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형제의 인연으로 살아온 소설가 정찬주 님의 소설 <광주 아리랑 1, 2>(다연 펴냄)를 택배로 받아본지도 수개월이 흘렀다. “아우, 책 보냈으니 읽어보시게.”라는 전화를 받은 지 이틀째 되던 날, 나는 두 권의 아름다운 표지로 장식된 책을 받아들었다.
강렬한 첫 인상은 표지의 그림이었다. 표지에 그려진 크고 작은 꽃송이들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서 활짝 피어나 있었던 것이다. 저 찬란한 꽃송이들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 꽃을 그린 화가는 어떤 마음으로 붓을 움직여 저 꽃송이들을 표현해낸 것일까?
한참을 바라보노라니, 내 눈에 들어온 꽃송이들은 이내 초점을 잃고 흐릿해졌고, 이어 하나하나 보살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 저 인도 땅,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기원정사 옆에서 시현되었던 천불화현의 이적이 이런 것이었을까?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해 처참하게 희생된 광주 영령들의 얼굴들이 이렇게 보살의 모습으로 피어나는 것일까? 어쩌면 이 환영이야말로 백초시불(百艸是佛)의 기적이 아니더냐.

 

부끄러움! 80년 광주를 떠올리면 내겐 부끄러움이 솟구쳐 오른다. 40년이 넘게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결과적으로 죽어가는 광주시민들을 어떤 이유로든 외면했음이 부끄러운 것이다. 당시 나는 대학 1학년생이었다. 박정희가 죽던 해 예비고사를 치렀고, 이듬해 입학하자마자 맞은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에 한 조각 부속품처럼 휩쓸렸다. 학내 시위는 물론이고 광화문 시위, 서울역 시위 등 시내 시위에 적극 참가하면서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독재정권의 실체와 민주화의 가치를 온몸으로 체험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계엄확대가 선포되고 광주가 고립되던 다음 날, 나는 교련복 차림으로 다른 수천의 대학생들처럼 동대문운동장 앞 공터에 집결해 있던 학교버스에 올라탔다. “광주로 가자! 광주를 구하러 가자!”는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당시의 구호들이었다. 서울시내 여러 대학의 로고가 박혀 있는 버스들 수백 대에 학생들이 올라타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던 중, 버스마다 광주에서 전해왔다는 급보가 날라들었다. 광주에서 급히 온 전갈을 알리겠다며 버스에 올라온 대학생이 외친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오지 말라. 광주에 오지 마라. 광주는 광주사람들이 지킨다. 당신들이 광주를 아느냐? 당신들의 도움은 필요 없다.”
일찌감치 아침밥을 먹고, 아마도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광주로 갈 대학버스에 올랐던 이십대의 혈기들은 일순 당황해 웅성거리기도 했고, ‘뭐? 우리들 도움이 필요 없다고? 이런 괘씸한 경우가 있느냐?’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우왕좌왕하던 대학생들은 하나 둘씩 버스에서 하차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당시 광주에서 보내왔다는 전갈이 서울의 대학생들을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광주 민중들의 숭고한 마음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광주로 오면 죽을 것이 뻔한 데 죽음의 구렁텅이로 서울의 젊은이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다는 광주시민들의 단심을 느꼈을 때, 든 심정은 ‘부끄러움’, 그것이었다. 동시대를 살았던 광주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죽어갈 때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오지 말라는 그 말에 도리어 불편한 마음을 냈었다는 어리석음. 이런 마음들이 나의 뇌리에 원죄처럼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후 나는 역사의 현장에는 반드시 동참한다는 신념 같은 것을 갖게 되었다. 6월 항쟁 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되던 날 온 가족과 함께 여의도로 달려갔던 것, 탄핵규탄 집회에 참여하고, 광우병 사태 때 벌어졌던 집회와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모든 역사의 현장을 지켰던 것 등이 모두 다 광주에 진 빚과 부끄러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광주 영령들에게 지은 부채를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에 행동으로 기여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갚겠다는 그런 알량한 마음이라고나 할까. 
소설 <광주 아리랑>을 펼쳐보았을 때, 나의 뇌리에 비수처럼 박힌 단어가 부끄러움이었던 것도 이런 나의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다.

 

 

김동수뿐만이 아니다. 한독고 3학년 김기광을 비롯해 수많은 ‘꽃’들이 그렇게 광주로 달려가 산화하는 장면을 읽어가며 ‘부끄러움’은 더 큰 부채의식으로 나의 가슴을 짓누른다. 청년대학생 김동수가 느꼈던 부끄러움이야 말로 선한 마음, 곧 보살님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그가 느꼈던 부끄러움과 그에 바탕한 용기는 마침내 광주를 구했고, 장렬하게 세상을 떠났으나 만인의 가슴에 보살로 환생한 것이 아니겠는가.

 

1988년 5월 불교기자로 막 첫걸음을 떼던 때 맞았던 초파일에 편집국의 젊은 기자들이 모여 광주항쟁 당시 조선대불교학생회 회장으로 전남도청을 사수하다가 총탄을 맞고 사망한 지광 김동수 불자를 기리는 칼럼을 쓰자고 의견을 모았다. 동료기자가 작성한 그 칼럼의 제목을 당시에는 파격적으로 ‘김동수 보살’로 붙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재가자에게 ‘보살’의 호칭을 붙이는 것은 과하다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나는 이 제목을 적극 찬동하며 관철시키는 역할을 담당했었다. 돌이켜보면 그 또한 광주에 대한 나의 부끄러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광주 아리랑>이 세상에 나온 지난 5월, 이 소설에 대한 찬사 가득한 서평이 많은 매체에서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높은 평가가 이어진 이 소설에 산골에 은거하듯 사는 내가 또 하나의 평가를 보태는 것이 그리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주화를 이뤄낸 나라에서 마음 놓고 말할 수 있고, 마음 놓고 읽고 쓸 수 있게 된 우리 시민들, 살아남은 사람들은 1980년 광주에 진 빚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기에 이렇게 졸필을 더한다.

 

거듭 강조하건데, 광주항쟁 당시 함께하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간직한 시민들, 아니 민주주의를 만끽하는 오늘날의 모든 시민들은 특히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숱한 무명의 의사와 열사들의 희생을 간과해선 안 된다. 아직 이 소설을 읽어보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광주항쟁 당시 산화해간 수많은 장삼이사들(張三李四, 유명하지 않은 분들을 폄하하고자 하는 표현이 결코 아님),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으나 부상자를 위해 줄지어 헌혈을 하거나 주먹밥을 날랐던 시민들, 그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시민들, 그 모든 이들이 한 송이, 두 송이 아니 수백 송이의 꽃으로, 급기야는 한 분, 두 분… 차례로 보살로 화현하여 나투는 생생한 감동을 이 소설을 통해 만나보시기 바란다. (상하, 각 권 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