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스님의 향기로운 공감언어와 법문

법정스님 공감법어87

정찬주 | | 2020-02-12 (수) 08:29

 
                            절은 가난해야 한다
 

일러스트 정윤경
 
 
마중물 생각
 
입춘이 지난 지 엿새 만에 휘파람새 소리를 듣는다. 꼭두새벽에 어둔 숲에서 봄을 알리는 철새이다. 꽃샘추위 탓인지 아직은 소리에 힘이 붙어 있지 않은 것 같다. 날이 포근하면 연달아 ‘후이후이’ 하고 허공에 음표를 그리듯 노래하는 휘파람새이다. 너무 반가워서 잠자는 아내를 깨워 함께 듣는다. 아내는 춥다고 곧 방으로 들어가 버리지만 휘파람새가 전해주는 첫 봄소식을 함께 나누는 것도 산중에 사는 나만의 작은 행복이다.
  
지난 2월 3일 불일암에 다녀왔다. 감로암 쪽으로 가는 지름길로 가지 않고, 일부러 산 아래서 올라가는 가파른 오솔길을 택했다. 삼나무가 쭉쭉 뻗은 이른바 ‘무소유길’이었다. 80년대 초만 해도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산길이었다. 산길이 너무 희미해 다른 산길로 접어들어 고생한 사람들도 적잖았다. 스님께서 헷갈리기 쉬운 지점에 암호처럼 ‘ㅂ'자 밑에 X를 쓴 말뚝을 박아 놓았을 정도였다. 불일암 가는 산길이 아니니 들어서지 말라는 뜻이었다.
스님들 말로는 ‘오솔길’이란 오소리가 통통한 배를 밀고 다니면서 만든 길이란다. 무소유길을 오르면서 오소리에게 고맙다는 감사의 말을 전해본다. 나는 동행하는 아내와 정현상 씨에게 불일암과 광원암으로 갈라지는 길목에서 예전에 스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지금은 억새가 보이지 않지만 80년대 초에는 억새가 장관을 이루던 골짜기였다. 아마도 여름 휴가철이었을 것이다. 큰절 송광사에서 오르고 있었는데, 스님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시더니 말씀했다.
 “무염거사, 저 누런 억새를 좀 봐요. 누렇게 죽은 억새인데 쓰러지지 않고 있어요. 파란 새끼억새가 다 클 때까지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거지요. 새끼 억새가 다 자라면 그제야 넘어지지요. 억새를 보면 자연의 모성(母性)이 느껴져요. 억새를 흔들리는 여자의 마음이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강가에서 자라면 갈대, 산에서 자라면 억새가 된다. 대중가요 중에 ‘으악새 슬피 우는’ 가사가 있는데 ‘으악새’는 새가 아니라 억새이다. 양력으로 2월 19일이 법정 스님 입적 10주기 날이다. 우리는 스님 입적 10주기가 생각나 불일암에 오르고 있었다. 내 소설 <소설 무소유>에 밝힌 적이 있지만 스님께서는 현장 스님 모친인 4살 위 외갓집 누나가 병문안을 와서 “스님이 돌아가시면 어디에서 또 만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불일암으로 오세요.”라고 말씀했다. 불일암에 가면 스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스님의 유골이 묻힌 후박나무뿐만 아니라 스님의 혼을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을 터였다.
불일암은 단순한 암자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법정 스님의 유지가 덕조 스님에 의해 그대로 지켜지고 있었다. 위채와 아래채, 우물, 그리고 대나무 세면실, 재래식 정랑 등등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큰절 규모로 변해가는 다른 암자와 달리 소박하고 정겨웠다. 물신(物神)의 손이 범접하지 못하는 청정공간의 암자였다. 선택한 가난이야말로 맑은 가난, 즉 청빈(淸貧)이라고 말씀했던 스님의 가르침이 문득 떠올랐다. 불일암은 작아서 아름답고 가난해서 맑았다. 승속을 불문하고 최고 최대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한번쯤 무엇이 진정한 아름다움인지 되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에른스트 슈마허의 금언은 여전히 유효했다.
 
스님의 말씀과 침묵
 
#
문명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
그렇지만 자연은 사람을 소생시켜준다.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 때 사람은 시들지 않고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어떤 선사는 그의 오두막 암자를 두고 이렇게 노래한다.
 
벽이 무너져 남북이 트이고
추녀가 성글어 하늘이 가깝다.
쓸쓸하다고 말하지 말게
바람을 맞이하고 달을 먼저 본다네.
 
오두막 암자가 다 허물어지고 낡았기 때문에 바람을 맞이하고
달을 먼저 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청빈은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삶의 어떤 운치이다.
 
#
성 프란치스코는 수도자 집은 흙과 나무로만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흙과 나무는 기본적인 소재이다.
흙과 나무로만 짓게 되면 자연히 검소한 집이 된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런 수도원을 그들이 소유하지 말고
그 속에서 순례자나 여행자처럼 살자고 역설했다.
진정으로 우리가 삶을 살 줄 안다면 순례자나 여행자처럼 살아야 한다.
순례자나 여행자는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날그날 감사하면서, 나눠 가지면서 삶을 산다.
집이든, 물건이든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순례자처럼 살아야 한다.
 
#
나는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어떤 절이나 교회를 물을 것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절은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한 도량입니다.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사스러움과 흥청거림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길상사는 가난한 절이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갈무리 생각
 
불일암 작은방인 수류화개실에서 덕조 스님이 우려 주는 차를 마시며 들은 얘기다. 덕조 스님은 불일암에서 10년째 머물고 있는데, 스님과 늘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스님 입적이 실감 나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찾아온 사람들이 9주기니 10주기니 말들을 하지 자신은 스님을 시봉할 때 첫 마음 그대로란다. 법정 스님이 출타하셨다가 돌아오는 날은 아침 한나절 동안 큰절과 불일암 사이의 오솔길을 빗자루로 쓸었단다. 무심코 비질하면서 마음을 닦지 않았을까? 그것도 수행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스님은 차담을 하면서 10여 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길상사 주지로서 절을 운영하려면 많은 경비가 들었다. 그래서 하루는 덕조 스님이 길상사에 납골당을 지어 운영하자고 법정 스님께 말씀을 드렸다.
“스님, 절 살림을 하다 보니 경비가 많이 들어갑니다. 신도들에게 보시 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살림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찾아냈습니다.”
 “무엇이오?”
 “납골당을 조성하면 절 살림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연구를 한 번 해봐요.”
 덕조 스님은 납골당을 운영하는 일본 사찰을 다녀왔다. 천주교 성당에 있는 납골당도 여러 군데 살펴보았다. 그 결과 칙칙한 분위기의 납골당이 아니라 세련되고 밝은 분위기의 예술 감각이 돋보이는 납골당을 짓기로 하고 설계도 작업까지 마쳤다. 마침 투자자까지 생겨 절에서는 경비를 들이지 않고서도 조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강원도에 계시던 스님이 오셨다. 스님이 덕조 스님을 불렀다.
 “납골당 조성, 없던 일로 하시오.”
 “예? 설계도까지 다 나왔는데요. 투자자도 생겼고요. 왜 없던 일로 합니까?”
 “절에 돈이 생기는 일이니까.”
절에 돈이 없어서 주지스님이 아이디어를 내고 시작한 일인데 이제 돈이 생길 것 같으니 없었던 일로 하자는 법정 스님의 벼락같은 말씀이었다. 덕조 스님은 황망했지만 은사스님의 말을 따랐다. 바로 모든 계획을 놓아버렸다. 길상사를 개원할 때부터 법정 스님은 가난한 절을 지향하셨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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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경담 2020-02-12 09:20:32
답변  
비처럼 내리는 가난을 맞으며
사랑을 향해 걸어갔다.
가난을 위해 남겨져 있는
소주 한잔을 털어 넣고
710번 버스를 탔다.

여자는 냉면 한 그릇 값을 치르고...

담장을 넘어온 장미 한 송이를 꺾어 여자를 찾아가는 남자
무릎에 누운 사내의 머리를 쓸어내리는 여자
1980년대 한강의 여름은, 그렇게
청춘의 가난을 닦아내고 있었다.
화엄 2020-02-12 12:12:48
답변 삭제  
가난하면서도 주룩들지 않고  도덕이 있는 세상을 꿈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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