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망산 신흥사(2)
벽화
절에 가는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좇고자 함이지만, 법당의 측면과 뒷면에 그려진 벽화를 보는 재미도 상당합니다. 그 그림들에는 부처님과 보살님의 가르침과 동화 같은 이야기가 담겨있어 깊은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신흥사 대웅전 외벽에는 여러 사찰의 많이 보았던 부처님 생애와 심우도 등과는 다른 내용의 벽화를 옅은 담녹색 바탕에 그렸습니다.
목탁이 된 게으른 수행자
한 젊은 스님이 수행을 게을리 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어 물고기로 태어났는데, 그것도 모자랐던지 등에 나무가 크게 자라난 탓에 파도가 칠 때마다 고통에 시달렸답니다. 이를 본 큰 스님께서 전생에 자신의 제자였음을 알아채시고 수륙재를 지내준 다음에 그 나무로 목탁을 만들었고, 이를 두드려 나는 소리로 ‘수행자들이 이 일을 기억하여 수행에 매진하게 하였다’는 내용의 벽화입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아 야차로 태어난 귀자모(鬼子母)가 500명의 아들을 낳았으면서도 막내아들을 잃자 부처님을 찾아와 아이를 돌려달라고 애원합니다. 부처님께서“많은 아이를 가지고 있는 네가 하나를 잃고도 그토록 비통해 하면서, 어찌하여 한 명이나 둘 밖에 없는 남의 아이를 잡아먹는가? 그 어머니의 슬픔은 네 슬픔보다 천 배, 만 배나 클 것이다.”라 말하십니다. 자기의 죄를 뉘우친 귀자모는 부처님께 귀의하여 아이를 보호하는 수호신이 되었습니다.
모래 한 줌을 보시한 아소카왕의 공덕
어느 날 부처님께서 탁발을 나가시다가 흙으로 성 놀이를 하던 아이를 만나셨는데, 아이는 창고 속에 쌓은 모래 한 줌을 발우에 넣으며 “보릿가루를 보시합니다”라 합니다.
남들은 한 줌의 흙이라 볼 수 있지만, 이 아이는 자기에게 귀중한 것을 보시한 공덕으로 아소카왕으로 태어나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를 융성시키게 됩니다. 이 벽화는 자신이 아끼고 중하게 여기는 것을 보시하여 얻게 되는 무궁한 공덕을 나타냅니다.
염화미소
석가모니부처님께서 5비구에게 자신이 깨달은 것을 첫 번째로 설법하시는 그림인가 했으나, 순간 오른손에 연꽃 한 송이를 들으셨고 그중 나이가 많은 사람만 혼자 웃고 있는 것을 보아 마하가섭에게 정법안장이 전해졌음을 나타낸 내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취산 야단법석은 많은 사람이 모여 북적이는 통에 부처님께서도 자신의 가르침이 후대로 전해질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흙탕물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세속에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을 나타낸 벽화입니다.
벽화가 그려진 시기나 화사(畫師)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이 시대의 중생들에게 정진과 자비 그리고 보시 등을 일깨워주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대부분의 법당 바깥벽에 이해하기 쉽고, 좋은 내용을 풀어 놓았으면서도 그림에 대한 설명을 본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물론, 불자들에게도 벽화의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는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삼존불
대웅전에는 건물 이름에 걸맞도록 석가모니부처님을 본존불로 모셨고,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불로 봉안하였습니다. 여러 사찰에서 부처님의 지혜와 덕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불로 모시지만, 신흥사는 지장기도 도량임을 나타내고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불로 모셨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과 좌우 협시불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은 여러모로 차이가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이 예나 지금 또 미래에도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는 자비를 베푸신다면 지장보살은 지옥이며 축생이며 인간계 등을 윤회하는 중생을 구제합니다.
화불이 새겨진 화려한 보관을 쓴 관세음보살의 보관 밑에는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선명하게 늘어뜨려졌고, 붙잡고 계신 연잎 위에는 중생의 고통과 목마름을 풀어줄 감로수가 담긴 정병이 놓였습니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은 민머리에 천관을 썼고, 왼손에는 지옥문을 열어 지옥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육환장을, 오른손에는 모든 소원을 풀어줄 수 있는 여의보주를 들었습니다.
나한
석가모니불 오른쪽에는 세 분의 나한상이 봉안되었습니다.
나한상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룬 나한을 모시는 전각을 따로 세우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본존불의 좌우에 몇 분씩 나누어 모시는 것이 통상적이어서 ‘왜 세 분만 모셨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한 쪽 무릎을 올린 채 양 손으로 발끝을 잡거나 발등을 감싸는 자세,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며 한 쪽 팔을 드는 몸짓 등은 영락없는 시골할아버지들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에서 중생들과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고통을 해소시켜 줄 것이라는 친근감이 우러납니다.
희고 긴 눈썹과 기분 좋아 짓는 미소에서 생겨나는 눈꼬리 주름을 보며 ‘단단한 나무를 이렇게나 부드럽게 깎아낼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청의 색상이 바랐거나 때가 묻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나한상을 조성한 시기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싶습니다.
약사여래탱화
나한상 뒤에 걸린 탱화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어 약사여래탱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약사전이 있음에도 약사여래탱화가 대웅전에 걸려있어 ‘웬일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 후 약사전 목조여래좌불 뒤에 걸었으나 천불전으로 조성하면서 이곳으로 옮겼을 것으로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약사여래탱화
약사여래는 연화좌에 오른발을 왼 무릎 위에 올린 반가부좌로 앉으시어 전법륜인을 취하셨는데, 왼손에는 질병과 어리석음을 치료해 주시는 약단지를 들고 계십니다.부처님의 좌우에는 각각 다섯 명씩 열 명의 제자가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였습니다. 약사여래를 지켜주기 위해 갑옷을 입은 용맹스런 사천왕이 동남서북에 그려졌는데, 세 명의 천왕은 자신들의 우측 하단을 내려다보는 것과 다르게 용을 잡은 광목천왕만 우스꽝스럽게도 사시(사팔눈)으로 그려졌습니다.
나무대성인로왕보살
불단 좌측 영가단에는 “나무대성인로왕보살(南無大聖引路王菩薩)”편액이 걸렸고, 그 뒤에는 인로왕보살의 안내에 따라 극락세계로 향하는 많은 영가들의 위패가 놓여 졌습니다.
인로왕보살 현판과 장보고 위패
영가단 가장 앞에는 호화스럽게 꾸민 위패가 놓였는데, “망 해상왕 장보고대사 영가(亡 海上王 張保皐大使 靈駕)”라고 쓰여 있습니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장군의 직책을 수행할 정도로 뛰어난 무장이었고, 신라에서는 완도에 청해진을 세우고 대사가 되어 해적 토벌은 물론 여러 나라와의 무역을 이루어낸 해상왕이었습니다.
신라의 왕위 다툼에 휩쓸려 자객에게 살해됨으로써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장보고, 지금도 완도의 발전을 이끌어주는 장보고의 공로를 기리고자 위패를 모시는 것은 완도에 있는 사찰로서는 응당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청동 용두
대웅전 어간에 올린 대들보 머리를 용머리로 조각하여 대웅전이 사바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건너가는 배임을 나타내지만, 신흥사는 공포를 익공으로 장식하면서 보머리도 운공으로 지었습니다. 보궁형으로 지은 닫집에는 청룡과 황룡 한 쌍을 두었고, 허주에 용두로 장식하였지만 화려함을 절제한 검소함이 엿보입니다.
반야용선(통도사 극락전 외벽화)
용이 끄는 배에는 중생이 가득 탔고, 배 앞머리에서 인로왕보살이 선장이 되어 극락으로 인도하는 모습이, 뒤에는 이들을 보호하는 지장보살이 그려졌습니다.(인터넷에서 검색한 사진입니다)
지장보살을 석가모니불의 협시불로 모셨고 영가단에 인로왕보살 편액을 걸었으니, 대웅전 바깥벽에 반야용선도를 그렸다면 신흥사가 “지장기도도량”임을 쉽게 알 수 있으리라는 아쉬움이 생겼습니다.
대웅전
그러나 대웅전 참배를 마치고 나와서 어간문 앞 기단에 놓인 청동의 용두를 보는 순간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보머리를 용두로 꾸미지 않았기 때문에 ‘대웅전을 반야용선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 대웅전 기단에 용두를 놓음으로써 기단 위의 모든 것을 반야용선으로 삼았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웅전 계단을 오르는 순간, 그 순간에 극락정토로 건너가는 배를 타는 것입니다. 청동으로 만든 용두를 놓아서 ‘신흥사를 찾은 불자들을 부처님의 나라로 보내주겠다’는 착상은 참으로 멋들어집니다.
적은 인구가 살고 있는 읍이지만, 군청이 소재하였기에 도심이랄 수 있습니다. 그 도심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신흥사가 있습니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았음에도 속세의 번거로움을 벗어버린 세상에 들어온 느낌을 갖게 되는 절입니다. 그 신흥사에 가시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득하여, 누구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곳으로 가는 반야용선에 오른 것이 됩니다.
완도에 가시면 꼭 신흥사에 둘러서 반야용선을 타시고, 넘어지면 코 닿을 곳에는 펼쳐진 남해 바다와 다도해도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