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원찰답게 많은 기도 영험담을 갖고 있는 수국사, 그 이름을 누가 붙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국사찰답게 정인지, 최항, 서거정, 노사신 등 당대의 명망가들이 시를 부쳤고 여느 사찰들처럼 대선사 누구누구가 창건했다는 또는 누구누구가 수행했다는 요식의 허명을 갖고 있지 않는 철저한 세간 속의 절. 그러나 나라의 안위를 자신들의 안위로 알고 살아갔던 많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이 모여서 붙어진 이름, 그래서 수국이라는 절은 수국이라는 꽃의 이름보다도 오히려 아름답다.

 

 수국사하면 흔히들 수국사(水菊寺)라고 생각하기 쉽다 수국이 가득한 절, 그래서 아름다운 절이라고 생각했다가 정작 수국(水國)이라는 진짜 이름을 알게 되면 적잖이 실망하게 된다. 수국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관변적인 의미 때문이다.
연신내역에서 내려 수국사로 가는 길.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 314번지-. 요즈음 도심 근교의 절이 그러하듯 약수를 받는 사람들이 대낮인데도 우글거리고 있었다. 새로 건립한 웅장한 대웅전 밑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제 몸뚱어리를 늘어뜨린 채 무심하게 오가는 행인들을 지켜보고 있다.
무수한 아파트들과 북한산을 굽어보고 있는 대웅전 사이를 서성거리면서 세간과 출세간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인가? 엄청나게 늘어난 서울이라는 도심 속의 이곳은 과연 어디인가? 수국사, 이름 그대로 하자면 '나라를 지키는 절'이라는 뜻이 된다. 

 

 

 '나라'의 진정한 의미, 그것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 그러나 누구도 그 명백한 해답을 줄 수는 없다. 시대와 개인의 상황에 따라 그 해석 방법은 각기 다른 것이다. 서로의 가슴속에 담고 있는 민족이라는 의미와 겨레라는 의미가 다르듯, 나라 또한 어떤 일정한 규범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간직하듯 그렇게 우리들 심성 속에 나름대로 간직되어 있는 한낱 무지개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모든 허상을 버리고 바람이 되라고 하는 부처님의 말씀, 모든 눈에 보이는 산맥을 넘어 구름이 되라고 하는 부처님의 말씀, 그렇다면 부처님을 따르는 불도들에게, 나라는, 민족은, 겨레는 한갓 부질없는 잔 파고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국사라는 절은?
 이조의 모든 왕실사찰들이 그러하듯 수국사 또한 왕실의 안녕을 위해 만든 절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숭앙하는 수도자들의 도량이 아니라 단지 왕실의 권위와 이기적인 기복을 위해 백성들을 수탈해서 얻은 더러운 재물의 총체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왕실 사찰들을 그렇게 난도질해버린다면 우리의 불교는, 우리의 문화는 갈 곳이 없어진다. 갖은 역사의 물굽이 속에 살아남은 사찰들의 이름이 초라해진다. 우리가 우리의 몸뚱이를 빌려 한발 한발 성불의 길로 다가가듯 이 진흙 먼지투성이의 외양을 빌려 우선 부처님 도량을 만드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철학 부재의 척박한 조선 풍토에서 불교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먼지들과의 화합'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국불교사에서 조선은 불교의 쇠퇴기였다고 평자는 논한다. 물론 조선시대의 불교는 유교의 명교 인습에 의해 억압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조선의 불행했던(?) 제왕들은 밖으로는 억불숭유의 태조정책을 표방하면서도 안으로는 불전을 간행하며 내불당을 설치하는 등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운명적으로 권력이라는 허망한 굴레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왕들에게 불교는, 부처님은 최상의 도피처였을 것이다. 똑같은 인간이면서도 인간이기를 거부해야 했던 가여운 왕들은 차치하고라도 그에 딸린 여러 궁중 여인들의 애절한 심사가 많은 왕실 사찰들을 만든 원동력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조선의 불교가 국가의 통치 목표에 의한 수난을 겪었지만 종교의 기능이 부정된 사실은 없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수국사, 봉은사, 봉국사, 경국사, 봉원사, 봉선사, 흥국사 등 현재 남아 있는 옛 사찰들의 명칭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절의 창건연기도 모두 국가의 현세적 안녕과 왕실의 추선을 위해 세워진 것이다.
 수도 서울의 서북쪽 경계에 자리 잡은 수국사의 창건 역시 왕실의 원찰로 출발한다. 수국사의 창건연기를 알기 위해서는 당연히 서오릉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한다.

 

 

 

 서울의 초등학생이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가장 소풍을 많이 간 곳이 서오릉일 것이다. 조금 번거롭기는 해도 서오릉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는 것도 제법 재미있는 일이 될 수 있다.
서오릉은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용두리에 있는 5개의 왕릉을 가리킨다. 사적 제198호인 서오릉이 능지로 선택된 계기는 1457년(세조 3년) 세자였던 원자 장(璋, 뒤에 덕종으로 추존됨)이 사망하자 그 당시에 유행했던 풍수지리설에 따라 능지로서 좋은 자리를 찾다가 이곳이 추천되어, 부왕인 세조가 답사한 뒤 경릉(敬陵) 터로 정한 것에서 비롯된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대대로 회자되는 이 말은 너무도 정확하게 우리의 가슴을 친다. 어미가 새끼를 사랑함은 일국의 제왕과 범인들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 뒤 1460년(성종 1년)에 덕종의 아우인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 씨의 창릉(昌陵)이 들어섰고, 1681년(숙종 7년)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김 씨의 익릉(翼陵)과 1721년(경종 1년)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 씨의 쌍릉(雙陵)과 제2계비 인원왕후 김 씨의 단릉(單陵)의 합칭인 명릉(明陵)과, 1757년(영조 33년) 영조의 비인 정성왕후 서 씨의 단릉인 홍릉(弘陵)이 들어서면서 큰 왕족의 능이 무리를 이루어 '서오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수국사의 원래 이름은 정인사(正因寺)였다.
불법무도(不法無道)를 수없이 저질렀던 세조도 역시 한 가정의 아버지였다. 형제 권속을 무자비하게 처단했던 그였지만 어린 나이로 죽은 세자 덕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왕명으로 이 절을 창건하였다.
 세조는 1457년 8월 덕종이 죽자 이듬해 백성에게 부담을 주지 말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검소하게 절을 지어 덕종의 넋을 위로할 것을 명하였는데, 착공 1년 만에 완공하였다.
 정권을 잡기 위해 그야말로 물불 가리지 않고 살아온 시간이 흐른 후, 불도를 접하게 된 세조의 마음속에는 뼈저린 회한이 몰아쳤던 것이다. 게다가 사랑하는 아들을 잃게 된 그의 마음은 급격하게 불교로 기울었다. 그 세조의 참회의 마음이 오늘의 수국사를 우리가 갖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 뒤 성종 2년 봄, 인수대비가 이 절을 창건할 때 급히 지어서 재목이 좋지 못하고 쓰임새가 정밀하지 못함을 지적하고 판내시부 이효지에게 중창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궁중에서 절약한 물품을 쌀과 베로 계산하여 내수사에 주어서 경비에 보태어 쓰도록 하였다. 이때 대왕대비도 협력하여 1471년 2월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백성을 부역시키지 말고 노역에 대한 삯을 주도록 명령하였다. 그때 서울 근역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사람들이 다투어서 이 공사에 참여하였다. 그해 10월 절이 완공되었는데 총 119칸이었다. 이 절의 설계는 화엄종의 고승 설준(雪峻)이 맡았는데 법당에서부터 방앗간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어긋남 없이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단청의 아름다움 또한 빼어나 그 아름다움이 봉선사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절은 불탔고, 남은 건물마저 퇴락하였다가 광무 4년 그러니까 1900년에 월초거연(月初巨淵, 1858~1934) 화상에 의해 중창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서울 동대문 밖 원흥사 자리에 명진학교를 세워 청년교육에 주력하기도 했던 월초 스님은 근대 한국불교의 커다란 봉우리를 이루는 선각자였다. 당시 고양군 신도면에는 스님의 선산이 있었는데 매년 선산에 성묘를 다니던 월초 스님은 퇴락한 수국사 터를 보고 "아! 이 절이 오늘날까지 존속하였다면 설법과 염불의 음성으로 얼마나 좋은 인연을 맺었을까?"하며 늘 가슴 아프게 여기곤 하였다는 것이다.
 1898년 8월, 그날도 월초 스님이 고양군 신도면 진관사에 들러서 각 단에 마지를 올리다가 한편 구석에 봉안되어 있는 아미타불상에 한 벌의 불기(佛器)도 없는 것을 보고 주무자에 게 그 이유를 물은 즉 "그 부처님은 수국사가 폐사된 후 비바람을 면치 못하므로 우리 절이 가까운 데 있다 하여 이안(移安) 하였으나 아직까지 일향일다(一香一茶)로 공양한 일이 없다."고 답변, 월초 스님의 수국사 중창원심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그때 마침 훗날 순종(純宗)이 된 태자가 병약한 탓으로 깊은 병을 앓고 있었는데 백약을 써도 낫지 않았다. 이에 고종은 나라 안 고승의 법력을 빌리기 위해 왕실과 인연을 맺고 있던 월초 스님께 백일기도를 부탁하였다.
 기도를 맡은 스님은 백일기도를 정성껏 드렸는데 기도를 시작한 80여 일 만에 태자의 꿈에 한 노스님이 나타나 "어디가 그리 아프신가?"하면서 정수리에 금침을 한번 놓는 사이에 깜짝 놀라 깬 태자는 온몸이 가벼워지고 아픈 몸이 씻은 듯이 나았다. 태자의 병이 완쾌되자 기뻐한 왕실에서는 월초 스님의 소원을 물었다. 몇 번을 거절하던 월초 스님의 머리엔 퇴락한 수국사의 처연한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스님은 결국 왕실의 성의를 받아들여 서오릉 옆에 있는 수국사가 퇴락하여 조석의 향화가 끊어진 것이 안타깝다고 중창을 소원했다. 그 소원을 들은 왕은 '효심신심원무이(孝心信心元無二)'라 치하하여 직접 화주책을 들고 왕실과 여러 신하에게 권선하여 어용목수들을 시켜 오늘의 수국사를 중창하였다. 

 

 

 애국이라는 말의 의미가 참으로 이성적으로만 쓰여 질 수만 있다면 그보다 기꺼운 단어가 어디 있을까? 함께 태어나고 함께 죽어가야 할 자신들의 터전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 자신들의 새끼들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이들의 새끼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일보다 빛나는 죽음이 어디 있을까? 약간 빗나간 언설이 될지는 모르지만…….
 오늘의 수국의 의미는 목숨을 내놓는 일은 아니다. 수국사 또한 나라를 지키는 의미의 이름이 아니다. 진정한 수국의 뜻은 자신을 버리는 일이다. 자신의 사소한 이기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참다운 수국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자신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많을 때 그 나라는 온전히 지켜지지 않는다. 사소한 이기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 많을 때 그 나라는 무너지고 만다. 결국 수국이라는 의미는 자신을 지키라는 뜻이 된다. '자신을 지키는 절' 그것이 수국사라는 절의 본뜻이 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세간의 법도 출세간의 법 못지않게 엄중하다. 세간법을 지켜나가는 일과 험난한 산중 수행의 길은 전혀 다르지 않다. 효심과 충성, 이런 고리타분한(?) 덕목을 수국사라는 이름으로 하여 되새긴다.
 수국사를 내려오는 좁은 주택 골목길에서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있다. 모두들 불안과 안도의 눈빛을 동시에 띠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들 이승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하나는 없다. 빛과 그림자, 그 명암이 모여 세상의 그물을 짜고 있는 것이다.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