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었다.
 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까지 이른 인물이기는 하나 아내 허난설헌에 비하면 바보였다. 남편의 친구 송도남이란 사람이 늘 남편을 찾아와서 이렇게 놀렸다.   "멍성립이 덕성립이 김성립이 있느냐?"  자신을 아주 대단한 유학자라고 자처했던 김성립은 그럴 때마다 한마디 대꾸를 하지 못했다. 매번 송도남에게 쩔쩔매는 김성립에게 허난설헌은 응수할 말을 가르쳐주었다. 다음 날도 송도남이 찾아와 놀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성립이 환하게 말했다. "오, 귀뚜라미 매두라미 송도나미 왔구나!"  그러자 송도남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부인에게서 배운 모양이군."
 
 옥아는 넌지시 웃었다. 바로 그런 김성립같은 사내가 나라를 이끈 것이다. 그것도 한두 해가 아니라 몇 백 년을. 그게 이씨 조선이었다. 
“강옥아.”
 작업반장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옥아를 쓰러뜨리고 짓밟은 바로 그녀였다. 반장은 옥아보다 두 살이나 어렸다. 아직도 앳된 소녀의 얼굴을 벗지 못한 반장의 얼굴 위로 무심한 초봄의 햇볕이 지나갔다. 평상시와 달리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면회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협회 사무실로 나가봐.”
 가슴이 내려앉았다. 
“......?” 그녀는 반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반가운 사람이 찾아왔어.”
 반장의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묻어 있었다.
 옥아는 한숨을 쉬었다. 여공이 협화회 사무실로 나간다는 것은 아주 나쁜 징조였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좋은 일로 여공을 부르는 법이 없었다. 열중의 아홉은 돈을 뜯어내기 위해, 아니면 다른 곳으로 팔아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옥아는 일손을 놓고 천천히 협화회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틀림없이 야학 때문일 것이다. 조금만 더 있으면 마칠 수 있는데. 그녀는 할 말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조심스럽게 사무실 문을 밀었을 때, 뜻밖에도, 아니 꿈에도 생각 못 한, 이구가 서 있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 옥아는 이구의 얼굴에서 이상하게도 회산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아니?”
“......”
 머리를 깎은 승복 차림의 이구가 그녀를 쳐다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어떻게?”
 그녀의 가슴 한구석에 찬물이 지나갔다.
“자아, 앉아서 이야기 나누시고......”
 혼자 앉아 있던 협회 간부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처사님이 여긴......”
 그녀를 한참 쳐다보던 이구가 입을 열었다.
“아씨 스님을 만나려면 아무래도 이 복장이 필요해서요.”
 이구는 공연한 변명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순진한 사람, 옥아는 이구의 말을 들으면서 빙긋 웃었다. 좀 놀려먹고 싶은데, 장소와 때가 맞지 않았다. 어디서 어떻게 지냈을까? 아버지가 죽지 않은 것은 알고 있을까? 그리고 여기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구가 또다시 말을 붙였다.
“다른 말씀은 다음에 하시지요. 회산 스님이 절 보내셨습니다. 아씨 스님이 지금 하고 계신 일,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짐작이 갔다. 그러나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 와서 야학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편지를 쓰지 않는 건데... 그녀는 멍청하게 이구를 쳐다보았다. 침착한 얼굴이었다.
“북산으로 가셨던가요?”
“아마 지금은 스님이 그곳에 계실 겁니다.”
 옥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협화회와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옥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이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시지요?”
 옥아가 웃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할 일을 찾았습니다. 여태까지 남에게 얹혀만 산 삶이었습니다. 이제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곳은 내가 있어야 합니다. 아마 처사님이라도 그렇게 하셨을 겁니다.”
“중단하지 않으면 끔찍한 일을 당할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옥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지요.”
“공장도, 협화회도 아씨 스님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적당한 기회를 엿보고 있지요. 아마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빙긋 웃었다.
“스님은 항상 나쁜 일이 아니라면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더구나 여기 여공들을 가르치는 일은 죽더라도 꼭 해야 되는 일입니다.”
“죽으면 문제가 없겠지요. 스님이 절 이곳으로 보냈을 때는 아씨 스님이 죽을까 봐 보낸 것이 아닙니다.”
“스님께 전해주세요. 가르쳐주신 대로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고. 이제 여공들이 글자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씨 스님이 알고 있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말 이구의 말이 맞았다. 그때까지도 옥아는 회산과 이구가 걱정하는 진짜 결말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옥아는 야학 때문에 심신이 들떠 있었던 것이다. 회산이 염려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는 옥아의 성정.
“처사님, 지금도 가시나무를 하시나요?”
“예?”
“돌아가시거든 살아있는 소나무 건 참나무 건 마구 찍으세요. 그것으로 사람들이 얼어 죽는 것을 면할 수 있다면...... 저도 지금 펄펄 살아있는 소나무를 찍고 있습니다.”
 이구는 옥아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옥아가 아직도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이구는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협화회 사무실에서 위안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모두 다 알고 있지만 절대로 얘기해서는 안 될 비밀이었던 것이다.
“내일 야간 조 여공들이 바닷가로 소풍을 갈 겁니다. 그 때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 빠지세요. 협화회 사람들하고는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그때 협회 간부가 들어왔다. 나쁜 사람들, 그렇게 많은 돈을 꿀꺽하고도 겨우 내주는 면회 시간은 병아리 눈물만 한 시간. 이구는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이야기는 충분히 나누셨지요?”
“예. 감사합니다. 강옥아씨, 저는 그렇게 알고 돌아가겠습니다.”
 이구는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먼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흐흐, 강옥아, 생소했다. 이구에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옥아는 긴 법복을 끌고 공장 광장을 걸어가는 이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부질없는 세월이 남겨 놓은 상처.

 

 

 다음날 정말 여공들에게 상상할 수도 없는 행복한 시간이 찾아왔다. 물론 가끔 근처의 바닷가로 소풍을 보내주기는 했지만 자유시간은 전혀 불허했다. 그런데 오늘은 충분한 자유가 여공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여공들은 일본인들이 먹지 않는 돼지 내장과 뼈를 삶아 바닷가에서 먹었다. 물론 일본 감시인들이 붙어 있었지만. 정어리와 무짠지에 진력이 나있던 여공들은 오랜만에 배불리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르고 싶은 노래는 부를 수가 없었다.
 다른 여공들처럼 옥아도 행복했다. 그녀는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이구의 모습을 일부러 외면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회산이 얼마의 돈을 썼는지는 불을 보듯 자명했다. 산속에 앉아 눈을 감고 있을 회산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아마 회산도 자신이 이구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마음, 명분에 목숨을 거는 조선 사내들을 싫어하면서도 회산 역시 조선 사내였다. 옥아는 이구를 향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이 지옥을 혼자만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아니 빠져나가고 싶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짜 할 일을 찾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