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을 통해 인간이 되어간다

 

 

어제 새해 달력 두 개를 받았다. 이제야 두 개의 달력을 펼쳐보고 있다. 두 개 모두 12장의 사진으로 엮은 것인데, 하나는 안국선원 달력에 실린 유동영 사진작가의 우리나라 마애불 사진들이고, 또 하나는 현묵스님께서 보내준 달력의 송광사 사계절 풍경사진들이다. 어디에 걸어둘 것인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나는 유동영 사진작가의 부드럽고 그윽한 사진들을 좋아해서 해마다 눈에 잘 띄는 거실에 걸어두곤 했는데, 올해도 결국에는 그럴 것 같다. 아직 받지는 못했지만 음력표기와 절 행사를 도드라지게 표기한 봉갑사 달력이 오면 아마도 아내의 작은 공부방으로 갈 것 같고.

 

다가올 새해 달력을 선물 받으면 꼭 생각나는 후배가 있다. 나보다 먼저 간 이호중 화가이다. 이호중의 흔적은 내 산방 곳곳에 남아 있다. 거실에는 부모의 초상화와 풍경화 소품, 식당 방에는 상큼한 딸기 그림이 날마다 내 식욕을 돋워주고 있다. 유독 세밑에 화가후배가 생각나는 것은 그의 독특한 연말 보내기 때문이다. 화가후배는 연말이 되면 광화문 지하도로 나가 구세군 자선냄비 옆에서 트럼펫을 불곤 했다. 기타와 트럼펫을 전문가 수준으로 연주했던 화가후배는 재능기부를 그처럼 멋들어지게 했다. 후배는 자선냄비 옆에서 트럼펫을 불기 위해 구세군에 가입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아는 한 노스님에게 들었던 얘기도 잊히지 않는다. 노스님은 연말이 되면 대구 번화가의 구세군 자선냄비 옆으로 가서 복전함을 앞에 놓고 염불했다고 한다. 첫날에는 구세군 측에서 항의했지만 이튿날부터는 노스님의 진심을 알고는 한 식구처럼 행동했다는 사연이다. 노스님은 그날그날 복전함에 들어온 성금을 구세군 자선냄비에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기부하곤 했던 것이다.

 

가고자 하는 길은 다르지만 화가후배나 노스님의 순수한 마음결은 같지 않았을까 싶다. 종교를 초월한 노스님의 행동이나 선의지(善意志)로서 재능기부를 했던 화가후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 가슴이 따뜻해진다. 자신의 기부를 신문 방송에 드러내놓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선행에 동참하는 이들도 결코 적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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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있어도 가난하기 때문에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관계란 나눔을 통해서 형성된다. 그러기에 베풀고 나눈다는 것은
그 어떤 행위보다 으뜸간다.
나눔을 꼭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라.
보시에는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가 있다.
재보시는 물질적인 보시이다. 
법보시는 좋은 말씀, 법문을 가지고 보시하는 행위이다.
무외시는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이다.
물질이란 무엇인가? 마음의 그림자이다.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에 물질은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마음을 나누고 베푸는 일이 보시의 근본이다.
친절한 말씨와 정다운 얼굴로 얼마든지 보시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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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보장경>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찾아와 하소연했다.
“저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은 그대가 남에게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는 빈털터리라서 남에게 베풀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재물이 없더라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를 설했다.

 

첫째는 안시(眼施). 눈으로 베푸는 것,
즉 따뜻하고 온화한 눈길로 하는 일인데,
언제나 좋은 눈으로 남을 대하면 천안(天眼)과 불안(佛眼)을
얻을 것이라고 부처님이 말했다.
둘째는 화안시(和顔施). 얼굴로써 베푸는 것,
즉 부드럽고 즐거운 얼굴로 상대방을 대하는 일인데,
아침을 부드러운 얼굴로 시작하는 사람은 하루가 꽃 피어나고,
하루를 부드러운 얼굴로 사는 사람은 일생 동안 꽃이 피어난다.
셋째는 언사시(言辭施). 말로써 베푸는 것,
즉 언제나 좋은 말과 부드러운 말씨로 사람을 대하는 일이다.
사랑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양보의 말이 그것이다.
넷째는 신시(身施). 몸으로써 베푸는 것,
즉 언제나 몸을 움직여 일어나 맞이하며 정성껏 대하는 일이다.
내 몸 움직이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남을 돕는다.
다섯째는 심시(心施). 마음으로써 베푸는 것,
즉 타인이나 다른 존재에 대해 자비심을 갖는 일이다.
마음을 늘 평화롭게 하여 그런 넉넉함으로 이웃을 대한다.
여섯째는 상좌시(牀座施). 자리로써 베푸는 것,
즉 언제나 자기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베푸는 일이다.
경쟁자의 자리를 빼앗지 않고 오히려 더 넓게 내다보고
그에게 앉을 자리를 마련해 준다.
일곱째는 방사시(房舍施). 즉 방과 집으로써 베푸는 것,
즉 자신의 집을 타인에게 하룻밤 숙소로 제공하는 일이다.
또는 다른 사람에게 쉴 만한 공간을 내준다.
그럴수록 나의 존재 영역이 넓어지게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베풂은 재산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일상생활에서 늘 행할 수 있는 나눔인 것이다.
나눔은 물질이 아니어도 좋다.
따뜻한 말, 고운 눈길, 좋은 시간, 행복한 마음을 전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덕성인 자비와 친절이 바탕이 된다면
굳이 물질이 아니라도 무엇이든 나눌 수 있다.
우리는 나눔을 통해 진정한 인간이 되어간다.

 

 

어제 점심을 함께 하고 헤어진 경담(鏡潭) 이종만 씨의 선행은 늘 나를 감동하게 한다. 올해 국민연금관리공단 직장을 정년퇴직하는데 내년부터는 고향인 나주시로 내려가 사회복지협의회에서 복지사각지대를 찾아다니며 봉사하는 삶으로 여생을 보내겠다고 한다. 지자체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무보수 봉사활동인 모양이다.
소처럼 선하게 눈이 큰 경담과의 인연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주시 원각사에서 강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경담이 내 산방을 드문드문 찾아왔던 것이다.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자 그는 자신의 숨은 얘기를 가끔 털어놓기도 했다. 복지시설에 정기적으로 기부하고 싶었던 그는 새벽에 신문 배달하는 일을 택했다. 이후 정식직장에서 받은 월급은 아내에게 주고, 과외로 얻은 수입은 전액 복지시설에 기부했다.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봐 얼굴에 큰 마스크를 쓰고 새벽에 일어나 몇 년 동안 신문을 돌렸다. 경담은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시험해보고 싶어서 신문배달을 시작했다지만 그보다는 선의지가 충만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침에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이 몇 년 동안 새벽마다 일어나 신문을 배달한다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같으면 천성이 규칙적인 습관에 익숙하지 못한 데다 체면 같은 것이 걸리적거려서 며칠 만에 주저앉고 말았을 터이다. 
경담이 신문배달을 그만 둔 사연은 그의 신분이 탄로 나서였다. 마스크 너머에 있는 얼굴을 알아본 지인이 소문을 내버렸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신문배달을 포기한 그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다가 발견한 것이 관의 손이 미치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 도움을 주는 일이었다고 한다. 오래 전에 그런 일을 하자고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임의단체를 만들어 활동해 오다가 정년퇴직한 이제는 정식단체가 된 사회복지협의회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며 행복해한다.

 

이럴 때 누구라도 콩알만큼 작을지언정 보탬이 되는 일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작가인 나 역시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내 몫은 있을 터. 나의 직접기부가 아닌 까닭에 군색하긴 하지만 경담을 후원해 줄 수 있는 독지가를 연결해주는 일도 내 몫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마침 어제 나에게 경천(敬天)이란 호를 받은 사업가 분이 점심 때 내 산방에 오기로 약속이 돼 있었으므로 나는 경담을 불렀다. 그런데 나에게 호를 받은 경천 역시 경담을 소개받고는 아주 행복해했다.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을 담아 경천이라고 지어주었는데, 그의 타고난 천품과 잘 계합되는 것 같아 나까지 몹시 흐뭇했고 그 맑은 여운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듯하다.

 

한편, 올 연말에는 신문 방송에서 기부금액을 아라비아숫자로 쓴 팻말을 치켜든 단체임원이나 기업가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불가에 무주상(無住相) 보시란 말이 있다. 상대에게 무엇을 주었지만 주었다는 생각마저 버리는 기부를 무주상 보시라 한다. 보통사람들이 기부금액 팻말을 든 것은 장려차원으로 백보를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대열에 종교인들이 가세하고 있는 사진을 보면 몹시 어리둥절해진다. 승복과 신부복을 종교인들이 신도들에게 입버릇처럼 선행을 숨기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그 반대로 행동하고 있으니 말이다. 올해에는 그런 볼썽사나운 모습들이 사라진 조용한 세밑이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고, 또 제발 그러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