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스님의 향기로운 공감언어와 법문

법정스님 공감법어82

정찬주 | | 2020-01-08 (수) 07:41

 
쥐해 첫날, 쥐를 명상하다

일러스트 정윤경
 
 
마중물 생각
 
내 산방 벽록당 터에서 새해 첫해를 본다. 산중 협곡이라 다른 곳보다 일출이 30분쯤 늦다. 그러나 해가 흐릿한 사람처럼 게으른 것은 결코 아닐 터이다. 단 한 번도 일출의 시각을 어긴 적이 없는 새해 첫해처럼 모든 분들이 위의(威儀) 있고 눈부신 나날을 맞이하시기를 빈다.
 
2020년은 경자년((庚子年)으로 쥐의 해다. 옛 어른들 말이지만 경자년의 화제인물은 단연 쥐띠 사람들이다. 나의 둘째딸도 쥐띠인데, 어떤 선입관이 있어서 그런지 딸의 습관 중에서 쥐를 연상케 하는 기억들이 많다. 둘째딸은 책읽기를 좋아해서 마치 쥐가 먹이를 물고 가다가 흘린 것처럼 소파에도, 방바닥에도, 심지어 화장실에도 딸의 책이 놓여 있기 일쑤였다. 또, 쥐가 고구마를 깊이 파먹듯 흥미로운 책은 수십 번을 반복해서 읽곤 했다. <아기돼지 삼형제>는 유치원시절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손에서 놓지를 못했다. 뿐만 아니라 유아기 때의 딸은 쥐가 먹이를 쥐구멍 속으로 옮겨 안전하게 먹듯 맛있는 과자가 생기면 베개 밑에 놓고 야금야금 먹었다.
 
한편, 친한 스님에게 들은 얘기지만 고승 중에 쥐띠가 많다고 한다. 쥐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먹이를 찾듯 쥐띠 수행자들은 밤중에 눕지 않고 장좌불와 같은 가행정진을 초지일관한 끝에 결국 고승이 된다는 것이었다.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지만 고승 중에 쥐띠가 많다는 것은 제법 흥미롭다. 그럴 듯한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남이 잠잘 때 잠을 자지 않고 노력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를 비교해 보니 조금 부끄럽다. 남들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긴 하지만 밤 9시 전후로 눈이 감기는 자가 바로 나이다. 만약 내가 출가했더라면 큰스님은 고사하고 ‘작은스님’도 못 되었을 것 같다.
 
스님의 말씀과 침묵
   
#      
지리산에 있는 어느 궁벽한 암자에서 지낼 때였다.
그때도 여름철 안거가 끝난 뒤라 함께 지내던 도반(道伴)들은
다 하산해 버리고 나 혼자 남아 텅 빈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그 시절은 등산꾼도 구경꾼도 없던 때라
암자는 그야말로 적적요요(寂寂寥寥)하여 무일사(無一事)였다.
사람이라고는 약초를 캐러 다니는
마을 사람들이 이따금 지나갈 뿐이었다.
다로(茶爐)에 물은 끓어도 더불어 마실 이가 없는
그런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양을 마치고 헌식(獻食)을 하기 위해
뒤꼍 헌식돌로 나갔더니 거기 꽤 큰 쥐 한 마리가 있었다.
나를 보고도 달아나지 않고 헌식하기를 기다렸다.
헌식이란 불가에서 공양할 때 배고픈 중생 몫으로
따로 떠놓았다가 베푸는 일을 말한다.
여름철 내내 헌식돌이 깨끗했던 연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헌식한 음식은 대개 새나 다람쥐가 와서 먹게 마련인데,
어떤 때는 전날 놓아둔 음식이 그대로 남아 지저분했다.
지금까지 헌식돌이 말끔했던 것은
날마다 이 쥐가 와서 먹어 치웠기 때문인 듯했다.
 

​하루 한 끼밖에 먹지 않을 때라 한낮에 공양을 끝내고
헌식을 하러 가면 으레 그 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전에는 쥐꼬리만 보아도 소름이 끼치곤 했는데,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쥐를 대하니 오히려 반가웠다.
더구나 나를 의지하고 사는 중생이거니 생각하면
어떤 연민의 정마저 들었다. 이후 헌식을 전보다 좀 많이 주었다.
쥐는 무럭무럭 자라 보통 쥐의 세 곱은 되었다.
“너 오늘도 왔구나, 어서 먹어라.”
헌식을 주면 내 곁에 다가와 먹을 만큼 우리는 길이 들었다.
 
이렇게 지내던 어느 날 쥐에게 한마디 일러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미쳤다. 그날도 쥐는 어김없이 헌식돌에 와 있었다.
 쥐가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걸었다.
 “쥐야, 네게도 영식(靈識)이 있거든 내 말을 들어라.
네가 여러 생(生)에 익힌 업보로 그같이 흉한 탈을 쓰고 있는데,
이제 청정한 수도장에서 나와 같이 지낸 인연으로 그 탈을
벗어버리고 내생(來生)에는 좋은 몸 받아 해탈을 하거라.
언제까지 그처럼 흉한 탈을 쓰고 있어서야 되겠니?
어서어서 해탈하거라.”
 
쥐는 그대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 다음날
헌식돌에 나갔을 때 쥐가 보이지 않았다.
웬일인가 했는데 그 쥐는 헌식돌 아래 죽어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못 미더워하고
서로의 말이 통하지 않는 막힌 세상에서,  
쥐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었구나 싶으니 대견스러웠다.
하는 짓에 따라 그 거죽이 다를 뿐 착하게 살려는 생명의
근원은 조금도 다를 게 없음을 거듭거듭 확신할 수 있었다.
염불을 하고 그 자리에 묻어주었다.
그해 가을 나는 그 쥐의 명복을 빌면서 줄곧
마른 바람소리를 옆구리께로 들었다.  
 
갈무리 생각
 
스님의 쥐 이야기를 읽고 보니 나에게도 쥐에 관한 메아리가 인다. 나도 쥐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산중에 살면서 몇 해 전 겨울밤에 쥐 때문에 오들오들 떨었던 이야기다. 쥐 한 마리로 인한 갑작스런 난방사고로 얼마나 생고생을 했는지 바로 어제의 일인 듯 기억이 생생하다.
 
몇 해 전 겨울이었다. 밤 11시쯤 안사람이 방 안의 난방계기의 온도표시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아내는 겨울철이 되면 방안 온도에 더 민감해져 늘 난방계기를 보곤 했던 것이다. 밤 7시에 잠시 외출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난방계기는 정상이었다고 한다. 나까지 나서서 확인해 보아지만 방안 온도를 알리는 난방계기의 숫자가 수상하게 깜박거렸다. 전원을 끄고 다시 켜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손전등을 켜들고 보일러창고로 가보니 지붕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고 있었다. 창고의 안의 보일러에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보일러창고 문을 열어보니 과연 온수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보일러창고 바닥은 이미 장화를 신어야 할 정도로 물이 차올라 있었다. 나는 감전의 위험 때문에 보일러창고 뒤로 돌아가 심야보일러 전기차단기를 내렸다. 그런 뒤 보일러 전원도 껐다. 그제야 쏟아지던 온수가 멈추었다. 가까스로 임시대처를 하고 밤하늘을 올라다보았다. 눈이 희끗희끗 날렸다. 밤눈이 오시는 날에 당하는 큰 봉변이었다.
혹한에 가장 두려운 사고는 난방 사고였다. 세상 사람들이 ‘해피 뉴이어!’라고 신년인사를 주고받는 세밑에 상상도 못했던 사고를 당한 나와 아내는 당장 하룻밤 날 것부터가 걱정이 되었다. 온수가 돌지 않으니 방안의 수도가 얼지 몰랐다. 화장실 딸린 방은 전기담요를 다락에서 내려서 깔았다. 부엌은 아내 도자기공방의 전기난로를 가져와 시간모드로 켰다. 침실은 온수가 도는 전기장판을 깔았고 거실은 화목난로를 밤새 피우기로 했다.
안사람이 춥다고 몸을 뒤채며 말했다.
“당신이 언젠가 창고에서 쥐를 보았다고 하지 않았어요?”
산중생활을 하다보면 예감이 적중할 때가 많았다. 어떤 날은 산신령을 닮아가는 듯했다.
“쥐가 보일러 온수 드럼통 파이프를 갉았는지도 모르겠군.”
그때 쥐를 적극적으로 쫓아냈어야 하는데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가을에 텃밭에서 수확해둔 땅콩을 먹고 자란 새끼 쥐는 성장하여 배가 통통했다. 12월 내내 대야에 든 땅콩을 다 먹고는 어미 쥐가 되어 보일러창고 안에서 주인행세를 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창고가 좀 더 따뜻할 것이다. 넌 운이 좋은 녀석이야.” 하고 너그럽게 봐준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나는 불침번 당번이 된 병사처럼 화목난로에 장작을 넣어주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날이 밝아지면 산중마을의 김씨 어른을 불러와 응급조치를 한 뒤 읍내의 귀뚜라미보일러 기술자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쥐 한 마리가 낸 대형 사고였다. 어쭙잖은 동정이 내 산방생활의 리듬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경제적으로도 몇 십만 원 정도 날아갈 것이 분명했다. 산중에 살면 미물들과 한 가족이라는 유대감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제 녀석은 아니었다.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미운정이 들었는지 문득 나도 좋고 녀석도 좋은 벌이 찾아졌다. 녀석이 추노(推奴)처럼 산중 어디론가 도망쳐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마주치면 감정이 솟구칠 터였다. 나는 대자대비한 부처님이 아니라 희로애락 속에 사는 중생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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