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증명서>를 손에 넣은 옥아와 분이는 다시 트럭을 타고 기무라 부대로 달렸다. 옥아와 분이는 의무실에 누워 있었다. 계획대로 된 것이다. 이곳에 누워 있다가 도망친다면 발각이 늦을 것이다. 더구나 의무실엔 항상 졸고 있는 의무병 한 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저놈을 죽이면 새벽까지 아무도 모를 거다.”
분이의 말에 옥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이 아니라 깡그리 죽이고 싶었다. 그런데 말은 다르게 나왔다.
“저놈도 불쌍한 놈이지.”
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수면제를 구해볼게.”
“어떻게?”
“관리인한테 부탁하면 돼.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너는 저놈을 꼬셔봐.”
“응?”
“저놈이 너한테 관심 있는 눈치잖아.”
“언니는?”
“정말이야. 난 척 보면 알아. 지난번에 니가 무연이 업고 왔잖아.”
첫날 주어진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않았다고 칼로 배를 찢긴 아이 이름이 무연이었다.
“......?”
“저것들은 사람도 아니야.”
“그래도 조선 사내들보다는 나아. 저런 놈을 사람이 아니라고 죽여야 한다면 조선 사내들을 몽땅 죽여야 돼. 그래도 저놈은 제 나라를 위해 이 멀리까지 와서 최선을 다하잖아. 나이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데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휴식증을 가지고 의무실로 돌아온 이후로 아무도 옥아와 분이를 부르지도 않았고, 간섭도 하지 않았다.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옥아와 분이는 밥도 의무실에서 의무병들과 함께 먹었다. 의무병들도 좋아하는 눈치였다. 세 명의 의무병 중에 감시병이 둘, 당번병이 하나였다. 옥아는 관심도 없는 의무병들의 이름을 모두 외웠다. 그중에서도 당번병은 타나카라는 24살의 병사였다. 교토대학 생물과를 나온 병사였다.
유채꽃밭에 석양은 엷고
바라다본 산등성이의 안개는 짙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하늘을 바라보면
저녁달이 걸려있어 색채는 엷어진다
마을의 등불도 숲의 색깔도
밭의 작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도
개구리의 울음소리도 종소리도
마치 스치는 듯 으스름달밤
“제목이 뭐요?”
옥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물었다. 정말 제목이 알고 싶었던 것이다.
“으스름달밤이라는 노래지. 내 고향에도 유채꽃이 많았어.”
타나카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선에도 저렇게 아름다운 자기들의 노래를 부르는 청년이 있을까? 눈을 감은 옥아는 아득히 이구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일본까지 자신을 찾아왔던 승복 차림의 이구, 그의 가슴에도 저런 노래가 들어있을까?
옥아는 회산의 가슴엔, 머리엔, 온통 저런 노래로 들어차 있다고 확신했다. 회산에게 시를 배우던 시절이 있었다. 옥아는 이구와 회산의 얼굴을 겹쳐 그리면서 타나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일본 병사 중에도 저런 놈이 있는 것이다. 아니 대다수의 일본 놈은 이 노래를 알고 있겠지. 그 순간 타나카의 다음 말이 떨어졌다.
“우리 일본인이면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잠깐 가지고 있던 타나카에 대한 연민이 혐오로 변했다. 그런 노래를 부르는 놈들이...... 옥아는 타나카를 쳐다보면서 허옇게 웃었다. 타나카는 옥아가 자신의 노래가 좋아하는 줄 알고 자꾸 지껄였다. 그렇지만 옥아는 이미 귀를 닫고 있었다. 분이는 아예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꿈만 같은 휴식이었던 것이다.
삽화 염정우
碧海浸瑤海/靑鸞倚彩鸞/芙蓉三九朶/紅墮月霜寒.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스물일곱이라는 꽃다운 나이의 어느 날,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는 집안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의 수(3×9=27, 27세를 뜻함)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 그녀의 유언에 의하여 그녀의 집 한 칸에 가득 쌓일 정도로 많았던 시편들을 모두 불태웠으니 그녀의 불꽃같던 인생이 소진할 때 그녀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던 그녀의 작품도 활활 타올라 소멸한 것이다.
우리 문학사상 가장 고립되어 있는 작품세계를 가진 시인이면서 가장 주목받지 못한 시인. 능가경을 머리끝에 놓아두고 울고 또 울다가 27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난설헌. 그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상념의 세계를 떠날 수밖에 없는 슬픈 사람들의 삶을 불꽃처럼 묘사했다. 즉 모든 생명들이 서로 지혜와 자비의 빛을 교차시키면서 광대한 화해를 이루는 대승적 인간 해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인 난설헌 역시 다른 불우했던 사람들처럼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신선의 길을 다 가지는 못했다.
그녀는 짧은 생애 동안 허망한 세계의 표상들을 다 읽고 몽환적인 슬픔으로 얼룩진 시가들을 남기면서도 결국 다른 길을 걸었다. 그가 다다른 길은 삶도 죽음도, 시간의 구별도 없는 신선들의 낙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딱딱한 <능가경>은 단지 번뇌의 운동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녀는 왜 <능가경>을 손에서 놓지 못했을까? 열혈 혁명가였던 난설헌. 그녀의 비극은 현실과 너무 다른 꿈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옥아는 눈을 감았다. 새벽에 이곳을 탈출하려면 우선 잠을 청해야 했다. 그러나 옥아는 번쩍 눈을 떴다. 타나카를 꼬셔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두워질 때까지 잠들면 안 되는 것이다. 이윽고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자정이 지나갔다. 옥아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밖에서 의무실을 지키던 초병들도 모두 돌아갔다. 의무실엔 타나카만 졸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분이가 눈을 떴다. 옥아는 천천히 일어났다.
“잠이 오질 않아요.”
옥아는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에 타나카가 눈을 떴다.
“내가 찬 한잔 타 드릴까요?”
“좋지.”
타나카가 환하게 웃었다.
옥아도 환하게 웃었다.
“밤늦은 시간 고향집에 있을 때 아버지하고 앉아 차를 마셨어요.”
옥아는 아득히 회산과 차를 마시던 밤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혀끝을 간질이던 차 냄새, 찻물을 따르던 회산의 흰 손, 그때는 왜 그걸 몰랐을까? 다시 그런 날들이 올 수 있을까. 옥아는 이제 십중팔구는 죽을지도 모를 상황 앞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모를 이상한 물건이다. 얼마 전만 해도 사람의 탈을 쓴 짐승들을 상대하기 위해 지옥을 헤매고 있었는데... 정말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록 분이가 건네준 강력 수면제를 몰래 타기는 했지만 옥아는 정성껏 차를 타서 타나카에게 바쳤다.
“고맙군. 이게 얼마 만에 맛보는 차인가?”
타나카가 다시 웃었다.
옥아도 다시 웃었다.
“그래도 차는 조선 차가 가장 맛있다고 하던데.”
그러나 옥아는 알지 못했다.
“일본인들에게 조선 것은 모두 좋지요?”
타나카가 일순 웃음을 거뒀다.
“그래서 병사들도 중국 여자, 대만 여자보다, 아니 일본 여자보다 조선 여자를 좋아하잖아요? 군대에도 가장 많은 것이 조선 여자 아닌가요?”
옥아는 생긋 웃었다.
타나카도 씁쓸하게 웃었다. 차의 깊은 맛을 음미하듯.
“타나카상은 전쟁이 끝나면 뭘 하고 싶으세요?”
타나카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한참을 생각하던 타나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학교 선생. 고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
옥아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타나카가 하고 있는 것이다. 옥아는 두 손을 양 볼로 가져갔다. 그리고 눈과 얼굴을 씻었다.
“아스카상은 여기 오기 전에 뭘 했나?”
아스카상, 이곳에 와서 비록 일본 이름이지만 그렇게 불러준 것은 타나카가 처음이었다. 이상했다. 몸이 근지러웠다. 그렇지만 그런 타나카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타나카가 서서히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얘기를 하려다가 동그랗게 눈을 뜨면서 쓰러졌다. 아마도 그제야 옥아의 의도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칼.”
분이가 칼을 옥아에게 건넸다.
옥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왜?”
“죽일 필요까지는 없잖아.”
“뭐야?”
옥아가 한숨을 쉬었다.
“빨리.”
“지 고향 노래를 부르더라고.”
“나도 들었어.”
분이의 목소리는 급했다.
“그런 놈을 어떻게 죽여.”
분이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옥아를 쳐다보았다. 옥아가 눈을 찡긋거렸다.
“대단한 옥아야. 흐흐흐. 이놈 운 좋네. 그런데 수면제 너무 탄 거 아니야. 많이 먹으면 죽는데.”
옥아와 분이는 재빠르게 타나카의 몸을 침대 밑으로 쓸어 넣었다. 그리고 살금살금 초소 옆을 지났다. 이곳 위안부들이 도망가 봐야 숨을 곳이 없기 때문에 담장은 없었다. 정문에 작은 초소 건물이 전부였다.
부대를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옥아와 분이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산이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멀리 희뿌연 산이 보였다. 옥아와 분이는 서로를 얼싸안았다. 부대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들은 다시 달렸다. 이제 얼마 가지 않아도 숲일 터였다. 그때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먼 숲 어디선가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옥아와 분이가 숲의 초입에 도착했을 때 불이 켜졌다. 환한 대낮처럼. 무려 세 대의 트럭이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 도망가 보시지?”
갑자기 켜진 불에 눈을 뜨지 못하고 주춤하는 사이, 그들의 눈엔 야마모토의 당당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옥아와 분이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내가 니년들 꼼수를 모르면 조선인이지. 내가 바보 조선인 같은가?”
“너는?”
옥아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섰다.
“아직도 우리 중좌님이 어떤 분인 줄 모르는 모양이군. 중좌님은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하셨어.”
헛웃음이 나왔다. 옥아와 분이는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이미 삶을 포기한 것이다.
“그대는 좋겠네. 그런 훌륭한 일본인 중좌님을 두셔서. 그래도 어차피 자네는 그 일본 중좌의 개밖에 안 돼. 저기 있는 병사들 누구도 자네가 일본인이라고 생각지 않아.”
옥아는 웃었다.
“뭐?”
“어디 물어볼까?”
그 순간 야마모토의 총 개머리판이 날아왔다. 옥아는 쓰러졌다. 진한 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돼지처럼 묶어서 처넣어.”
옥아와 분이는 꽁꽁 묶여서 트럭의 짐칸에 실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다음에도 일어났다. 옥아와 분이는 처형당하지도 않았고, 감금당하지도 않았고,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군인들을 바로 받게 하지도 않았다. 그전과 똑같이 의무실에 눕혀졌던 것이다. 의무실엔 타나카가 없었다. 살벌한 눈빛의 병사 둘이 그들을 묶은 밧줄을 풀어주었다.
“타나카상은?”
옥아의 물음에 병사 하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많은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당했지.”
“......?”
“아직도 시체가 연병장 바닥에 있지. 보여줄까?”
옥아는 눈을 감았다. 차라리 수면제를 더 먹여서 죽일걸. 옥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나카는 으스름달밤에 으스름달밤의 노래를 부르다가 죽은 것이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옥아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분이가 그런 옥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총으로 죽이지는 않겠지.”
“흐흐, 칼로 죽이겠지.”
“아니야. 칼을 쓰지 않을지도 몰라.”
“제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하고 산 채로 많이 묻지.”
옥아와 분이는 그렇게 말을 주고받았다.
삽화 염정우
중국 광동성의 일본군 부대에서 12명의 위안부가 도망쳤다. 그러나 이틀 후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일본군은 맨 처음 도망치자고 제안한 여자를 가르쳐주면 주모자 이외는 모두 살려준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한 명의 위안부가 대표로 끌려 나갔다. 그녀는 철봉으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아 실신했다. 그러자 고무호스를 입에 넣고 물을 틀었다. 부풀어 오른 배 위에 판자가 올려졌다. 그 널빤지 위에 군인들이 올라가 널뛰기를 하였다. 위안부의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위안부는 다시 기절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그녀의 발목을 끈으로 묶고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 바늘이 수두룩하게 박힌 검은 몽둥이를 들고 와 그녀의 입속에 쑤셔 넣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