겁니다.”
 용구와 회산의 눈빛이 부딪쳤다.
“......”
“조선 처녀가 일본군 부대에 있다면 위안부겠지요. 옥아라는 처녀는 반드시 제가 구합니다.” 
 회산은 쓸쓸하게 웃었다. 용구의 진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구를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내가 밉지?”
 그건 우스운 일이었다. 옥아를 구할 수만 있다면 몇 천 번을 죽어도 좋았다. 이구는 용구에게 머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어차피 그곳도 정찰을 해야 합니다. 이곳에서는 역시 관동군의 동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놈 들이 조선인과 중국인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실험을 마친 시체를 먹기도 한다는 소문까지 있습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조만간 적당한 시기가 오면 그 옥아라는 처녀를 구하러 가지요. 그 처녀 때문에 형님이 절 찾아오셨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회산이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