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 제정에 나서다
‘오라 비구여!’
안나 꼰단냐, 아싸지 등 사르나트(녹야원)의 다섯 수행자, 우루벨라 까싸빠 등 까싸빠 삼형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그리고 마하까싸빠 등과 같은 빼어난 제자들이 교단에 참여하는 데는 붓다의 이 한 마디면 충분했다. 그러나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서 터전을 잡은 후 수많은 출가자와 재가자들이 붓다의 상가에 들어오면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더 정비되고 구체적인 입교(入敎) 절차가 요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붓다께 귀의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상가에 귀의합니다.”
그런데 상가의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면서 시끄러운 문제들이 내부에서 하나 둘씩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큰 소리로 거리를 누비며 음식을 구걸하고, 걸식한 음식을 두고 찬탄하거나 타박하며, 승방으로 돌아와 잡담으로 시끄럽게 떠드는 이들이 나타났다. 가사를 입은 모양이 단정치 않고, 걷고 서고 눕는 모양새를 제멋대로 하는 이들도 있었다. 비구의 자질이 부족한 이, 수행자의 기본예절조차 지키지 않는 이들도 생겨났다. 또한 물과 젖처럼 화합하며 서로를 보살피라는 당부에도 불구하고 종족과 출신을 따지고 관습에 따라 행동하는 일들이 상가 내에서 벌어졌다.
붓다는 상가의 위계와 질서를 유지하고 당신의 눈과 귀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출가하는 이들의 자질을 염려해 입단 절차를 제도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비구가 되기 위해서는 구족계(具足戒, 비구계)를 받도록 하고, 계의 조목을 하나하나 정비해 나갔다.
구족계를 받으려는 자는 먼저 자신의 화상(和尙)을 선택해 평생 스승으로 모시고, 세속의 아버지와 아들처럼 서로를 보살피고 돕도록 했다. 화상은 제자에게 필요한 덕목을 가르치고 행동 하나하나를 지도하며 필요한 물품을 마련해주도록 하였고, 제자가 병들면 그의 신변을 보살피고 식사까지 돌보게 했다. 제자는 화상을 섬기고 의식주 모두에 걸쳐 마음을 써서 불편이 없도록 하며, 세수와 목욕에서부터 식사, 청소, 빨래에 이르기까지 화상의 일을 거들어 주도록 정했다. 화상을 정해 수학한 이만이 스승인 화상의 보증 아래 비구가 될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상가의 한 사람으로서 완전한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전체 상가의 동의를 구하게 했다. 상가 구성원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출가하려는 당사자와 그의 보증인이 될 화상의 이름을 거론하며 대중의 뜻을 물었다. 대중에게 세 번을 물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을 경우에만 상가가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고 비구가 지켜야 할 계목들을 일러주며 출가를 허락했다.
화상을 정한 다음에도 문제는 발생하였다. 그의 화상이 다른 고장으로 떠나버려 홀로 남겨지거나 환속하거나 죽거나 다른 종교로 전향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다. 이럴 때를 대비해 아사리 제도를 만들었다. 아사리는 화상이 곁에 없는 이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스승과 제자로서 서로를 돕고 보살피도록 하는 제도였다.
붓다는 출가의 조건이나, 출가 후 생활에 있어서 계급과 재능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비구는 같은 복장에 같은 규율을 지키며 생활하도록 했다. 따라서 상가 안에서 위계와 질서의 기준, 즉 좌석의 차례를 정하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구족계를 받은 순서였다. 따라서 구족계를 받을 때는 당사자와 화상의 이름은 물론 장소와 의식을 집행하던 상황,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도록 했다.
구족계가 제도로서 확립되자 그에 따른 세부 규정들도 보완되었다. 라자가하에서 우빨리라는 청년이 열여섯 명의 친구와 함께 목갈라나에게 출가하였는데, 나이가 어렸던 탓에 시도 때도 없이 추위와 굶주림을 호소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들 열일곱 명은 추위와 굶주림, 사람들의 모욕을 견디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붓다는 성년, 즉 만 스무 살이 넘은 사람에게만 구족계를 주도록 정했다. 미성년자도 출가는 허용되었지만 정식 비구로 인정되지 않았다. 비구들의 지도와 보살핌을 받도록 한 그들을 상가에서는 사미(沙彌)라고 불렀다.
지켜야 할 계의 조목 또한 끊임없이 정비되었다. 상가가 구성된 초기에는 출가생활의 기본 방침으로 4의지(四依支)를 일러주었다. 즉 출가 수행자는 걸식하는 생활에 의지하고, 분소의를 입는 생활에 의지하고, 나무 아래에서 수행하는 생활에 의지하고, 동물의 대소변을 이용해 만든 진기약(陳棄藥)을 사용하는 생활에 의지한다는 정도였다.
초기의 제자들은 일일이 규제하지 않아도 마땅히 지켜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출가자가 늘어감에 따라 마땅히 지켜야 할 것들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들이 발생했다. 범행(梵行), 즉 일체의 성행위를 금하는 것은 붓다의 상가는 물론 니간타를 비롯한 다른 교단의 출가 수행자들도 기본적으로 지키던 의무사항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본 사항들조차 지켜지지 않는 일이 교단 내부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갖가지 사건들을 계기로 살생, 거짓말, 도둑질 등의 사회윤리부터 상가의 특수성을 반영한 세부조항까지 구족계의 항목들은 점차 늘어났다. 승원 생활을 터전으로 구족계는 끝없이 정비되었고, 계를 지킴으로써 교단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보름에 한 번씩 일정 지역에 거주하는 상가 구성원들은 의무적으로 한 자리에 모여 계경(戒經)을 낭독하고 잘못을 고백하며 참회하는 포살(布薩)의식을 시행하도록 제도화했다.
그 외에도 상가에는 많은 규정들이 생겨났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안거(安居)였다. 3개월에서 4개월 동안 비가 지속적으로 내리는 우기(雨期)에는 한 곳에 정착해 생활하며 외출과 유행(遊行)을 삼가는 풍습이 인도 대부분 지역에 있었다. 다른 교단들 역시 초목을 밟거나 동물에게 피해를 주기 쉬운 이 시기에는 일정한 곳에 머물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라자가하를 중심으로 교단이 성립될 무렵, 비구들은 우기에 구애되지 않고 포교를 위해 분주하게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러자 이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붓다는 안거 제도를 마련했다. 우기 동안에는 한 곳에 거주하며, 질병과 재난 등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출하는 일이 없도록 금지했다. 그 기간을 스승과 장로들로부터 가르침을 듣고 수행에 매진하는 시기로 삼도록 했다. 우기가 끝날 무렵이면 다음 포교활동을 위해 신자들로부터 옷감을 제공받아 가사를 만들고, 발우가 깨어졌으면 새 발우를 마련하기도 했다. 안거 마지막 날에는 안거를 함께 한 이들이 모두 모여 그동안 보고, 듣고, 의심한 허물들에 대해 토로하고 참회하는 자자(自恣)의식을 행하였다.
숫도다나의 초대
까삘라왓투에도 사끼야 족의 왕자 고따마 싯다르타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 되었고, 그의 가르침이 마가다 국 전역과 까시 왕국의 구석구석에 퍼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특히 중인도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 마가다 국의 빔비사라 왕이 붓다의 가르침에 감동하여 그를 신봉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사끼야 족 모두를 기쁘게 했다. 사끼야 족의 긍지와 자존심은 마치 보름 무렵 사리 때의 조수처럼 불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붓다가 자신의 고향을 서둘러 찾지 않고 있는 것에 약간의 실망감을 가지고 있었다.
숫도다나 왕은 그러한 주민들의 기분을 알게 되었다. 그 역시 아들을 만나고 싶었다. 사끼야 족의 명예를 세상에 드날린 아들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다. 모든 이들에게 찬탄과 존경을 받는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와 가슴속에 깊숙이 응어리진 원망과 슬픔을 풀어주길 고대하였다. 숫도다나 왕은 아들을 초청하기 위해 라자가하로 사신을 파견했다.
“아비는 네가 하루빨리 까삘라왓투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뜻을 이루었으니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라.”
그러나 숫도다나 왕의 기대는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의 자랑스러운 아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고향으로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파견한 사신들은 한번 가면 감감 무소식이었다. 기다리다 지쳐 다시 사신을 보내면 그 역시 소식이 끊겼다. 함흥차사가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무려 아홉 명의 사신을 보냈지만 아들이 있는 남쪽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고따마 싯다르타를 초청하러 간 사신들은 하나 같이 위대한 성자가 된 붓다를 만나고 나서는 곧바로 출가를 해버렸던 것이다. 숫도다나 왕은 할 수 없이 가장 믿을만한 재상의 아들 깔루다인을 라자가하로 보내기로 했다. ‘사끼야 족의 안위를 누구보다 염려하는 깔루다인이라면 이 일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싯다르타와 함께 흙장난을 하며 자란 동갑내기 친구의 말이라면 내 아들도 귀를 기울일 것이야.’ 생각이 여기에 미친 숫도다나는 궁으로 깔루다인을 불러 당부했다.
“깔루다인, 너는 싯다르타와 형제나 다름없었다. 내 아들을 까삘라왓투로 데려올 사람은 너밖에 없는 것 같구나. 부디 꼭 태자를 이곳으로 데려와 다오. 나와 약속해줄 수 있겠니?”
깔루다인은 누구보다도 숫도다나 왕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슬픔이 가득한 왕의 눈빛은 그의 당부가 명령이 아니라 애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처진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숫도다나 왕의 옷자락을 받쳐 들며 깔루다인은 맹세했다.
“대왕이시여, 제가 꼭 태자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숫도다나 왕이 깔루다인을 통해 붓다에게 전한 내용은 ‘죽기 전에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깔루다인 역시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매혹되어 그곳에 가게 된 자신의 임무도 거의 잊어버렸다. 그는 붓다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수많은 승려들의 모임과 진종일 붓다를 찾아 줄을 잇는 재가신자들과 수행들의 물결에 아연해졌다. 그는 자신이 사끼야 혈통이라는 점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거의 매일 찾아와 존경의 예를 올리는 빔비사라 왕을 보면서 깔루다인은 일찍이 체험하지 못한 겸허함을 갖게 되었다. 고따마 싯다르타의 가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그의 출가 이전에 개인적으로 친숙한 친구사이였음에도 그는 붓다 앞에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깔루다인은 좀처럼 붓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붓다 주위를 에워싼 비구들로 인해 깔루다인은 붓다와 눈을 맞출 기회를 잡지 못했다. 무려 칠 일 동안 꼬박 멀리서 바라만 봐야 했다. 붓다의 모습은 커다란 코끼리처럼 위엄이 넘치고, 부처님의 목소리는 보름달처럼 밝고 상쾌했다. 깔루다인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합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설법을 마치고 죽림정사 안에 있는 자신의 작은 오두막으로 돌아가던 붓다가 군중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깔루다인을 알아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깔루다인은 붓다 앞으로 나아가 예를 올리고 침묵에 잠겼다. 붓다가 물었다.
“깔루다인, 무슨 일로 라자가하에 오게 되었는가? 공무로 아버지와 함께 온 것인가, 아니면 가정생활을 청산하고 출가하려는 것인가?”
“세존이시여, 당신을 까삘라왓투로 초청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버지 숫도다나 왕께서 저를 이곳으로 보냈습니다. 세존이시여, 까삘라왓투의 숫도다나 왕께서는 마치 백합이 태양 떠오르기를 기다리듯이 세존의 귀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사끼야 족 사람들이 직접 세존의 설법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지금이 고향을 방문하기에 적절한 때입니다.”
“깔루다인, 내가 까삘라왓투로 가기에는 아직은 이르다. 조금 더 기다리도록 하자. 이번 우기가 끝나면 우리 모두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까삘라왓투는 요즘 어떤가? 그대의 가족은 안녕하신가? 그리고 내 부모님들은 편안하신가? 야소다라는 내 출가를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어린 라훌라는 어떤가?”
“세존이시여, 당신의 부모님들이나 저의 부모님 모두 평안하십니다. 그리고 야소다라와 라훌라 역시 잘 있습니다. 당신께서 출가한 뒤 숫도다나 왕의 깊은 애정이 야소다라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라훌라는 미소년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그는 예나 지금이나 당신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내 출가가 야소다라와 라훌라에게 생각했던 것만큼 심한 충격을 주지 않았다니 다행이다. 깔루다인, 우리는 이 세계에 홀로 태어난다. 물론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존재는 부모님들에게 부분적인 책임이 있고, 또 보호하고 살필 의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더구나 과잉보호는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에게 의존하게 하며,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거기에 대처할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결국 자기 스스로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누구도, 조물주라고 불리는 브라흐마(梵神)조차도 우리를 구원하거나 완전을 성취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 밖에 누가 있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아무도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깔루다인이 대답했다. 그는 지금까지 사끼야 왕국의 한 재상의 아들로서 누려왔던 안도감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반성했다. 여기 숫도다나 왕의 아들, 옛 친구 고따마 싯다르타는 지금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깔루다인은 세계와 자신에 대한 시각과 태도를 바꾸고, 이어 며칠 동안 붓다의 설법을 경청하면서 붓다가 설법하는 내용이 진실하고 타당한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붓다의 허락을 받아 출가해 비구가 되었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과 지도에 따라 온 힘을 다해 정진했다. 그는 오래지 않아 갈애와 증오와 미혹, 세 가지 악의 뿌리를 완전하게 제거하여 당당한 승리자가 되었다. 그는 붓다에 이어 깨달음을 얻은 최초의 사끼야 족 출신 비구였다.
우기가 끝나갈 무렵, 붓다는 제자들을 소집하여 함께 까삘라왓투로 가자는 뜻을 밝혔다. 아라한이 된 비구 깔루다인은 붓다의 허락을 받아 숫도다나 왕에게 붓다의 방문을 미리 알리기 위해 며칠 먼저 길을 떠났다. 깔루다인이 숫도다나의 왕궁에 도착했을 때, 숫도다나 왕은 깔루다인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수행자여, 낯익은 얼굴인데도 나는 그대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범상한 수행자가 아닌 듯한데, 그대는 누구시요?”
“왕이시여, 저는 당신의 아들을 이곳으로 초청하기 위해 라자가하에 갔던 깔루다인입니다. 저는 라자가하에서 당신의 아들 고따마 싯다르타, 즉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위대한 스승 붓다께 귀의하여 모든 인간고에서 벗어나 해탈을 이루었습니다. 왕이시여, 당신의 아들이신 거룩한 스승께서 지금 까삘라왓투로 오시는 중이며, 곧 수많은 제자들과 함께 이곳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아, 깔루다인이었구나. 그런데 너도 사문이 되었느냐?”
“예, 저도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출가해서 비구가 되었습니다.”
숫도다나는 아들의 친구였지만 지금은 거룩한 수행자가 된 깔루다인 앞에 엎드려 예를 표시했다. 그만큼 그는 무엇보다도 아들과의 해후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에 그려보던 아들의 모습을 깔루다인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한없이 기뻤다. 그는 즉시 붓다와 그의 제자들이 도착하면 니그로다 동산에 머물 수 있도록 준비를 서둘렀다.
시문(詩文)에 뛰어났던 깔루다인은 숫도다나 왕과 사끼야 족 사람들에게 생기 있는 음성으로 붓다가 된 고따마 싯다르타를 아름다운 음성으로 노래했다.
인간세계에서 온전한 깨달음을 얻으신 붓다께서는
바른 선정에 들어 평안을 즐기시는 분,
일체법을 초월한 집착 없는 참된 분,
사람들은 물론 신들조차 예배하는 분,
일체의 탐욕에서 해탈을 즐기시네.
금광의 암석에서 황금을 만들어내듯 온갖 속박 벗어나 평안을 즐기시네.
번뇌의 가시 숲 거침없는 코끼리처럼,
허공에 뜬 태양처럼,
우뚝 솟은 봉우리처럼,
커다란 권능 지니고도 모든 생명 해치지 않는 위대하고 신비로운 용과 같은 코끼리,
내 여러분께 그분을 자랑하렵니다.
고행과 범행은 그분의 뒷발,
믿음의 코로 진리를 탐구하고,
지혜와 평정이 상아처럼 빛납니다.
온갖 가르침 가득 담긴 두둑한 배,
외떨어진 꼬리처럼 고독을 즐기시는 분,
가건 서건 앉건 눕건 그 코끼리는 늘 몸과 마음이 선정에 든답니다.
청정하고 맑은 공양 따뜻하게 받아주고
순수하지 않은 공양 받지 않으시며
구차하게 목숨에 집착하지 않으시니
어떤 허물도 그분에게선 찾아볼 수 없답니다.
온갖 번뇌 끊어 없애고
일체 속박 벗어나 자유롭게 노닐며 구속되지 않는 분,
세상에 태어나 이 세상에 살면서도 어떤 욕심에도 물들지 않는 분,
새하얀 저 연꽃과 같답니다.
부드러운 향기에 사랑스러운 빛깔,
더러운 물에서 나고 그 물에서 자라도 물과 진흙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답니다.”
고향 까삘라왓투를 찾다
숫도다나 왕과 수많은 사끼야 족 주민들이 두 달 가까운 긴 여정을 거쳐 까삘라왓투에 도착한 붓다를 영접했다. 사끼야 족 영웅의 귀환에 백성들은 왕궁으로 난 길을 청소하고 꽃을 뿌리며 환호하였다. 숫도다나 왕은 자신의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는 끝 모를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들이 멀리서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는 숫도다나와 고따미의 눈에는 감동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위대한 성자가 된 아들의 아름다운 위엄에 저절로 기쁨이 솟아났다. ‘아, 저 모습이 진정 우리 아들 고따마 싯다르타의 모습이란 말인가!’ 두 사람의 마음은 위대한 사문이 아주 가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이미 저 존귀한 성자는 이제 그들의 아들 고타마 싯다르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왕궁으로 이어진 길을 벗어나 성 밖 니그로다 숲으로 향했다. 성대한 연희를 준비하고 기다리던 숫도다나 왕과 사끼야 족은 당황했다. 그러나 숫도다나 왕은 애써 침착함을 되찾고 ‘내 아들이 돌아왔으니 그것으로 되었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모여든 사끼야 족 백성들을 위로했다.
“자, 다들 니그로다 숲으로 가봅시다.”
니그로다 숲에 이르자, 아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숫도다나 왕은 재빨리 마차에서 내려 자신이 먼저 아들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실로 7년 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순간을 애타게 기다려 왔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숫도다나 왕은 자신도 모르게 아들에게 경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내 아들 싯다르타가 태어나던 날, 전륜성왕의 운명을 타고 났다는 선인들의 예언에 나는 아들의 발에 예배하였습니다. 왕자의 어린 시절, 농경제가 열리던 날 잠부나무 아래에서 명상에 든 거룩한 모습을 보고 나는 또 한 번 마음속으로 아들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순간, 만개한 꽃처럼 밝고 깨끗한 얼굴을 보니 나는 또 내 아들의 발아래 예배를 드립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못마땅한 태도를 나무랐던 사끼야 족의 원로들과 왕족들은 숫도다나 왕의 아들에 대한 예배에 놀라 앞 다퉈 붓다에게도 다가가 꽃을 바치고 머리를 조아렸다. 자부심 강한 사끼야 족의 정수리에 붓다의 발바닥에 묻었던 흙먼지가 날렸다. 수많은 대신들과 백성들도 차례로 절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사끼야 족이 교만을 꺾고 순백색 믿음의 천을 마련하자 비로소 붓다는 환한 미소를 보이며 온화한 눈빛으로 동족을 둘러보았다.
붓다는 사끼야 족을 향해 설법을 시작했다. 보시하는 공덕, 계율을 지키고 욕됨을 참아내는 삶에 아름다운 과보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리고, 출가의 공덕을 찬탄했다. 모든 고뇌와 속박에서 벗어나는 법을 가르쳤다. 사끼야 족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나서야 붓다는 이어 사성제를 갖가지 방편을 들어 설했다. 오랜 시간 이어진 설법에도 사람들은 싫증을 내지 않았다. 본 적 없던 광경을 목격하고, 들은 적 없던 희유한 말씀을 들은 사끼야 족은 모두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그들의 영웅을 찬탄하였다.
이때 숫도다나 왕이 아들이지만 위대한 스승이 된 붓다에게 다가가 물었다.
“스승이시여, 이 왕국을 넘겨주고 싶지만, 내가 그렇게 하더라도 붓다께서는 이 왕국을 한갓 한 줌의 재로 여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숫도다나 왕은 아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미련을 이렇게 표현했다.
“부왕이시여, 당신의 마음이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아들 때문에 크게 상심하고 계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출가한 아들에 대한 애정에 못지않은 자비심으로 백성들을 보살피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아들 대신에 더욱 위대한 사람, 진리의 교사, 옳은 길의 창도자, 평안과 열반의 초대자가 당신의 마음속에 자리할 것입니다.”
붓다가 아버지를 위로하는 애잔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들의 말을 듣는 순간 숫도다나 왕은 환희의 전율과 함께 눈에서 다시 한 번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두 손을 합장하면서 말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나를 짓누르던 슬픔은 말끔히 가셔졌습니다. 무겁기만 하던 나의 슬픈 가슴이 이제는 자랑스러운 내 아들이 이룬 크나큰 결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권력이라는 물리치기 어려운 쾌락을 거부하고 도를 닦는 생활 속에서 숭고한 목표를 이룬 붓다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올바른 길을 발견했으니, 이제는 미혹으로부터 해방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을 이끌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숫도다나 왕은 잠시 붓다와 그 제자들을 돌아본 후 물었다.
“저 비구들은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빔비사라 왕의 존경을 받으며 오백 명의 제자를 거느리던 우루벨라 까싸빠입니다. 이 사람은 우빠띠싸 마을 촌장의 아들 사리뿟따입니다. 이 사람은 꼴리따 마을 촌장의 아들 목갈라나입니다. 이들 모두 마가다 국의 바라문 출신으로 학문이 출중한 인물들입니다.”
숫도다나 왕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내 아들 싯다르타는 순수혈통의 크샤트리야이다. 크샤트리야인 나의 아들을 저런 위대한 바라문 출신들이 감싸고 있다니…’
숫도다나 왕은 붓다와 이별하고 다시 궁전으로 돌아왔다. 잔뜩 마음이 들떠 있는 며느리 야소다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아버님, 저의 남편 싯다르타는 어떻던가요? 많이 변해 있었나요?”
“그렇다. 싯다르타는 왠지 근심스럽고 불행해 보이던 예전의 싯다르타가 아니었다. 더 이상 쉽게 격해지고 감성적인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평온하며 침착했고, 확신에 차 있었다. 그의 얼굴은 맑고 밝게 빛나고 있었단다. 격렬한 고행의 후유증도 이제 완전히 나은 것 같더구나.”
숫도다나 왕이 자랑스러운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야소다라는 아직 붓다를 만날 채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7년 동안 떨어져 있던 남편과의 해후가 몹시 불안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어떨지, 또는 싯다르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붓다를 방문한다는 것이 여간 불편하고 불안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달갑지 않은 경험이 될 것이었다. 그녀는 싯다르타가 왕궁을 방문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그 날, 까삘라왓투 사람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황색 가사를 단정하게 걸친 붓다와 그의 제자들이 탁발을 위해 거리로 나온 것이다. 집에서 집으로 옮겨가는 그들의 걸음걸이와 절제된 행동은 고요하게 흐르는 맑은 강물과도 같았다. 그런데 붓다가 바리때를 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탁발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예전에는 시종들을 거느리고 마차만 타고 다니던 시내에서 싯다르타가 걸식을 하고 있다니! 붉은 흙색의 옷을 입고 손에는 얻은 음식을 담을 질그릇을 들고 있다.”
이런 소문은 곧 숫도다나 왕에게도 전해졌다. 숫도다나 왕은 황급히 붓다를 찾아가 우려를 전달했다.
“지금 붓다와 제자들이 걸식을 하는 행동은 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크샤트리야는 음식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크샤트리야는 구걸하느니 차라리 굶기를 택합니다. 당신은 크샤트리야 가문의 명예를 짓밟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얼마든지 음식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인데, 이런 모습은 참으로 황당합니다.”
“부왕이시여, 탁발은 우리 출가 비구들의 관습입니다.”
“그렇더라도 이것은 아닙니다. 붓다는 이 나라의 왕자로, 음식을 구걸해야할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님과 가족들이 왕족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듯이, 저는 ‘오래된 붓다’의 후예임이 자랑스럽습니다. 옛날에도 붓다들은 음식을 구걸했으며, 언제나 보시에 의존하며 살았습니다. 또한 왕이시여, 크샤트리야 가계는 당신의 것일 뿐 내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와 같은 혈통을 버린 지 이미 오랩니다. 그것은 이제 나와 무관한 것입니다. 나에게 더 이상 크샤트리야의 자존심은 없습니다. 그런 자존심이 없으므로 나는 어느 것도 욕되게 하지 않습니다. 바라문, 크샤트리야, 바이샤, 그리고 수드라 따위의 구별은 바라문들이 만든 구분일 뿐입니다. 나는 바라문의 노예가 아니라 붓다, 즉 깨달은 사람입니다. 모든 강물들, 야무나, 강가(갠지스) 그리고 아찌라와띠 등의 강물이 바다에 이르렀을 때 그들의 각기 다른 이름은 사라지게 되듯이, 모든 종족과 출신 계급은 우리들의 상가에 들어옴으로써 예전의 차별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숫도다나 왕이 침묵하고 있자 붓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누구나 감추어져 있는 보물을 찾아내면 가장 값진 것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먼저 바치는 것이 관습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최상의 보물인 진리(담마)를 드리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아버님이 꿈에서 깨어나 진리에 마음을 열고, 부지런하게 올바른 길로 나아가신다면, 영원한 축복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아들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숫도다나 왕이 말했다.
“붓다여, 당신의 말대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숫도다나 왕은 자신이 논쟁에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붓다와 제자들의 탁발을 저지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날 그들이 궁중에서 공양하도록 초청했다. <계속>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