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낭비한 죄
일러스트 정윤경
마중물 생각
눈이 난분분 난분분 내리는 날 오후.
다제(茶弟) 선생이 군것질 한 봉지 사들고 내 산방을 들렀다가고 난 뒤다. 영화 <기생충>을 유선 올레 TV에서 1950원 주고 아내와 함께 본다. 유선 올레 텔레비전에서 제공하는 프로에 돈을 지불하고 영화를 보기는 처음이다.
생존을 위해 기생충 같은 가족이 될 수밖에 없는 슬픈 이야기이다. 그들은 반지하 냄새를 달고 산다. 악취는 냄새이지 향기가 아니다. 반지하 냄새는 지상의 사람들이 경계하는 신분표시가 되고 만다. 인간 상호간에 공생과 상생 없이 숙주 같은 인간과 기생충 같은 인간이 존재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라는 것을 봉준호 감독은 고발하고 있는 듯하다. 상상 이상의 세계를 상상한 것이 기생충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닌가 싶다. 숙주 같은 가족이 캠핑을 떠나고 천둥번개가 치는 설정은 이야기 전개를 위한 장치라고 미리 읽혀지기도 했지만. 아무튼 상상력과 독창성이란 동의어가 아닐까 싶다. 반지하 기생충 가족의 끈끈한 가족애도 영화전개의 필연성을 살렸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의 상상력이 나이와 비례해서 빈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 정신이 번쩍 든다. 상상력의 중요성을 환기시켜준 봉준호 감독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법정스님께서 보셨으면 어땠을까? 스님은 불일암에서 서울로 올라오시기 전에 나에게 전화를 하시어 볼 만한 영화를 찾아보도록 주문을 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신문 영화 소개란을 보면서 영화가 무슨 무슨 상을 수상했는지를 기준 삼아 스님께 말씀드렸다. 한번은 외국영화 조조 프로를 보는데 영화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장면이 시종 어둡고 칙칙했다. 스님은 영화관 밖을 나오시면서 실망스러웠던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지중해 같은 에메랄드 빛깔에 시원한 풍경을 기대하셨던 스님께 몹시 미안했던 기억이 새롭다. 산중 사람은 탁 트인 바다를 좋아하고 바닷가 사람은 울타리처럼 감싸는 산중을 선호하는 법인 것이다.
스님의 말씀과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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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영화 <빠삐용>을 다시 보았다.
16년 만에 다시 본 영화인데 새로웠다.
그 전에는 그런 대사가 있는 줄을 기억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보고 새로운 감동을 받았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흉악범들을 사회로부터 멀리 격리시키기 위해 외딴 섬에 수용한다.
빠삐용과 그의 동료들은 기회만 있으면 탈출하여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다시 붙잡혀
혹독한 고문과 견디기 어려운 벌을 받는다.
빠삐용은 독방에 갇혀 먹지 못해 기진맥진 사경을 헤매던 순간이었다.
비몽사몽간에 한 줄로 늘어선 배심원과 재판관 앞에 나아간
빠삐용은 자기는 결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억울함을 호소한다.
이때 재판관이 빠삐용을 향해 판결을 내린다.
“너는 인생을 낭비한 죄로 그 죄값을 치러야 한다.”
인생을 낭비한 죄! 무서운 말이다.
우리는 이 핑계 자 핑계로 인생을 얼마나 많이 낭비해왔는가.
갈무리 생각
길상사 행지실에 가면 법정스님 유물을 관람할 수 있다. 스님의 손때가 묻은 것들만 엄선해서 전시하고 있다. 유물 중에는 소품인 ‘빠삐용 의자’ 그림도 있다. 미국에 사는 내 조카 김미리가 12살 때 그린 그림이다. 얼마나 정성을 들여 그렸는지 고사리 같은 손가락에 습진이 생겼다고 한다. 그 그림을 나에게 보내왔는데, 나는 스님께 선물하고 조카에게 또 그려달라고 부탁하여 두 번째 그림은 지금 내 산방에 있다. 스님께서 영화 <빠삐용>을 보시고 그 감동의 힘으로 불일암 뒷산의 굴참나무를 베어 만드셨던 의자가 바로 ‘빠삐용 의자’이다. 한국계 미국인인 내 조카는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을 졸업한 뒤 현재는 그림만 그리고 있는 전업화가이다.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 하나만 더 하겠다. 스님과 함께 본 영화 중에 잊히지 않는 영화가 있다. <서편제>를 종로 단성사에서 조조 프로로 보았는데, 스님께서는 영화가 시작된 지 5분부터 끝날 때까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셨다. 영화 속의 오정해를 명창으로 키우기 위해 눈을 멀게 하는 장면에서부터였다. 나는 영화관을 나와 스님께 물었다,
“스님, 슬프세요? 눈물을 너무 흘리십니다.”
“무염거사,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스님은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 멋쩍게 웃으셨다. 아마도 속가에 두고 온 여동생이 생각나 그러셨거니 하고 나는 짐작할 뿐이었다. 실제로 스님께서는 속가에 동복 여동생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아무 잡지나 신문에 원고를 쓰시지 않았다. 그런데 원고청탁을 거절하시지 못한 곳이 딱 한 군데 있었다. 여성단체 기관지나 <여성신문>이었다. 살뜰하게 대해주지 못했던 속가 어머니와 여동생이 생각나시어 차마 잡아떼지 못하셨다. 그렇게라도 해야 미안함이 덜어져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말씀을 내게 하셨던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