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一指)스님은 불교인문주의자로 기억된다. 그는 지난 2002년 여름 4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입적 소식을 접했을 때, 기자로서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던 나는 ‘참 한국불교가 복이 없구나.’라는 탄식을 내뱉었다. 쉽게 만나기 어려운 한 ‘천재적’ 승려의 너무나 안타까운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일지스님은 수국사에 주석하면서 경학회(經學會)라는 단체의 회주를 맡아 출·재가의 도반들과 공부를 했던 스님이다. 언제나 해박한 교학을 바탕으로 한 직관적인 문체로 ‘불교인문주의’라는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지스님은 1974년 백양사에서 서옹스님(고불총림 초대방장)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1980년 해인사 강원을 졸업했다. 스님은 한 때 <선사상>, <월간법회>의 편집 일을 하기도 해 저널리스트의 능력도 갖춘 스님이었다. 가끔 통화나 하던 내가 본격적으로 일지스님을 대면한 시기는 스님이 <현대중공(現代中共)의 불교인식>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제1회 해인학술상을 수상한 직후였다. 나는 그 논문을 읽어가면서 저널리즘의 감각은 물론 인문학적 소향을 충만하게 갖춘 내공 있는 젊은 스님의 출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지스님과 통화를 하며 논문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 논문의 매우 심오하면서도 현실적 감각까지 장착한 탁견에 의지해 한국불교계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중공불교에 대한 장편의 기획기사를 작성했던 기억이 3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일지스님은 1997년 불교경학연구소를 설립해 후학들을 지도하며 많은 경전과 선어록을 번역했다. 그가 남긴 <삼수갑산으로 떠난 부처> <선불교 백문백답> 등 20여권의 저술 가운데, 나의 눈길을 휘어잡은 책은 <붓다·해석·실천>(불일출판사 펴냄)이라는 1991년에 출간된 저술이다. 일지스님이 자필 사인을 해주면서 전해준 이 책은 ‘깨달음과 자비의 심층탐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일지스님의 초기 저술인 이 책을 탐독하며 나는 불교에 대한 개념적 정리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붓다·해석·실천>이라는 평범하지 않은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나온 이 책은 불교사상의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 즉 평범한 불자들이 보다 확대된 불교사상의 이해와 실천원리를 체득하도록 돕겠다는 목적으로 저술된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은 기본적으로 대중을 위한 불교해석학(佛敎解釋學)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당시의 상황과 실천에 필요한 메시지의 재구성을 시도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불교가 각기 다른 시대와 상황에 어떻게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저자의 관심이 책 전체를 관통해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위 글은 이 책의 제목에 왜 ‘실천’이 포함되었는가를 말해준다. 무엇보다도 불교는 체험의 행법(行法)이라는 것이 일지스님의 지론이다. 우리의 삶에서 획득되는 다양한 체험에 대한 반성적인 해석에서 출발하여 더 높은 존재의 법칙을 모색하는 운동이 바로 불교라는 것이다. 일지스님은 “실존적인 안목에서 체득되는 불교이해가 아닌 간접적이고 추상적인 불교이해가 불교를 어렵고 지난(至難)한 관념체계로 만들어 버린다”고 일갈한다. 불교는 명확하게 ‘인간의 삶, 그 전체와 중심을 관통하는 하나의 커다란 프레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지스님은 이 책에서 ‘수도(修道)’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다만 수도가 엄청난 자기소모와 시행착오의 혼란을 겪지 않으려면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과 이해, 또는 사상적 지견을 확립하는 것, 즉 견도(見道)의 중요성에 대한 전제 또한 잊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을 이루는 세 가지 명제 중 첫 번째 명제인 ‘붓다’에 대한 일지스님의 해석도 흥미롭다.

 

 

이 책은 붓다와 붓다의 교설에 대한 해석, 그리고 체험(수행)에 의한 불교적 메시지의 사회적 구현에 대한 한 인문주의자 승려의 도전적, 아니 개척적 글쓰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일지스님이라는 한 천재 승려의 붓다와 불교를 보는 시각과 생각을 들여다보면서 독자들이 자신의 불교이해와 불교실천을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지를 고민하라는 간곡한 메시지이자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떤 것이든 처음 걷는 길을 거칠고 울퉁불퉁하다. 이 책의 내용 역시 일지라는 이름을 가진 한 스님의 선구적 불교읽기이자 불교관의 서술이기에 마냥 가지런하고 매끄럽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런 점이 이 책의 진정한 가치라고 믿는다. 대중들이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인도하기 위한 위대한 연민심이 마치 그림자처럼 이 책에 실린 모든 문장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불교해석의 기본전제’를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불교와 붓다’에 대한 바른 인식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불전과 주요한 불교교리에 대한 실천적 해석을 다룬다. 이 바탕 위에서 저자는 대승의 사상적 특질에 대한 개관과 더불어 대승불교의 인생론, 즉 육바라밀에 대한 실천적 해석을 제시한다.

 

일지스님은 이 책의 말미에 ‘다시 생각하는 불교’라는 챕터를 부록처럼 덧붙이면서 ‘삼계교(三階敎)’를 ‘불교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대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방법론적 예증으로 제시한다. 신행(信行, 540~594)이 주창한 삼계교를 빈곤과 불평등이 인간의 삶을 고통으로 규정하는 조건 속에서 불교는 어떻게 빈곤과 불평등을 극복하고 붓다의 정신을 현실적으로 구현할 것인가라는 문제의 해결을 불교적으로 시도한 가장 극명한 실험으로 제시한 것이다. 오늘날에야 삼계교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척되어 박사논문이 속출하고 있지만, 이 책이 출간될 1991년 경에는 삼계교는 매우 생소한 주제였다. 일지스님은 당시 한국불교에 주어진 시대적 화두인 불교사회화와 사회과학적 불교해석의 지향으로, 폭죽의 불꽃처럼 잠깐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스러져간 중국불교의 한 변방이었던 삼계교를 과감하게 상정했던 것이다.

 

최근 일지스님의 유고를 묶은 책이 새로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 신생출판사에서 펴낸 <불교인문주의자의 경전읽기>라는 제목의 책이다. 이 책의 발간소식이 내 기억 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일지스님을 끌어내주었다. 그 덕분에 참으로 오랜 만에 이 책을 펼쳐보았다. 다시 읽어보아도 역작이다. 만일 일지스님이 그토록 바삐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 있었더라면 오늘의 한국불교 모습은 어땠을까? 지금처럼 ‘한국불교’ 속에 ‘불교’라는 알맹이는 없고 ‘불교문화’라는 포장지만 남은 딱한 형색의 불교신세는 면하지 않았을까! 이 책도 좋고 다른 책도 좋다. 미디어붓다의 독자들께서 일지스님이 남기고 간 저술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한 권쯤 찾아 읽어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