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부평동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무려 55년이나 흘렀습니다. 너무나 오래 전 일이라 정확하게 몇 번인지 모르겠으나 근처에 있는 「약사사」로 여러 차례 소풍을 갔었습니다. 넉넉잡아 한 시간은 걸었을 것입니다.
동네 이쪽저쪽마다 미군부대가 자리 잡았고 부대 철조망 옆에 난 길로 학교를 오갔으니, 소풍갈만한 곳으로 약사사는 제격이었습니다. 흐릿한 기억을 되살리면 당시 약사사는 인가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곳으로 학교로서는 다른 곳을 선택하기가 어려웠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랬던 약사사 주변은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뀌는 세월이 흐르면서 일주문 바로 아래까지 주택이 치고 올라와 가득해졌습니다.

 

어렸을 때 보았던 절을 찾으면서 ‘이렇게나 강산이 변했는데, 나는 어떻게 변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매일매일 겉모습이 달라지듯 속 모습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50여 년 전 천진무구하던 마음이 오욕에 빠져 갈 곳을 못 찾고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는 겁니다.
약사사 일주문을 들어서며 덕지덕지 붙어있는 더러운 때를 벗겨내겠다는 마음을 냅니다. 

 

 

 

약사사가 위치한 만월산은 해발 187m의 낮은 산입니다. 우리나라 표고를 재는 “해발”이 인천만에 드나드는 바닷물 높이의 평균치에서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바닷가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만월산은 산책하기에 알맞은 높이입니다. 약사사를 찾은 날도 많은 분들이 산책을 마치고 내려오고 계셨습니다.
 
안내판에 의하면 약사사는 고려 건국 때 「개국사」로 창건되었고, 조선 성종 재위시 배불정책으로 패쇄 되었습니다. 1900년에 이르러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하시던 보월스님께서 ‘중생들의 괴로움의 근본인 무명업식을 깨우쳐 주어야겠다’는 큰 서원으로 동방만월세계 약사유리광여래 부처님(東方滿月世界藥師琉璃光佛)을 모시고 약사암이라 명칭하였고, 한능해 스님께서 거듭 중창하시어 오늘의 약사사에 이르렀다 합니다.

 

 

일주문을 지나 처음 만나는 전각입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닐 때만해도 약사사와 가까운 주안에는 큰 염전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염전은 1907년에 개발된 주안염전입니다. 계속된 간척사업으로 지금은 바닷가가 멀어졌지만 1900년대에는 이곳도 바다와 인접한 곳이었으니, 어업에 종사하는 가족들의 풍어 기원과 조난사고가 없기를 기원하는 기도처로 많이 찾았을 듯싶습니다.
용왕은 불법을 보호하는 호법신이지만, 민간에서도 바다와 강은 물론 우물이든 산골 샘물터이든 물이 있는 곳에는 용왕이 물을 관리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물짐승을 다스린다고 믿어왔습니다. 이리하여 조상들은 약수터를 깨끗하게 관리해오며 식수로 사용하였는데, 용궁각 바로 옆에도 시원한 약수가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용궁각에는 관음전에 들어서서 보게 되는 ‘관세음보살도’를 연상시키는 탱화가 걸렸습니다. 관음전에서 우리가 보는 탱화는 부처님이 새겨진 화려한 보관을 쓴 관세음보살이 중앙에 큰 모습으로 좌정하고 계시고, 양쪽에 용왕과 선재동자가 협시하는 자세로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약사사 용궁각에 걸린 탱화는 중앙에 용왕이 크게 그려졌고, 오른편에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관세음보살이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용왕은 인간 형상을 지닌 제왕의 모습에 통천관을 썼으나, 비를 흠뻑 맞은 짐승의 털처럼 이리저리 뭉쳐진 모습의 수염이 마구 뻗쳤습니다.

 

 

 

재미난 것은 통천관 위에 깊은 산에서 나는 귀한 영지버섯이 올려져있고, 떨어지지 않도록 붉은 띠로 묶었습니다. 용왕의 장수를 기원하며 공양 올렸음을 나타낸 것인지, 용궁각을 찾은 불자들에게 무병장수를 베풀겠다는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용왕의 옆에는 권속인 용녀와 문서를 상주하는 판관이 시립하였고, 동자는 무릎을 꿇고 향이 피어나는 향로를 받쳐 들은 채 관세음보살을 영접하고 있습니다. 선지식을 찾아다니는 선재동자는 관세음보살님이 오시는 것을 어찌 알았는지, 빗은 머리를 단정하게 두 갈래의 꼭지로 묶고 보살님이 오시는 방향을 향해 합장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든 중생의 어려움을 구제하여주시는 관세음보살님은 상서로운 구름을 타고 내려오시는데, 언제나 그러하시듯 지혜를 상징하는 연꽃을 드셨습니다.

 

중국 4대 기서라 일컬어지는 서유기에는 손오공이 용궁의 귀한 보물을 강탈하고, 궁지에 빠질 때마다 용궁을 찾아 여러 용왕을 윽박지르면서 아랫사람처럼 부리고, 비를 내리게 하거나 용궁의 병력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등의 행위로 용왕을 약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흥미 위주의 소설일 뿐, 많은 불경에는 용왕이 부처님과 불법 그리고 불자들을 지켜주는 신중입니다. 

 

용왕은 많은 친척이 있고, 그 용왕들 각각이 맡은 직책에 따라서 바다뿐만 아니라 강과 연못 그리고 우물 등 여러 곳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약사사 용왕은 바다를 다스리는 직책을 지녔음을 나타냈는데, 우측 하단에 산호가 우거진 곳을 아귀며 오징어, 고래, 상어 등이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용궁이 바다 속에 지어졌음에도 용왕이 앉아있는 뒤편에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에 붉은 해가 떠오르는 그림이 걸려있는 것입니다. 거친 파도를 다스리는 권력자임을 나타냈을까요? 
탱화가 어떻든 이제까지 용궁각을 찾은 많은 불자들이 용왕의 위신력으로 보호를 받았고, 이후로도 기도하는 이들의 몸과 마음을 복되고 편하게 할 것입니다.
 
극락전

 

우리 모두가 부처님이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되려면 자신 속의 깊숙이 감춰져 있는 불성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처럼 어려운 것이 있을까요? 석가모니부처님께서도 수많은 겁의 거듭된 윤회를 통하여 한 마음으로 수행을 쌓아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렇게나 부처님 되기가 어려운 것을 아시는 법장비구께서 저 같은 범부를 위해 48개의 서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대원을 세우셨습니다. 그런 후 오랜 수행 끝에 그 서원을 이루시고 부처가 되셨고, 지금도 서방정토를 주재하시며 설법을 하고 계십니다.

 

 

 

고맙게도 이를 잊지 말고 수행하여 성불하라는 뜻으로 약사사는 나옹선사의 유명한 게송을 극락전의 주련으로 삼았습니다.

 

아미타불재하방  (阿彌陀佛在何方)  
착득심두절막망  (着得心頭切莫忘)  
염도염궁무념처  (念到念窮無念處)  
육문상방자금광  (六門常放紫金光)  

 

아미타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아미타부처님의 마음을 잊지 말아라.
생각하고 생각하여 깊은 뜻 끄트머리에 이르게 될 때
금빛이 찬란한 부처님이 될 것이니.

 

아미타부처님의 자비심은 바다같이 넓습니다.
미혹에 빠져 살던 중생이 죽어가면서 거룩한 이름을 한 번만 부르더라도 아미타부처님은 허투루 계시지 않고, 탐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십악을 소멸시켜 주십니다. 이러할진데 때때로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덕을 찬양한다면 그 공덕이 어마어마할 것이니, 어찌 극락정토에 태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