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날, 내 시간’은 언제인가?

 

 

 

 

불일암에서 법정 스님을 오랫동안 시봉한 덕조 스님 말씀이다. 법정 스님은 비바람 치는 날을 유독 좋아하셨다고 한다.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기면 비로소 스님은 독서도 하고 음악도 마음대로 들으셨다고 한다. 독서 카드를 만들어 책을 정독하는 독서광이신 데다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으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의 스님 에피소드 중에 하나다.

 

덕조 스님은 큰절에 있으면서 불일암에 계신 스님을 시봉했다. 한 번은 시봉하러 큰절에서 불일암 가는 오솔길을 올랐다. 통통한 오소리가 배를 밀고 다니면서 희미한 길을 냈다고 해서 스님들은 오솔길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오솔길은 오소리에게 감사해야 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한 번은 비바람 소리가 거친 불일암에서 베토벤의 <운명>이 쾅쾅 울려 퍼졌다. 덕조 스님이 놀라 단숨에 불일암 마당으로 올라오자 스님께서도 민망하셨던지 오디오 볼륨을 급히 줄였다. 그때까지도 덕조 스님은 스님의 서재를 들어간 적이 없었으므로 그곳에 오디오가 있는지 없는지 몰랐던 것이다.

 

스님께서 비 오는 날을 좋아하시게 된 이유는 불일암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그만큼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스님께 무례하게 구는 방문객들에게는 덧정이 떨어질 만큼 불친절했다고 한다.
“법정 스님 계십니까?”
“방금 내려간 사람이 법정이오.”
그 사람이 산길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또 물었다.
“산 밑에서 물으니 불일암에 계신다고 알려주던데요.”
“방금 왔다가 또 내려갔어요.”
덕조 스님이 “스님, 너무한 거 아닙니까?” 하고 물으면 스님께서는 “두 번 다시 불일암에 올라오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셨단다. 그러나 인생의 고민을 상담하고자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손수 밥도 지어 주고 차도 우려 주며 상대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고 한다. 나도 그중에 한 사람일 터이다. 하룻밤을 아래채에서 재워주고 다음 날 아침에 무염(無染)이란 법명까지 주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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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있다는 것은 그 끝이 있게 마련,
태풍도 불다가 잦아질 때가 있으리라.
그렇다. 이런 날이야말로 순수한 ‘내 날’이 될 수 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순수한 내가 존재할 수 있다.
불쑥불쑥 찾아드는 불청객도 이런 날은 어쩔 수 없으리라.
전기도 나갔다. 밖에서는 여전히 거센 비바람. 자, 뭘 하지?
그렇다. 소설이나 읽자. 이런 날은 소설이나 읽어야지
엄숙한 일은 격에도 맞지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
다락에 올라가 손에 잡히는 책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
마침 잘 되었다. 굵직굵직한 카잔차키스의 선을 나는 좋아한다.
예전에 읽은 책이지만 오늘 기연이다 싶어 다시 펼친다.
창가에 등의자를 놓고 비스듬히 누워서 읽자.
소설을 누가 뻣뻣이 앉아 읽는단 말인가.

 

책장을 펼치자 거기에서도 비바람이 불고 있었다.
크레타섬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항구에 나가 있을 때,
북아프리카에서 남유럽으로 부는 세찬 비바람이 유리문을 닫았는데도
파도의 포말을 카페 안에 가득히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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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도로 동백꽃을 보러 갔다가 현정이네 집에 들렀다.
거실에 있는 오디오를 볼 때마다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 오디오는 현정이 아버지가 불일암에 설치해 준 것인데,
한 일 년쯤 듣다가 예의 그 ‘변덕’이 일어나 되돌려준 것이다.
나는 이 오디오 말고도 산에 살면서 두 차례나 치워 없앴다.
음악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 더미가, 소유의 더미가 싫어서였다.
치워버릴 때는 애써 모았던 음반까지도 깡그리 없애버린다.
한동안 음악을 듣지 않으면 내 감성에 물기가 없고 녹이 슨다.
이때부터 하나 또 들여놔 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되면 밖에 나가 알아본다.
면적을 작게 차지하는, 산방의 분수에 맞는 것으로 고른다.
내 손수 사들인 것은 선뜻 남에게 주어버릴 수 있다.

 

이제 내 귀는 대숲을 스쳐오는 바람 소리 속에서
맑게 흐르는 산골의 시냇물에서, 혹은 숲에서 우짖는 새소리에서
비발디나 바흐의 가락보다 더 그윽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86년 가을이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선생과 영화배우 윤정희 씨가 불일암을 방문했다. 부부인 두 사람은 스님께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불일암을 들렀던 것이다. 실제로 스님께서는 바흐나 베토벤 음악이 그리워지면 클래식 음악만 들려주는 예전 도청 앞의 ‘베토벤음악감상실’을 찾곤 하셨는데, 그런 인연으로 베토벤음악감상실 여주인은 스님의 신도가 되었다.
그런데 스님은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에게 음악보다는 과일 얘기만 하셨다고 내게 전해주면서 웃으셨다. 스님은 한때 사과만 먹으면 목구멍이 간지러워지는 탓에 꺼리셨다. 따라서 스님은 나주 배 중에서도 껍질이 오돌토돌한 이마무라를 좋아하셨다.
그런데 스님의 과일 식성이 바뀌었다. 어느 해 겨울부터 배보다 사과를 더 가까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화제 삼아 얘기했더니 백건우 씨도 사과 알레르기가 있다고 고백해 서로 동병상련의 친근한 정을 느끼셨다고 스님께서 말씀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스님의 순수한 ‘내 날’이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라면, 나의 ‘내 시간’은 먼동이 트기 전의 꼭두새벽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우리 모두에게도 오롯한 ‘내 날, 내 시간’이 있을 것 같다. 당신의 ‘내 날, 내 시간’은 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