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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종의 ‘불전으로 읽는’ 붓다 일대기 ㉝

이학종 | urubella@naver.com | 2020-05-15 (금) 10:15

라훌라, 아라한이 되다
 
붓다의 아들이자 8살 때 출가해 최초의 사미가 되었던 라훌라는 사리뿟따를 스승으로 정진에 매진하고 있었다. 붓다는 아들이기도 한 사미 라훌라를 특별하게 대우하지는 않았지만 틈틈이 시간을 내어 지도하곤 하였다.
붓다가 사왓띠 기원정사에 머물 때, 막 18살이 된 라훌라도 그곳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붓다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를 들고 시내로 탁발을 나섰다. 기품 있는 걸음으로 앞서가는 붓다를 따라 라훌라도 탁발 행렬에 함께 했다. 라훌라는 아버지이기도 한 붓다를 뒤따라가면서 발바닥부터 머리털까지 붓다를 살펴보았다. 어느 것 하나 우아하지 않음이 없는 모습을 보며 라훌라는 생각했다. ‘세존께서는 참으로 멋지시다. 서른두 가지 대인상을 가진 몸은 참으로 아름답다. 서른 가지 바라밀을 두루 완성하신 뒤에 생긴 몸은 이렇게 아름다운 광영을 구족하는구나!’ 그리고 라훌라는 자신의 몸도 살펴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나도 멋지다. 만약 세존께서 네 개의 대해에서 전륜성왕이 되셨다면 내게 지도자의 자리를 물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이 잠부디빠는 아주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때 붓다는 라훌라가 여전히 세속적인 열정과 욕망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고 그의 마음속에 깊숙하게 자리한 오염원을 제거해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라훌라를 불러 말했다.
 
“라훌라야.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칠든 섬세하든, 저열하든 수승하든,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물질에 대해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통찰하여야 한다. 알겠느냐?”
 
붓다의 타이름에 라훌라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세존이시여, 오직 물질만 그러합니까? 오직 물질만 그러한 것입니까?”
“라훌라여, 물질도 그렇고, 느낌도 그렇고, 인식도, 심리현상들도, 알음알이도 그러하다.”
 
그러자 라훌라는 자신에게 직접 경책을 내린 붓다의 마음을 간파하고는 이렇게 생각했다. ‘목전에서 세존의 경책을 들었거늘,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찌 오늘 마을로 탁발을 나갈 것인가?’ 라훌라는 탁발 가던 일을 그만두고 경책을 받은 그 자리에서 정사로 돌아와 한 나무 아래에 앉았다. 붓다도 발길을 되돌리는 라훌라의 모습을 보고는 ‘오늘 만큼은 몸에 대한 마음챙김이라는 불사(不死)의 음식을 먹으리라’고 생각하고 제지하지 않았다.
한편 나무 아래에서 온종일 정진을 하고 있는 라훌라를 발견한 사리뿟따가 다가가 말했다.
 
“라훌라여, 들숨과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기억챙김)을 닦아라. 라훌라여, 들숨과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고 많은 공부를 하면 더 큰 진전과 큰 공덕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세존의 지도에 따라 물질과 느낌, 인식, 심리현상, 알음알이에 대해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나도 아니며, 나의 자아도 아님’을 관찰하고 있는 자신에게 은사 사리뿟따가 건넨 말을 들은 라훌라는 조용히 일어나 은사 사리뿟따에게 예배하고는 발길을 돌려 붓다를 찾아갔다. 라훌라는 세존에게 예배를 하고 한 곁에 앉아서 물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들숨과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고 어떻게 많이 공부를 하면 큰 결과와 공덕이 있게 되는 것입니까?”
 
라훌라의 질문을 들은 붓다는 들숨날숨에 마음을 챙기는 수행방법보다는 라훌라의 열망과 욕망을 제거하게 돕기 위해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 알음알이에 대한 설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라훌라야, 몸 안에 있고 개개인에 속하고 딱딱하고 견고하고 업에서 생긴 것은 무엇이건 내적인 땅의 요소[地界]라 한다. 예를 들면 머리털, 몸털, 손발톱, 이, 살갗,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염통, 간, 근막, 지라, 허파, 창자, 장간막, 위 속의 음식, 똥과 그 외의 몸 안에 있고 개개인에 속하고 딱딱하고 견고하며 업에서 생긴 것은 무엇이든 지계라고 한다. 라훌라야, 이에 대해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통찰해야 한다. 이와 같이 이것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면 땅의 요소를 염오하고, 마음이 땅의 요소에 대한 탐욕을 빛 바라게 한다[離欲].”
 
붓다는 이어 물의 요소[水界], 불의 요소[火界], 바람의 요소[風界], 허공의 요소[空界]에 대해 설명하고, 땅을 닮는 수행, 물을 닮는 수행, 불을 닮는 수행, 바람을 닮는 수행, 허공을 닮는 수행을 닦을 것을 당부했다. 붓다의 간곡한 설법에 라훌라의 눈망울은 구슬처럼 빛났다. 세속적 욕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자신에 대한 참회와, 친부이기도 한 스승의 혼신을 다한 가르침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의 눈가에는 시나브로 물기가 맴돌았다. 붓다의 설법은 계속 이어졌다.
 
“라훌라야, 자애의 수행을 닦아라. 네가 자애의 수행을 닦으면 어떤 악의라도 다 제거될 것이다. 라훌라야, 연민의 수행을 닦아라. 네가 연민의 수행을 닦으면 어떤 잔인함이라도 다 제거될 것이다. 라훌라야, 더불어 기뻐함의 수행을 닦아라. 네가 더불어 기뻐함의 수행을 닦으면 어떤 싫어함이라도 다 제거될 것이다. 라훌라야, 평온의 수행을 닦아라. 네가 평온의 수행을 닦으면 어떤 적의라도 다 제거될 것이다. 라훌라야, 부정하다고 인식하는[不淨想] 수행을 닦아라. 네가 부정하다고 인식하는 수행을 닦으면 어떤 탐욕이라도 다 제거될 것이다. 라훌라야, 무상을 인식하는[無常想] 수행을 닦아라. 네가 무상을 인식하는 수행을 닦으면 물질 등에 대해 나라고 하는 자만은 모두 제거될 것이다. 라훌라야, 들숨과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기억챙김)을 닦아라. 네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거듭거듭 행하면 실로 큰 결실과 이익이 있다.”
 
라훌라를 가르치는 붓다의 심경은 어쩔 수 없이 더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경우이기도 했다. 그러나 붓다는 한 순간도 라훌라에 대한 엄격함을 놓치지 않았다.
라훌라는 20세가 되어 비구계를 받았다. 비구계를 받고 2년 후 붓다가 사왓티 기원정사에서 14번째 안거를 하고 있을 때 라훌라를 불러들였다. 라훌라의 공부가 어느 정도 성숙해지면서 오래지 않아 궁극의 경지에 이를 인연이 성숙되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붓다의 자상하고도 간곡한 지도를 받은 라훌라는 곧 몸과 입, 그리고 정신적 행위의 완전한 경지를 이루고, 오래지않아서 최고의 경지인 아라한의 지위를 증득했다. 할 일을 다 마친 라훌라는 이렇게 자신의 경지를 게송으로 읊었다.
 
아는 자는 나에 대해 안다.
‘현선(賢善)한 라훌라는 양면을 갖추었다.’라고
나는 깨달은 님의 아들이자
가르침에 대하여 눈을 갖춘 님이다.
 
번뇌는 부서졌고 다시 태어남은 없다.
공양 받을 만한 거룩한 님으로
세 가지 명지를 갖추었으니,
불사(不死)를 보는 거룩한 님이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눈멀어 그물에 걸린 자들,
갈애의 덮개에 덮인 자들,
방일의 결박에 묶인 자들은
통발에 잡힌 물고기와 같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그 악마의 결박을 끊고
뿌리째 갈애를 뽑아버렸으니,
나는 청량하게 적멸에 든다.
 
진리 앞에 모든 것은 평등 
 
붓다는 사왓티에 있을 때 주로 수닷따가 세운 기원정사에서 머물렀지만, 종종 위사카가 지은 사원인 동원정사에서도 머물곤 했다. 붓다가 동원정사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와셋타와 바라드와자라는 두 젊은 바라문이 출가할 생각으로 찾아와 비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와셋타는 붓다와 아난다가 그늘 아래서 산책하고 있는 것을 보고 친구 바라드와자에게 말했다.
 
“바라드와자, 저기 세존과 아난다 존자가 그늘 속에서 산책하고 계신다. 저분들께 가서 의심나는 것들을 물어보자.”
“그래,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네.”
 
그들은 붓다와 아난다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 옆에 서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발견한 붓다가 물었다.
 
“와셋타와 바라드와자, 그대들은 모두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출가사문이 되기 위해 여기 와 있다. 다른 바라문들이 그대들을 중상하거나 비난하지는 않는가?”
“스승이시여, 그들은 우리의 출신을 생각하라며 비난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출신 신분이 어떻다는 것인가?”
“스승이시여, 그들의 주장으로는 바라문이 가장 높은 카스트이고, 나머지는 열등한 카스트라고 합니다. 바라문은 피부가 희고 나머지는 검으며, 자기들은 청정한데 나머지는 순수하지 않으며, 바라문은 범신(梵神)의 입에서 태어났으니 적법한 범신의 상속자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런 최상의 카스트를 버리고 범신의 발바닥에서 나온 천하고 검은 작자들, 천박한 민둥머리 사문이 되려느냐?’고 힐난했습니다.”
“와셋타와 바라드와자, 그런 바라문들은 옛 역사를 모두 잊어버리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 바라문 여인들이 달거리를 하고, 임신한 뒤, 아기를 낳고, 젖을 물리는 것을 보지 않았다는 것인가? 어떻게 여인의 태를 빌어 태어난 그들이 스스로를 범신의 입에서 나왔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들이 범신의 입에서 나왔다는 말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순수하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크샤트리야, 바이샤, 수드라도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바라문 가운데 악행을 삼가고 유익한 행을 닦아 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다른 카스트 출신들도 마찬가지다. 바라문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스승이시여.” 와셋타와 바라드와자가 대답했다.
“그들 바라문들이 뭐라고 하던, 나의 제자들은 인간을 우월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도덕성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여기서 뿐만 아니라 먼 미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와셋타와 바라드와자, 한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코살라 왕국의 빠세나디 왕은 수행자 고따마 붓다가 사끼야 족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끼야 왕국은 빠세나디 왕에게 공물을 바치는 변방의 속국이다. 그들은 빠세나디 왕에게 이런저런 편의를 제공하고, 엎드려 절하며, 적절한 부역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빠세나디 왕은 나에게, 그의 속국인 사끼야 족의 아들인 나에게 사끼야 족들이 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스승이시여, 세존께서는 가장 덕스러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덕성은 지금 여기서나, 먼 훗날에도 가장 존경할 만한 것입니다.” 와셋타가 말했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와셋타가 다시 물었다.
 
“스승이시여, 만약 바라문들의 그런 주장에 정당성이 없다면 그들은 어떻게 그런 주장을 믿게 되었습니까?”
“와셋타, 지금 우리가 아는 이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어 왔는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아마 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색을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가 채용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원칙이 있다.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경험을 규준(規準)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계 또한 그건 전개와 소멸 과정을 거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설령 우리가 세계의 진행을 설명하기 위해 그런 원리를 적용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세계의 시초에 이를 수는 없다. 세계의 시초는 고사하고 인간 생명의 시작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와셋타,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이 세계가 소멸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때 어떤 생명체는 이 세상에서 쌓은 공덕으로 빛의 세계에 태어난다. 오직 마음으로 된 그들은 스스로 빛을 내고, 허공을 날며, 거기서 즐겁게 살아간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이 세상이 다시 전개되어 진화하면, 빛의 세계에 살던 존재들이 이 세계로 돌아온다.”
“스승이시여, 그때 이 세계는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이번에는 바라드와자가 물었다.
“바라드와자, 아마 커다란 물 덩어리로, 어둠에 쌓여 있을 것이다. 해나 달이나 별도 분명하지 않을 것이며, 낮과 밤, 계절, 해, 암수 구분도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스승이시여, 어찌하여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은 것입니까?” 다시 와셋타가 물었다.
 
붓다가 미소를 머금고 와셋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에 어떤 생명도 없는데, 누구에게 무엇이 분명하겠는가? 빛의 세계에서 생명들이 내려옴으로써 비로소 존재 또는 생명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이다.”
 
와셋타는 붓다의 대답이 암시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다. 붓다의 이야기는 단지 인간의 경험이 미치지 못하는 아득한 옛적, 혹은 미래에 관한 추측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들이 이 세계에 살게 된 최초의 생명체들이었다.”
 
붓다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다시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마치 끓었던 우유가 식으면서 표면에 거죽이 엉기듯이, 이 땅덩어리가 자양분과 함께 바다 위에 떠올랐다. 땅은 마치 달콤하고 맛있는 꿀과도 같았다. 생명체 가운데 하나가 손가락으로 땅의 자양분을 찍어 맛보았다. 그 뒤, 그 생명체는 그 맛에 탐착하게 되었다. 다른 생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점점 많은 양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그러면서 그들의 몸은 빛을 잃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서 해(日), 달, 별, 밤과 낮, 달(月)과 계절과 해(年)가 생겨났다. 그들이 자양분을 계속 먹으면서 몸은 점점 조악하고 거칠게 되고 피부색이 생겨났다. 이 피부색으로 그들은 서로를 구별하게 되었다. 이 달콤한 자양분이 사라지고 땅 위에는 식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버섯, 넝쿨 식물, 마침내는 나무와 같은 큰 식물이 생긴 것이다. 애초 빛의 세계에서는 구분되지 않았던 생명들이 점차 암수 성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들에게 성욕이 일고, 결국 성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다른 생명들이 그러고 있는 것을 본 다른 생명들은 흙덩이를 던지며 저주했다. ‘죽어라, 이 더러운! 죽어라, 이 더러운!’ 요즘에도 결혼하는 신혼부부에게 흙과 먼지를 뿌리는데, 사람들은 그 의미를 잊고 있지만 그건 바로 오랜 옛날 관습의 흔적이다. 그러나 와셋타, 그때 비도덕적이라고 했던 것들이 나중에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었다. 비도덕적인 행위를 감추고 숨기기 위해서 그들은 울타리를 만들고 집을 지었다. 이렇게 가족이 생기게 되었다. 가정생활과 향락에 필요한 시간을 아끼기 위해 그들은 농사를 짓고 식량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욕심 많은 자는 자기 것을 지키면서 남의 것에 손을 대는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별 다툼 없이 넘어갔지만 세월이 가면서 그들은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에게 벌을 주고, 싸움을 중재할 사람을 뽑으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선을 보호하고 악을 제지하는 정의의 심판관을 선출하게 된 것이다. 와셋타, 이게 바로 최초의 왕 마하삼마따, ‘위대한 선출’이다. 그의 임무는 들판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보수로 사람들은 자기 소득의 일부를 그에게 지급했다.”
“스승이시여, 크샤트리야는 ‘들판의 관리자’가 아니라 ‘칼잡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까?”
“와셋타,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도, 욕심 많고 힘센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고 훔치는 일은 흔히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왕은 영토를 확장하거나 방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악행을 규제하기 위해서 선출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겠나?”
 
붓다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고, 와셋타와 바라드와자는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했다.
 
“사회 안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인간들의 사악한 행위에 염증을 일으키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숲 속에서 그들은 사회 속에 그런 악이 일어나게 된 이유와 어떻게 그런 악을 제거할 것인가 숙고했다. 그들이 곧 바라문, 명상 전문가들이다. 바로 그 명상가들은 이제 명상가가 아니라 떠버리 상담가로, 얼치기 교사로, 의식 전문가로 전락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생업을 꾸리는 사람들이 바이샤가 되었고, 사냥꾼처럼 사람들이 꺼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수드라가 된 것이다. 이게 바로 네 가지 카스트가 생겨나게 된 바탕이다. 사람의 카스트는 태생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에 따라 정해진 것이다. 그렇다고 어떤 일이 귀하거나 천한 것이 아니다. 어떤 태도로 그 일을 하는가에 따라 귀하기도 하고 천하게도 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를 보라. 곤충, 새, 파충류, 동물 가운데는 수없이 많은 종이 있다. 모든 종이 각각 다르다. 그러나 인간 가운데 그런 차이는 없다. 인간은 모두 한 종이다. 선천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보호와 자비의 대상이 될지언정, 그것이 어떤 차별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인간을 높고 낮은 카스트로 구분하는 것은 최악의 사회 정의다. 거기에 어떤 정당성도 없다. 와셋타, 인간사회에 최상의 규준은 도덕성이다.”
젊은 바라문 와셋타와 바라드와자는 붓다의 열린 사고방식과 모든 인간에 대한 한없는 자비심에 환희심이 솟았다.
 
광대한 우주 속에서 인간은?

아난다는 붓다와 바라문 청년 와셋타, 바라드와자의 토론을 묵묵히 경청했다. 그는 그 바라문 청년들이 모든 의심을 풀어 버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저녁 무렵, 그는 홀로 앉아 있는 붓다에게 다가가 물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바라문 와셋타와 바라드와자에게 세계가 소멸한 다음, 다시 전개되어 인간사회가 형성되는 것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스승께서는 세계의 소멸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세존이시여, 대중을 위해 그 점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아난다, 수미산을 생각해 보자. 수미산은 가로, 세로 사십만 요자나(소가 끄는 수레로 하루 가는 거리, 약 12킬로미터)에, 바다 속으로, 다시 바다 위로 각각 사십만 요자나나 뻗어 있는 산 가운데 왕이라고 한다. 아난다,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인간의 수명을 이 산과 비교하면 어떤가?”
“세존이시여, 수미산에 비하면 인간의 위치란 실로 미미하기 그지없는 것이며, 수명은 없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렇다. 아난다. 인생이란 실로 무상하고,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집착을 버리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난다, 아득히 먼 훗날, 언젠가 여러 해 동안 전혀 비는 내리지 않고 모든 생명, 씨앗, 곡식, 작은 풀조차 모두 타 버리고, 완전히 사라지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오랜 세월이 흘러 두 번째 태양이 나타난다. 그리되면 작은 개울과 연못들은 모두 말라 버리게 된다. 다시 세 번째 태양이 나타나면서 강가, 야무나, 아찌라와띠, 사라부, 그리고 마히 같은 큰 강들이 말라 버린다. 네 번째 태양이 나타나면 그 강들의 원천인 아노땃따, 시하빠빠따, 라타까라, 깐나문다, 꾸날라, 찻단따, 그리고 만다끼니 같은 큰 호수도 완전히 말라붙는다. 다시 오랜 세월이 흘러 다섯 번째 태양이 나타나면, 바닷물도 증발하여 줄어들기 시작한다. 나중에 대양의 바닥은 마치 비가 그치고 난 다음에 소발자국에 고인 물처럼 보일 것이다. 다시 여섯 번째 태양이 나타나면, 수미산과 대지는 연기를 내뿜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아난다야, 일곱 번째 태양이 나타난다. 이제 수미산은 물론 이 대지는 완전히 타 버리고 재조차 보이지 않게 된다. 아난다, 이 세상은 이렇게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붕괴된다. 그 과정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이 오랜 겁(劫) 동안에 일어나며, 다시 생겨나는 것도 또한 그럴 것이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 세계가 다시 전개되면서 빛의 세계에서 온 생명들이 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말고도 다른 세계가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다. 아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무변광대한 우주의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다. 최소한 세 개의 대천(大天) 세계가 있다.”
“세존이시여, 그건 어떻게 생겼을까요?” 아난다가 물었다.
“아난다, 저 태양과 달이 돌면서 비추는 세계가 있다. 그런 세계 천개를 합친다고 생각해 보라. 천 개의 태양, 천 개의 달, 천 개의 수미산, 천 개의 땅덩어리, 천 개의 사천왕 세계, 천 개의 야마천, 천 개의 도솔천, 천 개의 화락천, 천 개의 타화자재천, 천개의 범천…. 이것이 아난다, 하나의 소천(小天)세계다.”
“세존이시여, 소천세계라면 그 보다 더 큰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다, 아난다. 어떤가, 이 소천세계를 다시 천 개 합한다고 상상한다면?”
“세존이시여, 도저히 계산이 되지 않습니다.”
“이 천 개의 소천세계가 모여 하나의 중천세계가 된다. 다시 천개의 중천세계가 모여 하나의 대천세계가 된다. 아마도 이 우주에는 최소한 이런 대천세계가 삼천 개 이상 있을 것이다.”
 
아난다는 붓다의 우주 묘사에 기가 질렸다.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이 광대한 시공 속에서 고작 백년을 넘지 못하는 덧없는 인생의 가치란 무엇이란 말인가? 아난다의 혼란과 곤혹스러움을 짐작한 붓다가 말했다.
 
“아난다, 시간은 인간을 먹어 치운다. 사람들은 자기네 삶이 시간의 처분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또한 매정하고 냉혹한 것이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었다’는 표현을 ‘깔라까타’, 즉 ‘시간을 다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깨달음을 이루고 해탈을 성취한 내 제자들은 시간에 먹히지 않는다. 그들은 시간을 쓸 뿐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습니다.”
“아난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대를 탓하지 않는다. 가장 치밀하고 정교한 머리를 가진 사람들도 그 문제로 고심했다. 그들은 세계가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무한한지 혹은 유한한지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그러나 참으로 흥미롭고 이상한 것은, 자기들이 지금 시간에 관해 숙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난다, 내 그대에게 간단한 질문을 하나 해볼까. 인간이 어떻게 시간 개념을 가지게 되는가? 좀 더 쉽게 말해서, 인간이 무엇에 근거해서 시간을 알게 되는가?”
 
붓다의 질문에 아난다는 낭패감을 느꼈다. 그로서는 전혀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문제였던 것이었다. 그동안 시간이라면 그저 당연한 것, 그 속에 모든 것이 나타나는 것으로 치부해 버려왔다. 사람들에게 시간이란 그냥 절대적인 것이었다. 붓다는 자신의 질문이 아난다에게는 너무도 난감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난다, 인간에게 기억능력이 없다면 시간감각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무언가를 기억하면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기억이 바로 시간의 기원이다. 물론 우리가 과거의 몇몇 사건을 기억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세계의 시초를 말할 수는 없다. 오직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그 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난다, 내가 아는 한, 이 세계는, 세계의 시작과 소멸과 그 소멸에 이른 과정은, 이 볼품없는 한 길 몸뚱이 속에 있다. 다만 이 몸뚱이는 죽은 고기 덩어리가 아니라 기억하고, 느끼고, 인식하고, 깨어 있는 마음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깨달은 자는 시간에 먹히거나 시간에 제한당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시간을 먹고, 시간을 고르기에 시간으로 인해 근심할 일이 없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어디서 이런 법문에 접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서도 전혀 들어보지 않은, 들어볼 수 없는 가르침입니다. 실로 전통의 고루한 껍질을 깨고, 새로운 경지를 활짝 여는 법문입니다.”
 
홀로 수행하겠다고 떠났으나…
 
붓다가 성도한 후 13년 째 되던 해였다. 붓다는 짤리까 바위산(Cālikāpabbata)에서 안거를 보내고 있었다. 짤리까 바위산 근처에는 잔뚜(Jantu) 마을이 있고 끼미깔라(Kimikālā) 강이 옆으로 흐르고, 강둑으로는 망고 숲이 가로수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광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싱그럽기 짝이 없었다.
이때 까삘라왓투의 사끼야 족 출신인 메기야 비구가 붓다의 시자로 있으면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가 붓다를 모시고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끼미깔라 강변의 망고 숲을 보고는 매료되고 말았다.
‘이 망고나무 숲은 아름답고 즐길만하다. 이 망고나무 숲은 정진하기를 원하는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 정진하기에 알맞다. 세존께서 허락하시면 나는 이곳에서 정진하리라.’
메기야는 붓다에게 나아가 끼미깔라 강변의 망고 숲에서 수행하고 싶다며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붓다는 다른 비구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며 두 번이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메기야가 세 번째로 거듭 요청을 해오자 허락을 해주었다.
메기야는 붓다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끼미깔라 강변의 망고 숲으로 달려가 수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행은 제대로 되지 않았고, 되레 온갖 망상이 일어났다. 예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분노, 폭력의 욕구가 어지럽게 그를 괴롭혔다. 도저히 망상히 가라앉지 않자 메기야는 다시 붓다에게로 찾아와 예배한 후 말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끼미깔라 강변의 망고나무 숲에 머물 때 대부분 세 가지의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에 매인 사유, 분노에 매인 사유, 폭력에 매인 사유였습니다. 그러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였는데, 이런 불건전한 사유에 사로잡혀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라고. 도무지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어 이렇게 다시 돌아왔습니다.”
“메기야여, 마음에 의한 해탈이 성숙하지 않았다면, 다섯 가지 원리가 성숙에 도움이 된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메기야여, 여기 수행승이 선한 벗, 선한 친구, 선한 동료와 사귄다. 메기야여, 마음에 의한 해탈이 성숙하지 않았다면 이 첫 번째 원리가 성숙에 도움이 된다. 메기야여, 더욱이 수행승이 계행을 지키고 계율의 항목을 수호하고 알맞은 행동과 행경을 갖추고 아주 작은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을 받아 배운다. 메기야여, 마음에 의한 해탈이 성숙하지 않았다면 이 두 번째 원리가 성숙에 도움이 된다.”
 
붓다는 이어 수행승이 버리는 삶을 살고 마음을 여는 데 도움이 되고 오로지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적멸하여, 곧바로 알고 올바로 깨닫고 열반에 드는 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세 번째 원리로, 불건전한 원리를 제거하고 착하고 건전한 원리를 갖추기 위해 착하고 건전한 원리에 대하여 견고한 자이고 확고하게 노력하는 자이고 멍에를 내려놓지 않는 자로서 열심히 수행하는 것을 네 번째 원리로, 지혜로워 고귀한 꿰뚫음으로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생성과 소멸에 대한 지혜를 갖추는 것을 다섯 번째 원리로 제시했다.
붓다는 또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리와 함께 탐욕의 제거를 위해 부정을 닦을 것, 분노의 제거를 위해 자애를 닦을 것, 사유의 제거를 위해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기억챙김)을 닦을 것, 내가 있다는 자만의 제거를 위해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을 것을 가르쳤다. 스승을 홀로 남겨두고 떠난 제자를 위해 노여움을 내기는커녕 한없는 자비와 연민으로 설법을 하는 붓다의 모습에 메기야는 고마움과 죄송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붓다가 다시 말했다.
 
“메기야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이루면, 무아에 대한 지각이 이루어지고, 무아에 대한 지각을 이루면 ‘내가 있다’는 자만은 제거되고 현세에서 열반을 이룬다.”
 
붓다는 설법을 마친 후 그 뜻을 헤아리면서 감흥어린 시구로 참회하는 제자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저열하고 미세한 사유가
따라오며 정신을 혼란시킨다.
이러한 정신에 나타나는 사유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마음은 이리저리 달린다.
 
정신에 나타나는 사유들을 자각하고
정진과 기억챙김을 갖추어
정신을 수호하는 깨달은 님은
정신을 따라오며 그것을 표류시키는
그 사유들을 남김없이 여읜다.
 
붓다의 시구를 들은 메기야는 그 자리에서 수다원과를 성취해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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