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순례자나 나그네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죽음이 다가왔을 때 형제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난과 겸손을 보다 온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형제들의 모든 집과 움막은 반드시 흙과 나무로만 지어야 한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수도자가 사는 집은 흙과 나무로 지으면 자연히 검소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수도원을 그들의 소유로 하지 말고 그 속에서 순례자나 나그네처럼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진짜 우리가 살 줄 안다면 순례자나 나그네처럼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노래도 있듯이 순례자나 나그네는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행의 목적에만 충실하며 그날그날 배우고 나누며 살아갑니다.
옛 사람들은 어렵고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길 줄 알았습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우리 선인들의 낙천적인 생활태도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우리 핏속에는 그런 낙천적인 DNA가 흐르고 있습니다. 어려운 때라고 찌푸리고 걱정하는 태도만 가지고는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낙관적인 생활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밤낮 우는 소리하는 집안은 울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똑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잠도 잘 자고 낙관적으로 웃는 사람은 웃을 수 있게 삶이 열립니다. 명상 서적을 읽어 보면 우주의 기운은 자력과 같아서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온다고 합니다.
우리가 밝은 마음을 지니고 낙관적으로 밝게 살면 밝은 기운이 우리에게 몰려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생활태도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집안이든지 근심 걱정은 다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저 사람은 고민거리가 없을 것 같아도 각자 걱정과 근심이 있습니다. 그게 각자 인생의 무게이고 빛깔이고 숙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빈손으로 온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난한들 손해 본 것이 아닙니다. 또 살 만큼 살다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 한 물건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재산이 많고 부유한들 죽음 앞에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주의 선물, 하느님의 선물을 내가 잠시 맡아서 관리할 뿐입니다. 관리를 잘하면 그 기간이 연장이 되고 관리를 잘못하면 당장 회수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살 만큼 살다가 인연이 다해서 저승사자가 찾아올 때나 하느님께서 부를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유한들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떤 지혜가 생깁니다.
이런 옛 시조가 있습니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놓고 보리라.

 

이런 시조야말로 청빈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입니다. 문명은 사람을 병들게 하지만 자연은 사람을 거듭나게 합니다. 자연과 더불어 살 때 사람은 시들지 않고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벽이 무너져 남북이 트이고
 추녀가 성글어 하늘이 가깝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게
 바람을 맞이하고 달을 먼저 본다네.

 

화엄경의 이치를 통달했던 환성 지안선사의 게송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청빈은 단순한 가난이 아니고 삶의 운치입니다. 옛 사람들은 가난을 풍류로까지 승화시켰습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오르막길이 있고 내리막길도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인간의 길이고 정상에 이르는 길입니다. 내리막길은 쉽고 편리하지만 그 길은 짐승의 길이고 구렁으로 떨어지는 길입니다.
우리는 오르막길을 통해서 뭔가 뻐근한 삶의 저항도 느끼고 창의성도 개발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삶의 의지도 다지고 우리는 거듭 태어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격지 않고는 거듭 태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안이하게 흥청거리면서 과시하고 과소비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세상이 달라지기를 바란다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달라져야 합니다.

 

사족의 말 
                     
1998년 2월 24일 서울 명동성당 강론하는 곳에는 가톨릭 신부가 아닌 승복을 입은 분이 서 있었다.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그것은 1997년 12월 14일 김수환 추기경이 길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하여 축사해 주신 답례의 성격으로 명동성당이 세워진 지 백년을 기념하고자 마련한 강론 자리였다. 스님의 사상과 철학을 듣기 위해 성당을 가득 채운 신부와 수녀, 가톨릭 신도들이 귀를 기울였다. 강론주제는 ‘경제위기 극복과 청빈의 삶’이었다.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연 뒤 법문을 시작했다.

 

 “...이런 큰 성당에서 말하게 된 기회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저를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신 명동 성당 측에 감사 말씀드리고, 성당이 축성된 지 올해가 백 돌 되는 해에 저와 같은 사람을 이 자리에 서게 해주신 천주님의 뜻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성당에 자리한 청중들 모두가 성호를 그으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명동성당이 세워진 지 백년 만에 처음 있는 종교 간의 화합을 상징하는 진풍경이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북통일이 된 뒤, 또 하나 해결할 문제가 있다면 무엇일까? 하고 상념에 잠겨 본 적이 있다. 남북의 이념갈등은 서서히 사라지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남쪽의 남남갈등도 봄볕에 눈 녹듯 할 것이다. 그러나 교조와 교리가 다른 종교 간의 갈등은 숙제로 남을  것 같다. 땅은 통일이 됐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종교 아집으로 편 가르기를 한다면 그것도 큰 일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종교 간에 대화하고 화합하는 실마리를 찾아 미리 해결해 놓지 않으면 큰 대가를 치를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김수환 추기경님과 법정스님이 왜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는지 오늘 우리들은, 특히 종교인들은 화두로 삼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