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가 수닷따가 세운 제따 동산의 아나타삔디까(기원정사)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금지옥엽처럼 키우던 외아들을 잃고 크게 낙담하여 실의에 빠진 한 사내가 붓다를 찾아왔다. 가눌 수 없는 슬픔으로 그는 거의 실성할 지경이었다. 까닭을 묻는 붓다에게 그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었습니다.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겠습니까? 아들이 죽고 나서는 도무지 손에 일이 잡히지 않고, 살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줄곧 아들을 화장했던 곳을 오가며 소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사내를 지켜보던 붓다가 말했다.

 

“그게 이런 겁니다. 귀엽고 사랑하는 사람은 슬픔과 비탄, 괴로움, 절망을 가져다줍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까?” 사내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세존이시여, 귀엽고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슬픔과 비탄, 괴로움, 절망을 가져다준다니요?”

 

붓다의 설명이 도저히 귀어 들어오지 않은 그는 위안은커녕 화가 가득 난 채로 돌아갔다. 그는 길에서 만난 몇몇 노름꾼에게 방금 전 붓다에게 들은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노름꾼들이 동조하며 말했다.

 

“이보시오. 이 세상 모든 것이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는 작자들의 말은 듣지도 마시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기쁜 일을 다 버리게 하려는 뒤틀린 심보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겠소?”
“그렇소. 나도 동감이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소문은 오래지 않아 코살라 국의 왕궁까지 들어갔고, 이 이야기를 들은 빠세나디 왕이 말리까 왕비에게 핀잔을 주듯 말했다.

 

“왕비, 당신이 그토록 존경하는 고따마 붓다는 ‘귀엽고 사랑하는 사람은 슬픔과 비탄, 괴로움, 절망을 가져다준다.’고 가르친다고 들었소. 그건 무슨 까닭이오?”
“그래요? 까닭은 잘 모르겠지만, 만약 붓다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면, 틀림없이 그게 옳을 거예요. 여보!”

 

말리까 왕비의 대답을 들은 빠세나디 왕은 무작정 붓다를 편드는 왕비의 태도에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건 당신은 마냥 칭찬할 줄밖에 모르는 것이오? 어쩌다가 당신이 맹신자가 되어버린 거요?”

 

정나미가 떨어진 듯 왕이 핀잔을 주었다. 빠세나디 입장에서는 자신이 통치하는 코살라 국의 보호아래 있는 사끼야 족의 왕자출신 수행자에게 푹 빠진 왕비가 영 못마땅했다.
며칠 뒤 그들의 딸인 십대 소녀 와지리 공주가 친구들과 함께 왕궁 뒤 숲속으로 들꽃을 꺾으러 가고 싶다며 왕에게 허락을 구했다. 빠세나디 왕은 경호원을 불러 공주 일행을 호위하도록 명령한 후 외출을 허락했다. 이 장면은 말리까 왕비가 빠세나디 왕에게 질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여보, 공주에게 경호원을 딸려 보낸 것은 무슨 까닭이지요?”

 

빠세나디 왕은 당연한 것을 두고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왕비,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러면 보호할 사람도 없이 위험한 숲 속에 여자 아이들만 보낸단 말이오?”
“그러면 어때서요?”
“허어, 당신은 마치 그 애를 전혀 걱정하지 않는 사람처럼 말하는구려.” 왕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보, 만일 무슨 일이 생긴다면 슬픔과 비탄, 불행과 절망을 가져다줄 만큼 그 애가 사랑스러운가요?”
“물론이지!”

 

왕의 답변을 들은 왕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왕비의 미소를 보는 그 순간 빠세나디 왕은 자신의 우둔함을 깨닫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은 생각에 잠겨 오락가락 거닐다가 걸음을 멈추고 말리까 왕비에게 말했다.

 

“왕비여, 조만간 나와 함께 붓다를 찾아뵈어야겠소. 그리고 공양에 초대도 합시다.”

 

말리까 왕비는 기뻤다. 드디어 붓다를 친견하고 싶어 했던 소원이 이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빠세나디 왕은 태자 시절 간다라의 탁카실라로 유학을 다녀왔을 만큼 지혜롭고 명민했다. 빠세나디 왕은 그곳에서 릿차위 족의 왕자 마할리, 말라 족의 왕자 반둘라 등과 돈독한 친분을 쌓았고 전통학문은 물론 요나라고 불린 그리스 문물까지 두루 섭렵하며 국제적인 감각까지 지닌 실력자였다.
빠세나디는 왕이 된 이후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근절시키고 법질서를 바로 세우는데 힘썼으며, 곳곳에 역참을 설치해 자신의 명령이 신속하게 전달될 수 있는 체계를 세웠다. 군사와 행정을 정비하는 한편 마가다 국의 빔비사라 왕에게 억만장자 멘다까의 아들 다난자야를 코살라국의 사께따로 이주하도록 요청해 새로운 상업도시를 건설하는 등 자국의 부국강병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바라문 뽁카라사띠와 바라문 짱끼에게 봉토를 하사하는 등 기존 종교 지도자들과도 폭넓게 친분을 쌓고 있었으며, 니간타와 아지위까 등이 이끄는 신흥종교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는 열린 성정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이튿날 빠세나디 왕은 말리까 왕비와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기원정사(아나타삔디까)로 향했다. 말리까 왕비는 드디어 말로만 듣던 붓다를 직접 만나서 설법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빠세나디 왕은 하얀 코끼리에 황금으로 장식한 안장과 일산을 갖추고 위엄과 권위를 한껏 드러내며 기원정사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정작 기원정사에 도착했을 때, 붓다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은 생각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아무리 존경 받는 수행자라고 하지만 코살라국의 왕이 찾아왔는데 일어나 맞이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붓다는 나이도 빠세나디 왕과 또래였다. 빠세나디 왕으로서는 삶을 완전히 이해하기에 아직은 젊은 나이인 붓다가 완전한 지혜를 갖췄다는 것이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심기가 불편해진 빠세나디 왕은 머리를 숙이지 않은 채 육중한 몸을 땅에 던지듯 털퍼덕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고따마여, 당신은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성취한 분이라고 온 나라에 칭송이 자자하더군요. 고따마께서도 스스로를 삼마삼붓다(바르고 완전하게 깨달은 분)라고 인정하십니까?”

 

존경받는 수행자를 씨족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일종의 모욕이었다. 그러니까 빠세나디 왕이 붓다에게 ‘고따마’라고 칭한 것은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동이었다. 붓다는 그러나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나는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사실대로 말합니다.”

 

붓다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도 어떤 노여움도 없었다. 노련한 빠세나디 왕은 순간 웃음을 흘렸다.

 

“고따마여, 뿌라나깟사빠, 빠꾸다까짜나, 아지따께사깜발라, 막칼리고살라, 산자야벨랏티뿟따, 니간타나따뿟따 이 여섯 분도 온 세상이 칭송하는 훌륭한 스승들입니다. 제가 직접 그분들을 만나 지금처럼 물었을 때, 오랜 세월 수행한 그분들도 누구 하나 자신을 삼마삼붓다라고 말하진 않더군요. 고따마께서는 그들보다 나이도 어리고 수행자로 지낸 기간도 길지 않은데 어떻게 그렇게 자신합니까?”

 

도발적이며, 불경한 질문이었지만 붓다는 개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붓다의 얼굴에는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대왕이여, 이 세상에 아무리 작아도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 네 가지 있습니다. 왕자, 독사, 불씨, 수행자 이 네 가지는 아무리 작아도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순간 빠세나디 왕은 뻗었던 다리를 얼른 당겼다. 붓다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결코 가볍게 여기지 못할 당당함과 위엄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빠세나디 왕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자세하게 설명해줄 수 있겠습니까?”
“대왕이여, 임금의 아들은 아무리 어려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이가 어리고 권능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더라도 왕자를 예우하지 않고 핍박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가 왕이 되었을 때 크나큰 형벌로 보복할 것입니다. 대왕이여, 독사는 아무리 작아도 주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맹독을 지닌 독사는 한 뼘 길이의 새끼도 거대한 코끼리를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그런 뱀을 가벼이 여겨 함부로 만진다면 그는 목숨을 보장하기 힘들 것입니다. 대왕이여, 불씨는 아무리 작아도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톱만한 불씨라도 바람이 도우면 산과 들을 모조리 태웁니다. 그런 불씨를 가벼이 여긴다면 그에게는 재앙과 커다란 손실이 기다릴 뿐입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아무리 어려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청정한 계율을 갖추고 부지런히 지혜를 갈고 닦으면 그는 반드시 아라한이 됩니다. 번뇌의 뿌리를 모조리 뽑아버린 아라한은 공손한 예배를 받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왕권을 놓고 백여 명의 이복형제들과 살육을 벌이며 왕위에 오른 빠세나디였다. 그런 와중에서 그는 수없이 많은 살해의 위협을 겪어야만 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아버지의 신하들을 죽이고, 반역의 기미가 보이면 자신을 옹립한 권신들까지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의 위험과 두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앞뒤 말에서 빈틈을 찾아볼 수 없는 붓다에게 빠세나디 왕은 자신도 모르게 예를 갖추고 한쪽으로 비껴 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말리까 왕비의 기쁨은 한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붓다의 가르침은 모두 다른 사람들을 통해 전해들은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붓다의 가르침을 직접 들을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빠세나디 왕이 마음을 다잡고 다시 붓다에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에는 없던 공손함이 묻어 있었다. 

 

“고따마여, 저는 당신께서 귀엽고 사랑하는 사람은 슬픔과 비탄, 괴로움, 절망을 가져다준다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인간이 누릴 행복은 없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가정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수행자가 되게 한 이유입니까?”
“왕이시여, 귀엽고 사랑하는 사람이 슬픔과 비탄, 괴로움, 절망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이 괴로움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모든 만족이 영원하지 않으며 실체가 없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면, 그러한 만족은 결국 불만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만족의 본성을 깨달은 사람은 불만에 시달리지 않고 가정생활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과 가족으로부터 떠남으로써 나는 보다 높은 경지의 자유와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곧 계속되는 윤회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대자유, 해탈입니다.”
“스승이시여, 이제 저는 세존께서 설하시는 진리의 가치와 의미에 눈뜨게 해준 말리까 왕비에게 감사합니다. 몇 달 전 라자가하를 방문한 뒤 왕비는 깨달은 이,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 그리고 붓다의 상가에 대한 굳은 신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저도 당신의 재가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세존이시여, 부디 제자들과 함께 내일 저의 공양 초청을 받아주십시오.”

 

어느 순간 빠세나디 왕의 붓다에 대한 호칭이 ‘고타마여’에서 ‘스승이시여’로 바뀌어 있었다. 붓다는 최상의 예의로 공양초청을 청하는 빠세나디 왕에게 자애로운 미소를 전하는 것으로 허락하겠다는 뜻을 알렸다.
말리까 왕비에 이어 빠세나디 왕, 수닷따, 그리고 제따 왕자의 잇따른 개종과 함께 코살라 왕국은 붓다의 가르침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후에도 붓다가 사왓티에 머물 때면 빠세나디 왕은 늘 붓다를 찾아뵙고 예배와 공양을 올리는 제자로서의 예의를 다했다. 또한 또래의 나이인 붓다를 스승이자 좋은 벗으로 섬기며 남들에게 말 못할 속사정과 개인적 아픔까지도 털어놓았고, 때때로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기도 했다. 나아가 국왕의 도리를 묻거나 올바른 정치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그런 빠세나디 왕에게 붓다는 늘 국왕의 올바른 길에 대해 역설했다.

 

“대왕이여, 자비로운 마음으로 백성들을 외아들처럼 보살펴야 합니다. 그들을 핍박하거나 해쳐서는 안 됩니다. 그릇된 견해를 멀리하고 올바른 길을 걸으십시오. 교만하지 말고 남을 얕보지 마십시오. 간신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며, 왕이라 해도 법을 어기지 말아야 합니다. 대왕이여, 법답지 못한 것은 항복받으십시오. 단 열매를 따려면 반드시 좋은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심지 않고 열매를 딸 수 없는 것처럼 선행을 닦지 않으면 훗날 즐거움을 기대할 수 없으니 스스로 반성하고 악행을 삼가십시오. 자기가 지은 것은 반드시 자기가 거두어야 합니다. 과보는 세상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대왕이여, 권력만 믿고 세월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목숨이 있는 한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항상 바른 법을 닦아야 죽음이 다가왔을 때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변합니다. 더없이 나를 행복하게 하던 부귀와 권력도 돌아보면 그땐 아침이슬과 같은 것입니다.”

 

빠세나디 왕은 살라나무 숲에 작은 정사를 지어 붓다께 바쳤다. 그리고 왕비 말라까와 함께 교단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또한 빠세나디 왕은 자신의 충신 이시닷따와 뿌라나 형제도 부처님께 귀의하도록 권하는 등 삼보를 후원하고 불법을 홍포하는데 혼신의 힘을 바쳤다.
붓다 역시 빠세나디 왕의 귀의 이후 많은 시간을 사왓티의 기원정사에서 보냈다. 사실상 사왓티는 붓다의 상시 거처역할을 담당했다. 빠세나디 왕의 귀의에 이어 사왓티에 사는 위사카라는 부인이 개종을 하게 되었고, 그녀가 동쪽에 승원(동원정사)을 지어 상가에 제공함으로써, 코살라 왕국은 명실상부하게 붓다와 상가의 근거지가 되었다.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뒤 4년째 되던 해의 여름, 붓다는 새벽 명상에 들어 천안으로 세상을 살피고 있었다. 붓다는 얼마 전 다녀온 고향 까삘라왓투의 사정이 궁금해 그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까삘라왓투에는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다. 로히니 강을 사이에 둔 사끼야 족과 꼴리야 족들 사이에도 가뭄으로 인한 갈등이 증폭되고 있었다. 농부들은 한 바가지의 물이라도 더 대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물을 퍼다 날랐지만 바닥이 드러난 로히니의 강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논바닥은 바둑판처럼 갈라지고 태양의 열기를 견디지 못해 모가 누렇게 탔다. 두 부족의 농부들의 마음도 타들어가기는 마찬가지였다. 불만은 꼴리야 족 쪽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친구들, 얼마 되지도 않는 강물을 양쪽에서 사용하면 그쪽이나 이쪽이나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되고 말 것이오. 그쪽이야 어차피 한 뼘 남짓한 모이지만, 일찌감치 파종한 우린 한 번만 물을 흠뻑 대면 제대로 수확할 수 있소. 그러니 우리가 먼저 물을 댑시다.”

 

그러나 속이 타들어가기는 사끼야 족도 마찬가지였다.

 

“거 무슨 섭섭한 말씀이신가. 그럼 당신들 곳간이 그득해질 때 우린 금은보화를 싸들고 당신들에게 양식이나 구걸하러 다니란 말이요. 늦게 파종했다고 물을 쓰지 말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이러다가는 둘 다 죽게 되었으니 하는 말 아니오. 당신들이야 어차피 망친 농사, 우리에게 양보하라는 게 뭐 그리 잘못되었단 말이오.”
“어차피 망친 농사라고? 그럼, 우리가 강물을 모두 써도 농사를 망칠 것 같은가? 양보를 하려면 그쪽에서 하시오.”

 

삿대질과 함께 언성을 높이던 농부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주먹다짐까지 하게 되었다. 타들어가는 가슴에 분풀이할 곳을 찾던 주변의 농부들이 싸움에 뛰어들었다. 소란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싸움은 점점 격렬해졌다. 피투성이가 되고 나서야 농부들은 양쪽 언덕으로 갈라서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온갖 험담이 오갔고 더 이상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양쪽의 앙금이 커져갔다.
두 종족 간의 오랜 결속과 우의는 타들어가는 논바닥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끼야 족과 꼴리야 족은 같은 옥까까 왕의 후손으로서 친족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자부심 강한 두 종족은 내심 서로를 문둥이와 개돼지로 부르며 깔보고 있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분노와 조롱이 뒤섞인 험악한 말들로 서로를 할퀴던 두 종족은 함성을 지르며 되돌아섰다. 꼴리야 족이 내뱉은 말은 곧 사끼야 족 땅에 퍼지고, 사끼야 족이 내뱉은 말은 곧 꼴리야 족 땅에 퍼졌다. 결국 이 다툼은 사끼야와 꼴리야의 왕족과 젊은이들까지 분노에 물들게 했다. 서로에게 본때를 보여주자고 결의한 이들은 급기야 전쟁 직전까지 험악하게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코끼리부대와 기마부대, 칼과 창으로 무장한 용감한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까삘라왓투의 성문을 나섰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붓다는 생각했다.
‘내가 가지 않으면 나의 친가와 외가 두 부족은 공멸하고 말 것이다. 그들을 화해시키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다.’
혼자서 조용히 처소를 나선 붓다는 공중으로 몸을 날려 한 순간에 까삘라왓투의 로히니 강으로 몸을 옮겼다. 작은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 언덕에는 술에 취한 코끼리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재갈을 물린 말들이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앞발을 쳐드는 그 순간, 붓다는 로히니 강 한 가운데 공중에서 결가부좌를 한 모습을 나타냈다.  
붓다의 돌연한 출현에 놀란 두 종족은 순간 모든 동작을 멈췄다. 팽팽히 시위를 당겼던 양쪽의 궁수들이 활을 내려놓고 길 위에 엎드리기 시작했다. 대지에 휘몰아치던 함성과 먼지가 한순간 가라앉았다. 붓다 주위에는 강물보다 더 짙은 푸른빛이 휘돌고 있었다. 붓다를 발견한 양 종족의 왕족들도 약속이나 한 듯 칼과 창을 내려놓았다. 진영의 한 가운데 자리한 붓다는 발아래 예배하는 양쪽의 왕족들에게 조용히 물었다.

 

“왕족들이여, 친족 간에 왜 싸우려는 것인가?”
“저들이 우리를 개돼지라고 모욕했습니다.”
“대추나무에 둥지를 튼 문둥이라고 한 것은 당신들이요.”

 

높아지는 언성을 가로막으며 붓다께서 다시 물었다.

 

“어떤 이유로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인가?”

 

한 사람씩 돌아가며 왕족들에게 물었으나 누구도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붓다는 장군들을 불러 그 연유를 물었으나 그들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물어물어 가던 붓다는 싸움의 발단이 된 논에서 물을 대던 농부들에게서 이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붓다는 위엄이 가득한 목소리로 왕족들에게 물었다.

 

“이 강물과 사람 중에 어느 쪽이 더 소중한가?”
“물보다 사람이 더 소중합니다.”
“그런데도 물을 위해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버리겠단 말인가? 말라버린 로히니 강바닥을 피로 물들이겠다는 말인가?” 

 

사끼야와 꼴리야 왕족들은 머리를 숙였다. 붓다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사람들을 가까이 불러 모았다. 칼과 창을 던지고 모여든 군사들에게 붓다가 말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 종려나무 숲에 한 그루 도토리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 아래 살던 토끼 한 마리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면 어쩌지.’ 바로 그때 도토리 하나가 종려나무 잎사귀에 털썩 소리를 내며 떨어졌답니다. 겁 많은 토끼는 깜짝 놀라 ‘큰일 났다. 하늘이 무너진다!’라고 외치며 달렸답니다. 옆에 있던 토끼가 이 말을 듣고 함께 달리기 시작했고, 두 마리 토끼는 곧 세, 네 마리로 점점 늘어나더니, 마침내 수천 마리 토끼가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토끼들의 소란에 온 숲은 벌집을 건드린 듯 들썩거렸습니다. ‘다들 왜 저러지? 무슨 일인가?’ ‘큰일 났어. 하늘이 무너졌대.’ 이 말을 들은 노루도 멧돼지도, 물소도 코끼리도 모두 두려움에 떨며 덩달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높은 언덕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자는 생각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졌다고? 그럴 리가 없지.’ 그들이 달리는 길목에는 벼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다들 죽을 게 뻔했습니다. 숲의 동물들을 가엾게 여긴 사자는 쏜 살같이 행렬 앞으로 달려가 큰 소리로 포효하였습니다. 사자의 기세에 놀란 동물들이 멈춰 서자 사자가 물었습니다. ‘왜 도망가는가?’ 그러자 동물들이 대답했습니다. ‘큰 일 났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누가 그것을 보았는가?’ 코끼리, 물소, 멧돼지, 노루 누구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까닭을 추궁하던 사자는 그 말이 겁쟁이 토끼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사자가 토끼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보았느냐?’ ‘네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사자는 숲 속 동물들과 함께 두려움에 떠는 토끼를 앞세워 하늘이 무너지는 걸 봤다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 자리에는 굵은 도토리 한 알만 뒹굴 뿐 무너진 하늘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사자는 도토리를 주워 토끼에게 보였답니다. ‘이것이 네가 보았다는 하늘인가?’”

 

붓다의 이야기를 듣던 사끼야 족과 꼴리야 족 군사들은 머쓱한 표정을 지은 채 깔깔대며 웃었다. 그러자 붓다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친족들은 서로 화해해야 합니다. 친족이 화목하면 어떤 적들의 침략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저 히말라야의 숲을 보십시오. 거센 태풍이 불어도 저 숲은 온전합니다. 수많은 나무와 잡초, 덤불과 바위가 서로 뒤엉켜 의지한 저 숲은 무엇 하나 다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넓은 들판에 홀로 선 나무를 보십시오. 굵은 가지와 무성한 잎을 자랑하지만 태풍이 휩쓸고 가면 뿌리째 뽑힙니다. 감정이 없는 풀과 나무도 함께 어울려야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아는데,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두 부족의 여러분에게 말하겠습니다. 부디 싸우지 말고 한마음이 되십시오. 하나가 되어 화목할 때 여러분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서로 미워하면 결국 파괴와 상처만 남습니다. 이제 다 같이 평화를 배워야 합니다. 평화는 모든 성자들이 찬탄하는 것입니다.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부족만이 번영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합장하고 귀 기울이는 두 부족들에게 붓다는 거듭 화목과 평화를 당부했다. 사끼야 족과 꼴리야 족 사람들은 곧 칼과 창을 던지고 붓다에게 머리를 조아려 예배했다. 바닥난 로히니 강에 다시 깊고 푸른 신뢰와 관용의 강이 흐르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달았던 두 종족 간의 분쟁은 모두에게 부끄러운 과거로 기억되었다. 붓다는 두 종족에게 당부의 말을 끝낸 후 게송을 읊었다.

 

아, 우리 행복하게 살아가세!
원한 많은 사람들 속에서 원한 없이
미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미움 없이
우리 진정 행복하게 살아가세.

 

아, 우리 행복하게 살아가세!
병든 사람들 속에서 건강하게
아파하는 사람들 속에서 아픔 없이
우리 진정 행복하게 살아가세.

 

아, 우리 행복하게 살아가세!
쾌락을 좇는 사람들 속에서 쾌락을 좇지 말고
갈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갈망 없이
우리 진정 행복하게 살아가세. 

 

원한과 증오를 털어버린 두 종족의 사람들은, 출가하지 않았으면 분명 전륜성왕이 되셨을 붓다의 덕을 찬탄하며 보은의 의미로 각각 이백오십 명의 젊은이들을 선발해 붓다를 보살피도록 했다. 그러나 붓다는 이 오백 명의 젊은이들을 출가시켜 제자로 받아들였다. 붓다는 새로이 탄생한 5백여 사끼야와 꼴리야 족 출신 비구들과 함께 세간의 왕이 아닌 진리의 왕으로서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까삘라왓투의 거리를 누볐다. 5백 명의 비구가 새롭게 탄생한 것은 곧 5백 명의 여인들이 졸지에 남편을 잃고 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