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역에 뚝 떨어졌습니다. 집을 나선 시각은 일출보다 30분이나 이른 시간, 멀리까지 쭉 뻗은 넓은 길에도 지나가는 차가 없었습니다. 무궁화 열차로 수원역을 떠난 지 3시간을 넘겨서 오수역에 도착했고, 오수역에 내려 보셨던 분은 알고 계시듯 역 앞은 조용하다 못해 적적했습니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에) 왜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수원이든 오수든 무엇인가에 끌려서 그 곳에 있을 진데, 있게 한 그것은 굵은 인연도 한 가닥의 실마리가 모여진 매듭일 겁니다. 그리고 십이인연도 공(空)이라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면 어느 곳에 있든 내 뜻으로 왔다고 좋아할 것도 아니고, 내 뜻으로 온 것이 아니라며 안타까워하거나 답답하기만 할 것도 아니라 생각하였습니다.

 

뜻하지 않게 홀로 있게 된 외딴 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헤아려봤습니다. 그 결과 외딴 곳으로 볼 것이 아니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되었고, 이어서 오수역 가까이에 있는 볼거리를 둘러보고 난 후에 상행열차를 타는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오늘 운세(?)가 잘 풀리지 않아서 그렇다는 자탄을 벗어나는 것이고, 또 살아가는 것이 원래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넘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역 대합실 앞에 세워진 커다란 임실군 관광안내지도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오수리석불》을 찾아냈습니다. 도시처럼 시내버스가 있으면 멀리까지도 다녀오겠지만, 차편이 여의치 못하여 이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수역과 이어진 가장 넓은 길을 걸으면서, 어느 상점에서 석불 위치를 안내받을 것인가를 궁리하는 잠깐 사이에 동네가 끝나버렸습니다. 그야말로 느린 기차만이 정차하는 자그마한 시골에 왔다는 것을 또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큰길가 끝 참에 문을 연 붕어며 호박을 다려주는 가게에는 주인과 손님처럼 보이는 늙은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오수리석불을 보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되겠습니까?”
“?”
오랜 세월 오수리에서 살고 계시면서도 석불의 위치를 정말 모르실까요?
“옛날부터 세워져있는 돌부처를 모르시나요?”
“돌부처? 돌부처는 저기 보이는 천(川)을 따라 쭉 가면 다리가 나오는데,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나온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오수천의 둑방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오고 가는 차도 없는 길을 혼자 걷는 것은 처음에 먹었던 생각과 다르게 지루하기만 하였습니다. 속도가 빠르면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데, 느리게 걷는 발길이 남은 여름더위와 어울리다 지쳤는지 시간도 느리게 느리게 지나가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더딘 걸음에‘동행과 같이 간다면, 가는 중에만 아니라 멈추고 쉬더라도 간섭을 받는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잃어버린 채 살아다가 잃어버리고 있음을 문득 깨닫는 방법은 무작정 걷는 것이 최선인가 봅니다.

 

다리를 만났습니다. 다리를 만나면 오른쪽 길로 들어서라는 말이 떠올랐으나, 이 다리가 그 다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둘러보아도 사람은커녕 어떠한 인기척도 보이지 않습니다. 관광안내지도에 그려질 정도면 ‘이곳이 당신이 찾는 곳으로 가는 입구입니다’라고 알려주는 입간판이 세워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입간판이 없으니 당연히 ‘더 걸어가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걸었고, 길가 옆 밭에서 일하는 농부를 만났습니다.
“수고하십니다. 오수리석불을 보려면 얼마나 더 걸어야 할까요?”
“찾으시는 곳이 어디인지 가본 적이 없습니다.”
오수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석불을 본적이 없고, 어느 곳인지 모르겠다는 말은 석불을 보고자 걸어온 나를 황당하게 하였습니다. 
 
선지식을 찾으려는 열망으로 먼 길을 걷고 또 걸어 다닌 선재동자가 있었습니다. 물러섬 없이 정진하라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에 따라 먼 길을 걷는 동안에 동자가 만난 사람은 선지식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뜻하지 않게 도둑을 만나기도 했고, 술을 파는 여성도 있었고,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씨부리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동자에게 가르침을 준 것은 선지식만이 아니라, 길에서 만난 허무맹랑한 부랑자의 말도 큰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것들로 모여진 세상이기에, 길을 걸으며 인연지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자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농부의 행동이 참다운 정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고 또 걸었습니다. 

 

뒤쪽에서 오토바이가 오는 소리가 들리기에 길을 물어야겠다며 고개를 돌리니, 칠십 됨직한 분이 오토바이를 멈추고 ‘어디 가느냐?’며 태워주겠다 하십니다. 
오수리석불을 찾아간다는 말에, 들어서는 곳을 지나쳤다면서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보다는 앞으로 더 걸어가서 산자락을 타고 되돌아가면 보인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생로병사를 거듭하듯, 들어설 곳을 알아채지 못하여 또 다시 멀리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 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석불을 못 본채 되돌아갈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오늘은 참으로 운수가 좋은 날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깊어졌습니다. 도(道)를 깨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 .

 

 

거리에 비해 긴 헤맴 끝에 《오수리석불》을 만났습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거대한 불상은 팽이 같은 머리와 얼굴의 이목구비에서 다소 형식화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받침돌을 제외하고는 하나의 돌에 불상의 모든 것을 표현한, 매우 수준 높은 작품이다.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는 머리 뒤의 장식인 광배에 새긴 연꽃과 불꽃무늬가 무척이나 화려하다.
어느 날 산에서 내려오는 큰 바위덩어리를 본 아낙네가 놀라 소리를 지르자 바위는 그 자리에 멈춰 불상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불상을 수호신으로 여겨 불공도 드리고 움막도 지어 정성껏 모신다. 석불이 마을 앞까지 이르렀다면, 마을이 더욱 융성하고 오래도록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 오수리석불 안내문

 

석불이 조성된 곳은 낮은 야산 아래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위치인데, 마을 앞이 아니라서 아쉽다는 주민의 섭섭함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석불을 조성하면서 부처님마다의 각기 다스리는 세계와 정토 등을 바라보시게 하는 것은 사바세계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하는 마음을 담아낸 것입니다. 부처님을 마을 앞에 모시면 눈길이 닿을 수 없는데, 마을사람들은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을 잊었나 봅니다.

 

금동불과 철불을 조성한 설화 대부분이 터무니없지만, 석불이 조성된 경우는 말하기가 더욱 그러해서 재미있습니다. 어쩌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꾸며냄으로써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하려는 의도로 지어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석불이 위치한 뒷산이 낮고 낮은 동산이어서 큰 암석이 구르거나 걸어서 내려올 형편이 안 되는데, 아낙네의 놀란 외침 소리에 그 자리에 멈춰 부처님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어쩌면 오수리석불을 조각한 장인(佛母)은 솜씨 좋은 여성이 아니었는지 싶어졌습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에서 이런저런 엉뚱한 생각을 일구어보았습니다.
신라 말 정권의 혼란으로 중앙에 쏠려있던 권력은 무장들에 의해 여러 지방으로 나뉨이 지속되었고, 고려는 그렇게 생겨난 호족들이 지방에서 나름대로 힘을 갖고 할거하던 시대였습니다. 오수천변을 따라 논과 밭이 넓게 펼쳐져있으니, 분명히 어떤 호족이 임실은 물론 임실과 인접한 지역에서 독립 세력을 갖고 왕처럼 행세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호족도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가 불교를 수용하여 통치기반을 만들고 강력한 국가로 발전한 것을 알기 때문에, 나에게도 그러한 소원을 이루어지게 해주십사하는 기도와 돌아가신 조상들의 명복을 빌고, 민심을 끌어들이기 위해 원당(願堂)으로 절을 짓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태조 왕건의 ‘도선이 정해놓은 곳 이외의 땅에는 절대로 절을 짓지 말 것’이라는 유훈(훈요십조)이 너무나 강력하여 감히 절을 짓지는 못하고, ‘큰 돌이 굴러와 석불이 되었다’고 둘러댔다 생각되었습니다.

 

석불은 어지간히 커 전체 높이가 3미터는 충분히 넘어서고, 부처님도 2.5미터는 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고려 중기에 세웠다 할 경우에도 지금부터 900년 전이 되는데, 석재가 햇빛과 비바람에 풍화되지 않고 현 시대에 조성한 듯 새 것으로 보여서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덩어리의 화강암 암석에 부처님을 부조로 새겼는데, 대좌나 지대석 등의 받침 없이 아랫부분을 맨땅에 묻고 있습니다. 하나의 돌을 마치 갑오징어 뼈의 형태로 다듬어서 앞면 중앙에 부처님을 도드라지게 새겼고, 두광과 신광을 쇠시리로 둘렀습니다. 신광 바깥은 부처님의 신성함을 나타내는 불꽃무늬로 채워졌고, 두광 위는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출현하시는 화불(化佛)을 새겼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뒷면은 어떤 새김도 주지 않은 부드러운 둥근 형태로 마감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앉으시거나 서계시는 대좌는 광배와 함께 부처님의 자리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나무아래 풀방석조차 사자좌와 연화좌로 불리는 만큼, 부처님을 맨 땅에 모시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광배 둘레에 화염문을 화려하게 새겨놓은 솜씨를 보면 분명히 대좌도 만들었을 터이고, 부처님의 아래쪽 또는 근처 어딘가에 둥근 형태나 모난 형태에 연꽃을 위아래로 새긴 멋진 대좌가 묻혀있을 것입니다.

 

육계는 통상 정수리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형태와는 다르게 상투를 묶은 듯 급하게 올렸고, 수행할 당시의 민머리를 나타내고자 하였는지 나발이 아니라 소발의 모습을 새겼습니다.
눈은 완전히 뜨고 있는 상태이고, 눈꼬리는 옆으로 길게 뻗었습니다. 긴 귓불은 길어 어깨위로 내려왔는데, 오른쪽 귓불은 떨어져 나갔습니다.
코는 정확한 이등변삼각형으로 섰는데, 귓불과 마찬가지로 방금 떨어져 나간 듯 생생합니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 중에는 보살행을 닦으실 때 ‘이 세상 모든 것은 덧없으니, 이것이 나고 죽는 법이라네’에 이어지는 ‘나고 죽는 것이 사라지면, 이것이 고요한 열반의 기쁨이네’라는 구절(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을 듣기위해 온 몸을 나찰에게 보시하셨고, 굶어죽게 된 호랑이와 그의 새끼에게 피와 살을 나눠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나찰은 물론이고 동물에게도 하나뿐인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 주시는 분인데, 자손을 갖지 못한다는 이유로 쫓겨날 처지에 든 여인들을 위하여 코쯤은 서슴지 않고 떼어주셨을 거라 생각 들었습니다. 백호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고, 입은 얼굴과 코에 비해 작은 형태이어서 조금 부조화를 이룬 듯싶지만 머리를 받치는 굵은 목과 목에 뚜렷하게 새겨진 삼도가 부조화를 덜어냅니다.

 

부처님의 대의는 통견 방식으로 양쪽 어깨를 모두 가리면서, 앙가슴만 드러낸 채 내려져 명치 부분에서 “V”자 형태로 합해졌습니다. 
대의가 합쳐진 바로 아래에서 수평으로 손을 맞잡았는데도 팔꿈치를 몸통 밖으로 불거짐이 없어서, 어깨에서 흘러내린 몸 선이 밋밋하게 수직으로 내려왔습니다. 대의는 어깨에서부터 소매까지 내려오면서 접혀졌는데, 무게가 없는 얇은 옷(무봉의)을 입고계심을 나타낸 것이지만, 접혀진 주름이 물결치듯 반복적으로 이루어져 율동감이 생겨납니다.

 

손을 덮은 대의가 볼록하니 부풀어 오른 것을 보면, 손을 맞잡은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통상 수인을 봄으로써 어떤 부처님인지와 수행이며 명상·설법 등을 하시는 중인지 등을 알게 하는데, 이 부처님은 두 손을 대의가 덮은 때문에 석가모니부처님인지 아미타부터님인지 아니면 미륵부처님인지를 가름할 수 없었습니다.

 

국가가 계획한 큰 절을 세우거나 큰 불상을 봉안하는 불사인 경우, 해당 분야의 으뜸가는 장인을 초청하여 훌륭한 걸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지방에서의 불사는 그 지역의 장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서 지방 특유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수리석불의 얼굴에서는 세련되지 않아 투박하지만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는데, 임실땅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여기저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평범한 얼굴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되었고 그래서 즐거워졌습니다.

 

 

석불 옆에 작은 공원이 아름답게 꾸며졌는데, 부처님을 모신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해태 석상 두 점이 좌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간 들녘에 새긴 석불과 보살상이 아니고, 사찰을 수호하는 인왕은 물론 동물 석상마저도 좌대에 올려 있습니다.
큰 석불은 조성 당시부터 대좌 위에 모실 요량으로 장인이 우리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 본다는 생각에 맞춰 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맨 땅에, 그것도 하반신을 땅에 묻고 있다면 당연히 더욱 균형감이 없어 보이게 됩니다. 따라서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지정”에 그칠 것이 아니라, 땅 속에 묻혀있는 대좌를 찾아내어 그 위에 모시는 것이 문화재의 가치를 높이는 진정한 방법이 됩니다.
다시 오수리를 찾았을 때는 대좌 위에서 위엄이 더욱 충만하신 부처님을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