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학종 미얀마 수행기

<이학종의 미얀마 수행기>

이학종 | urubella@naver.com | 2019-06-21 (금) 16:07

19. '적절한 개인'으로 행동하라!
 
꾸띠를 나서는 새벽 발길이 다소 무겁다. 어제 오후 수행의 성과가 부진한 데서 오는 슬럼프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아침부터 아랫배까지 싸늘한 것이 설사 조짐도 느껴진다. 앉음수행 중 또다시 등에 통증이 찾아오면 어쩌나, 위의 통증은 괜찮아졌겠지. 혼침이야 몇 시간을 푹 잤으니 찾아오지 않을 거야…. 등등의 온갖 망상을 부지불식간 지피면서 법당을 향해 걷는다. 수행자에게는 걸음걸이도 사띠의 연장이거늘, 공연한 망상으로 사띠를 놓치고 있다. ‘그래, 일희일비 하지 말자!’ 애써 심호흡을 하고 법당으로 들어섰다.
 

수행자들이 법당에서 앉음수행을 하고 있는 장엄한 모습.
 
 
부처님께 3배를 올리고, 모기 망을 펼쳐 내린 후 평좌 자세를 하고 앉아 심호흡을 했다. 호흡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숨이 가빠져 한 번씩 크게 호흡을 해야 할 때가 있는데, 오늘은 첫 호흡부터 갑갑함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고전하겠는걸.’ 내심 걱정을 하며 두 눈을 내리감고 호흡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등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고 있으나, 어제처럼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무엇인가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말도 있으니, 첫날 호흡을 관찰할 때로 돌아가 천천히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했다. 1분쯤 지나자 호흡이 그런대로 자연스러워졌다. 그렇게 쭉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했다. ‘망상, 너 찾아오면 해라. 즉각 알아차려 물리칠 테니….’ 내심 각오를 단단히 하고 사띠를 챙겼다. 그러나 망상이 찾아오는 순간은 참으로 기기묘묘하다. 주로 망상이 틈입하는 지점은 일어남 사라짐~ 할 때에 ‘사라짐~’에서 ‘일어남’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늘어지는 여운 부분이라고 하는데, 이 지점을 눈을 부라리고 주시했는데도 그만 망상이 스미듯 찾아 들어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런 경험은 위빠사나 수행에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인데, 이를 막으려 ‘그 여운 지점에 앉음, 닿음 등의 터칭 포인트를 두라‘는 기법도 생겨났다.
 
그러나 초심자일 때는 몰라도 언제까지나 그 방법을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오늘 아침 첫 앉음수행에서도 그만 망상을 5~6차례나 허용하고 말았다. 그래도 망상이 일어나는 순간을 곧바로 알아차린 경우가 절반인 3차례였고, 몇 초 정도 망상을 피우다가 아차! 하고 뒤늦게 망상에 놀아나고 있는 나 자신을 알아차린 것이 두어 차례다.
그러나 망상이 일어난 것이 문제가 아니고 망상이 일어난 줄 모른 채 끌려 다니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니, 망상을 즉각 알아채는, 즉 망상의 시간을 줄여나가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렇게 오늘의 새벽정진이 끝났다.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새벽 수행에 대한 스스로의 평점은 ‘그런대로~’다. 만족할 수준은 아니지만 기본은 했다는, 뭐 그런 마음이랄까.
 
3일 전부터 양곤의 밤과 새벽이 몹시 추워졌다. 가사를 걸치면 어깨와 허리 부분이 드러나게 마련이어서 더 추위를 느끼게 된다. 재가수행자들은 내복을 다시 꺼내 입은 이들도 더러 있고, 새벽 죽 공양 시간에 아예 잠바를 걸치고 나온 요기들도 꽤 많이 눈에 띈다.
미얀마 비구들 가운데는 담요 같은 것을 어깨에 걸친 이들도 있고, 가사색깔의 얇은 스웨터를 입은 분들도 눈에 띄었다. 3의1발 정신에는 어긋나지만 요즘처럼 이상저온 현상이 찾아올 때 예외적으로 문제를 삼지 않는다고 한 미얀마 비구가 귀띔한다. 그들과 함께 비구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이분들과 ‘밍글라마!’라며 미얀마어 인사도 나누고, ‘굿모닝’이나 ‘안녕하세요,’와 같은 인사말도 잘 통한다. 영어를 잘 할 줄 모르지만 늘 눈웃음을 치면서 친근감을 느끼는 비구도 있는데, 이 비구는 한국인 비구들에게 미소를 보내며 ‘부디 ‘소타빠냐(수다원과)를 꼭 성취하기 바란다.’며 축원을 해 주신다.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다.
 
공양시간이 되면 재가 수행자들이나 띨라신들이 먼저 식당 안으로 입장해 자비관을 중심으로 한 공양게를 낭송하고, 공양의식이 마무리되면 비구들이 줄지어 입장한다. 노래를 부르지 말라는 계율에 따라 비구들은 노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자비관 등의 암송에는 일체 불참한다. 비구들이 그만큼 계율을 정교하게 지키고 있다는 반증 가운데 하나다.
 

공양실 전면 벽에는 매 공양 때마다 공양을 올린 이의 이름이 적인 전광판이 켜진다.   
 
 
아침 공양과 점심 공양은 늘 보시자가 있는데, 보시자로부터 에인다까 사야도와 창건주 혜송스님이 간단한 보시의식을 받은 후 한 띨라신의 시작을 알리는 게송으로 공양이 시작된다. 공양 분위기는 엄숙하다. 공양이 오기까지의 과정과 응공이 주는 무거움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공양을 하는 자체도 사띠의 연속이니, 간혹 숟가락과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소음처럼 들릴 뿐이다. 그런 소리가 크게 들리면 사띠를 놓친 것이므로 즉각 눈총이 쏟아지게 되어 있다. 며칠 전 내가 체한 것도 이런 무거운 공양 분위기도 한 원인이었다.
사야도는 공양을 마치고 나면 마치 의식처럼 공양실 전면 벽에 설치된 ‘오늘의 보시자’를 알리는 전광판을 스마트폰으로 찍는다. 아마도 사야도 실로 돌아가 보시자의 다나 공덕을 칭송하고 보시자의 행복과 건강, 그리고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염원해주는 별도의 축원을 하시는 모양이다.
 
8시 앉음수행 정진에 들어갔다. 새벽 정진이 썩 신통치 않았던 게 영 마음에 걸린 탓인지 마음이 무겁다. 마음이 가라앉았기 때문인지, 정진시간 내내 망상에 시달렸다. 망상을 막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으로 망상의 기습에 뚫린다. 호날두나 메시, 손흥민 등 월드클래스 공격수에 맥없이 뚫린 수비수들의 마음이 이럴 것이다. 
한 시간 내내 망상에 시달렸다. 도대체 망상을 당할 재간이 보이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등의 통증은 정도를 더 한다. 자세를 바꾸려는 마음을 먼저 일으킨 뒤 허리를 숙였다가 일으키며 등 부위를 스트레칭 해보았지만 그 순간뿐이다. 담마마마까 선원에 들어와서 가장 극심하게 망상으로부터 혼쭐이 난 시간이었다.
그래 이번 시간은 헛심만 쓰고 말았구나! 자책을 하면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했다. 그 순간 땡! 하면서 수행시간이 마무리되었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들림’ 하고 종소리를 알아채고는 다시 호흡으로 돌아가 일어남 사라짐을 알아차림 했다. 조금이 호흡이 가늘어지고 짧아지면서 미세해지는 느낌을 관찰했다. 그리고는 아주 조용한 느낌이 찾아오면서 통증도 미세해지고, 호흡만 느껴지는 상태가 이어졌다. 정진시간이 끝난 뒤라 발걸음 소리, 기침 소리가 더 자주 크게 들려왔지만 알아차림 하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10여 분을 미동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어떤 이상한 장면이 떠오르거나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없이 고요한 상태만 유지될 뿐이었다. 고요한 상태, 그대로를 지켜볼 뿐 나는 다른 어떤 시도나 욕심을 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저 일어남 사라짐을 놓치지 않고 사띠할 뿐!
아,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을 비집고 망상이 찾아들었다. 지체 없이 알아차린 후 눈을 뜨고 부처님께 지극한 3배를 올리고 법당을 빠져나왔다. 법당을 걸어 나오며 발바닥의 감촉을 사띠했다. 꾸띠로 돌아올 때까지 왼발, 오른발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사띠를 유지하려 애를 썼다. 물론 잘 되지는 않았다. 늘 깨어 산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종소리가 울린 뒤 10여 분 동안 이어진 사띠가 아니었다면 오늘 오전 좌선은 낭패를 볼 뻔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하필 종이 울린 뒤에야 망상 없이 사띠가 또렷이 이어지는 것은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 한국관에서의 사야도 법문은 사띠를 챙기는 것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 법문이었다. 늘 들어온 비슷한 내용의 법문이지만, 듣고 또 들어도 큰 각성으로 다가온다. 요지는 이렇다.
 
담마마마까에서 수행하는 모든 수행자들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사띠파타나 위빠사나 수행을 확실하게 실천해야 한다. 자신의 물질과 정신에 일어나는 현상을 정확하게 그대로 놓치지 않고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벗이나 도반들과 대화를 하거나 어울리는 행동을 금해야 한다. 적절한 개인으로 행동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아무리 많은 대중과 함께 정진한다고 해도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놓치지 않고 알아차림 하는 것은 혼자일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부처님 당시에도 제자들은 여럿이 함께 수행하였지만 제각각 적절한 개인으로 행동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곳에 온 수행자들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저녁 늦게 잠드는 시간까지 한 순간도 사띠를 놓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를 위해 적절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오직 자신의 정신과 물질을 알아차리는 데 몰입해야 한다. ‘일체처 일체시에 잊지 않고 사띠를 챙겨라.’
지금 이 순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가장 현저한 움직임을 알아차림 하라. 이것이 ‘몸 관찰’이다. 수행을 하다보면 가지가지 통증들이 찾아온다. 그 느낌들을 관찰하는 것이 ‘느낌 관찰’이다. 순간순간 마음이 욕심을 부리거나 화를 내거나 흐리멍텅하거나 시기질투가 일어나거나 불안하거나 두려움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마음 관찰’이다. 또한 수행하다보면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고, 덥거나 차갑기도 한 감촉들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림 하는 것이 ‘법 관찰’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이 4가지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4가지 중에 그 순간 가장 현저하게 일어나는 현상을 사띠하라. 그렇게 하면 나라고 생각해 왔던 물질과 정신의 본성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생멸법이다.
앉음수행을 할 때에 배가 부풀고 꺼지는 과정부터 관찰하기 시작한다. 일어남 사라짐의 주관찰 대상을 관찰하다 보면 어느 순간 통증이 일어나는데 이 통증이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하게 왔다가도 사라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내가 어떻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성품을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임을 아는 것을 본성품을 안다고 한다. 수행자는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관찰한다. 그 느낌에 객관적으로 몰입해서 관찰하면 나와 상관없이 그들의 성품대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것을 알 때 지혜가 일어난다. 마음관찰이든 몸 관찰이든 느낌관찰이든 현재 이 순간 일어나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면 본성품을 알게 되는 것이다. 현재 이 순간을 관찰하라. 지나간 것이나 오지 않을 것에 연연하지 말라. 그리고 어떤 현상이든 알아차리면 바로 호흡으로 돌아와야 한다. 현재 일어나는 현상을 놓치지 않고 사띠하면 나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게 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본성품이란 무엇인가? 영원하지 않고 변화하는 것의 성품을 알면 생멸을 본다는 의미다. 이런 현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면 영원한 것은 없다는 무상의 지혜가 일어난다. 자신의 정신과 물질을 관찰해서 생멸을 정확하게 보면, 자신의 몸에서 생멸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러한 생멸들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를 ‘고의 지혜’가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생멸이 내가 원하거나 시켜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상관없이 생멸하는 것임을 아는 것, 이것을 ‘무아의 지혜’가 일어난다고 한다. 따라서 생멸을 알면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일어나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사띠하는 수행자가 도과와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자신의 물질과 정신을 관찰해서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이 1단계의 지혜이고, 이 지혜가 성숙하고 무르익어서 체득될 때 도와 과, 열반이 성취된다. 이렇게 첫 번째 수다원의 단계에 이어 더욱 더 성숙하고 무르익을 때마다 차례로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단계가 성취된다. 일단 수다원과에 들면 결코 4악도에 떨어지는 일은 없다. 7생 안에 아라한이 된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4악도를 벗어나고, 궁극적으로는 열반을 얻어서 완전한 행복을 성취하는 것이다.
 
법문이 끝난 후 겨울이면 이곳에 와서 십수 년째 정진 중인 신성조(慎聖祚) 거사(사업가)를 만났다. 신 거사의 꾸띠로 들어가 미얀마에 온 후 처음으로 보이차를 대접 받았다. 신 거사는 자신의 이름이 아리아, 즉 성인(聖)의 자리(祚)라고 위트 있게 소개한다. 참선모임 ‘수선회(修禪會)’ 출신인 이 분 역시 간화선 공부를 하면서 아무래도 아닌 것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중 김진태 교수와의 인연으로 테라와다 불교를 만나게 되었고, 2004년 담마마마까 선원장 에인다까 사야도가 한국에 와서 호두마을에서 수행지도를 할 때부터 공부한 것이 인연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 거사는 이곳의 유력한 후원자이면서 한 때 출가도 했던 오랜 경륜을 가진 수행자였다. 김진태 교수와 교유하면서 교학과 수행을 배우고 수련하는 깊고도 바람직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마침 신 거사와 함께 하는 자리에 김진태 교수도 동참해 저물어가는 한국불교의 새로운 대안은 부처님 불교인 테라와다, 그것도 수행전통이 잘 간직되어 있는 미얀마 불교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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