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간산책 14

 

 

 

8순의 노시인이 시집을 한 권 보내주셨다. 이 시집이 내게는 등단 10년 동안 시집 한 권 못낸 ‘시집 한 권 없는 게으른 시인’에 대한 경책으로 다가와 섬뜩했다. 박준영 단시집 <하루는 쿠키와 아메리카노다>(시와 세계 펴냄)을 펼쳐드는 순간, 나는 8순의 노시인으로부터 나오는 어린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읽는다. 그 재잘거림을 읽어가면서 나는 이내 청천벽력 같은 조주의 ‘할’에 몸서리친다. ‘아, 이런 것이구나! 익고 무르익어 마침내 그 본질의 모습으로, 즉 천진으로의 회귀라는 것이란!’ 88편에 이르는 단시 속에는 온통 선적(禪的) 에스프리가 작렬한다. 불교적 사유와 세상을 관조하는 경험, 노련함이 어우러져 빚어낸 어휘들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시집의 제목이 된 시구가 담긴 이 시는 조주의 ‘평상심시도’를 일상의 언어로 멋들어지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는’ 선승의 일상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당송의 선시가 마치 동시의 옷을 입고 화현하는 듯하지 않은가. 시집을 해설한 송준영 시인은 이 시에 대해 <벽암록>을 쓴 원오극근 선사처럼 이렇게 착어(著語)를 붙였다. 아마도 송시인 역시 박준영 단시를 현대적 선시로 읽어낸 까닭이리라.

 

 

 

송시인은 착어에 이어 멋들어진 다음과 같은 ‘비(批)’를 붙이는 것으로 시에 대한 감상을 대신했다.

 

“비야 오너라 내일 살 아이스크림 녹는다”

 

내가 박준영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불자 방송인으로서였다. 박시인은 TBC 영화부장, KBS TV 본부장, 대구방송 사장, SBS 전무, 국악방송 사장 등 방송계 50년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 사이에 방송위원회 상임위원, 방송영상산업진흥원장 등을 역임했으니, 방송계에서 그가 이뤄놓은 족적은 화려하기 짝이 없다. 취재차 만나기도 했고, 인사동 어느 식당에서 식사와 반주를 곁들이며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새롭다. 새카만 후배에게도 늘 조심스럽고 잔잔하게 말씀을 해주셨던 모습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박시인은 방송인으로서의 바쁜 삶속에서도 그의 몸과 마음속에 영혼의 고갱이처럼, 또 낭중지추처럼 끈질기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 본능처럼 솟구치는 시심(詩心)이었다. 방송 일을 하면서 그는 그 유명한 만화극 ‘개구리 왕눈이’, ‘코난’ 등 무려 38편의 만화영화의 주제가를 직접 작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그의 타고난 생이지지의 시심은 결국 그로 하여금 이순을 맞던 해에 <한국문학>에 김규동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을 하게 되는 전기를 맞았다.
늦깎이 시인은 등단 후 부지런히 시를 썼다. 등단 후 그가 발표한 시집은 <도장포엔 사랑이 보인다>를 비롯해 이번에 발표한 단시집까지 6편을 훌쩍 넘어섰다. 그 열정이 놀라울 뿐이다. 이번에 낸 단시집은 선어처럼 군더더기를 모두 걷어낸, 그리하여 체로금풍의 별미를 드러낸 언어의 고갱이들이다. 박시인은 이 단시를 쓰면서 이런 고민을 했다고 털어놓는다.

 

 

 

이 단시집에 실린 88편의 시 가운데, 한동안 나의 시선을 멈추게 한 시는 ‘인생’이라는 시다. 인생이란 것이 따지고 보면 대하드라마와 같이 구구절절 장황한 것인데, 박시인은 단 네 개의 기호로 인생을 압축해 표현한다. 그러나 그 네 자가 주는 여백은 우주같은 것이어서 무한한 상상과 철학과 여운을 화수분처럼 제공한다.

 

 

 

느낌표, 쉼표, 물음표, 마침표로 구성된 인생이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이 주는 은유의 폭은 헤아리기 어렵다. 단시의 절창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박준영 시인의 법명 향산(香山)처럼, 시를 읽는 내내 청아한 향기 나의 글방에 그윽하다. 1만 원.

 

*추신: 이 시집을 읽고 싶은 분은 우편번호 포함 주소를 시인의 모바일폰에 문자 또는 카톡으로 보내주세요. 010-9447-0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