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 비울 때 지혜가 움튼다

 

마중물 생각    
                       
서울의 한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산방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6개월 후에는 CT촬영까지 하자고 의사가 권유한다. 내 인생도 계절로 치자면 이미 가을에 들어섰다. 문득 아는 것이 모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다는 것은 그것 밖의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의 오만을 느낄 때마다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추수가 끝난 김제평야 너머로 지는 해를 보니 지식인의 허상이 열차의 차창에 어린다. 바로 나의 초상이다. 세상을 영원히 밝힐 것 같은 저 석양도 시나브로 빛을 잃어가고 있다. 눈을 찌르는 지식의 화려한 빛살보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지혜의 자애로운 달빛에 마음이 더 간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초삼일 가락지 같은 초승달이 잠깐 떴다가 검푸른 어둠 속으로 실종하듯 사라지겠구나. 하루살이처럼 짧은 초승달의 생(生)이다. 산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나는 지식인인지, 지성인인지, 작가인지, 무언지 되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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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우리 모두를 뿌리로 돌아가게 하는 계절이다.
시끄럽고 소란스럽던 날들을 잠재우고
침묵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계절이다.
그동안 걸쳤던 얼마쯤의 허세와 위선의 탈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침묵에 귀를 기울 때이다.
소리에 찌든 우리들의 의식을
소리의 뒤안길을 거닐게 함으로써 오염에서 헤어나게 하자.
저 수목들의 빈 가지처럼
허공에 귀를 열어 소리 없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겨울의 빈 들녘처럼 우리들의 의식을 텅 비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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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이나 종교적인 이론은 공허하고 메마르다.
그것은 참된 앎이 아니다.
참된 앎이란 타인에게서 받은 지식이 아니라
내 자신이 몸소 부딪쳐 체험한 것이어야 한다.
다른 무엇을 거쳐 아는 것은 기억이지 앎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안 것을
내가 긁어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 것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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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無學)이란 말이 있다.
전혀 배움이 없거나 배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많이 배웠으면서도 배운 자취가 없음을 가리킴이다.
학문이나 지식을 코에 걸지 말고
지식과잉에서 오는 관념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지식이나 정보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생기 넘치는 삶이 소중하다는 말이다.
지식이 인격과 단절될 때 그 지식인은 위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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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대사는 말한다.
‘마음을 살피는 한 가지 일이 모든 현상을 거두어들인다.’
지식은 기억으로부터 온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움튼다.
안으로 마음의 흐름을 살피는 일, 이것을 일과 삼아 해야 한다.
명상은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이다.
안으로 충만해지려면 맑고 투명한 자신의 내면을
무심히 들여다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송정리역에 오후 5시쯤 도착해서 내리니 다헌 후배가 차를 가지고 나와 기다리고 있다. 산중의 내 산방까지는 1시간을 더 달려야 한다. 산방으로 돌아오는 길의 하늘에 희부연 날빛이 남아 있다. 그런데 하늘에 떠 있는 구름 한 조각을 보고는 놀라고 만다. 그 형태가 영락없는 느낌표다. 뒤에 앉은 아내에게 알려주었지만 피곤해서인지 별로 반응이 없다. 태어난 이후 느낌표 형상의 구름을 본 것은 처음이다. 작고 희미한 형상이 아니라 크고 또렷하다. 이윽고 느낌표 구름의 왼쪽에 초승달이 보인다. 초승달은 어둠 속에서 점점 더 예리해진다. 하늘에 떠 있다기보다 노란 청동의 파편이 박혀 있는 것 같다. 한참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내 가슴에도 비수처럼 꽂힌다. 초승달이 나를 보자마자 소통하자고 와락 몸을 맡긴 것은 아닌지 의아하다.

 

내가 없는 사이에 아랫마을 농부가 대나무와 편백나무로 만든 사립문을 바꿔 달아놓았다. 사립문을 열고 내가 산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산방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 같다. 나를 손님의 위치에 놓고 보니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해서 고마울 뿐이다. 1박 2일 동안 산방을 지켜준 행운이가 컹컹 격하게 짖는다. 정해진 제 시간에 산책을 못했으니 억울했던 모양이다. 행운이가 머리를 내밀면서 쓰다듬어달라고 한다.
내 손에는 아직 금속성의 서울냄새가 묻어 있다. 사립문을 만진 산중사람의 손이 아니다. 손을 바꾼다. 내가 우물물에 손을 씻는 것이 아니라 우물물이 내 손을 찬찬히 씻어준다. 잠시 후에는 벽장 속의 이불이 산방으로 돌아온 나를 부드럽고 자애롭게 덮어줄 터이다. 늘 변함없이 묵묵히 그래왔으니까. 천지간의 모든 유무정물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