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시작을 미얀마에서 맞았다. 사띠파타나 위빠사나 수행을 위해 양곤의 한 수행센터에서 한 달 간 머물렀다. 수행에 큰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붓다가 걸었던 옛길을 보았다. 그 길이 사람의 몸을 받고 태어나 붓다의 가르침을 만난 이 소중한 생에 서둘러 가야할 분명한 길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수행을 마치고 귀국해 나의 서재를 찬찬히 돌아보았다. 많은 대승경전 해설서와 선 관련 책들이 낯설게 다가왔다. 사실 이런 느낌은 미얀마를 다녀온 많은 불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낯설음을 조금은 다르게 해석한다. 테라와다 수행센터에서 보고 배운 것은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며 모든 불자들이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 믿지만, 여기에 대승(大乘)의 광대함과 선(禪)의 역동성이 함께 한다면 더 없이 좋을 것이라는 확신이라고나 할까.

 

귀국 무렵, 한국에 돌아가면 꼭 읽어봐야겠다는 책이 있었다. 내용도 어렵고, 용어도 낯설어 아주 오래 전에 읽어가다가 포기하고 책꽂이에 꽂아두었던 그 책은 정화스님이 지은 ‘유식(唯識) 30송 해설서’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장경각, 1996)이다.

 

위빠사나 수행 경험이 다시금 그 가치를 일깨워준 책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는 역시 명저 중의 명저였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왠지 베일에 가려졌던 정화스님을 23년 만에 책을 통해 친견한 요 며칠은 ‘환희 충만’ 그 자체였다. 오래 전,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의 난해함은 오랜 세월동안 알게 모르게 쌓여온 알음알이와 위빠사나 수행체험 덕에 제법 완화(?)되어 있었다.

 

이 책은 삶의 변화란 곧 앎이라고 말하는, 그리고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자는 유가 수행자들의 가르침 가운데 세친보살의 ‘유식 30송’을 풀이한 불서다. 이 책은 한문으로 된 유식 30송을 풀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불가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사실 유식은 난해한 영역이다. 유식관련 이런저런 책을 읽고 또 읽어도 책을 덮고 나면 다시 아리송해지는 것이 유식이다.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분명히 알았다 싶었다가도 다시 혼돈에 빠지기를 반복하게 하는 유식. 이 난해한 영역을 정화스님 특유의 솔직한 어법으로 올올이 풀어낸 책이 바로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이다. 이 책을 유식관련 해설서 가운데 백미로 꼽는다 해도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유식의 근본은 연기법으로 ‘관계 속의 삶’이다. 유가 수행자들은 이것을 ‘앎의 관계’라고 불렀다. 고정된 관계가 아니라 ‘관계 속의 변화’가 앎으로 나타난 것이며, 나아가 ‘앎이 곧 삶’이라고 보았다. 앎은 삶의 진솔한 모습이자 연기이며 열린 세계라는 것이다. 열린 세계는 연기의 실상이고, 실상은 매순간 변화 속에 있으므로 순간순간 틀이 바뀐다. 이렇게 매 순간 유사한 바뀜의 흐름을 고정된 틀로 착각하는 것이 범부요, 중생이다.

 

정화스님은 이 책에서 참된 삶, 고요하고 맑고 고통 없는 삶을 살기 위한 과정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없애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과 느낌 등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괴로움이라고 하는 실체가 무엇인가. 기쁨이라고 하는 실체가 무엇인가’하고 그 근거를 들여다보는 수행을 관(觀)이라고 합니다. 들여다볼 곳은 네 곳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몸[身]의 흐름입니다. 두 번째는 느낌[受]의 흐름입니다. 세 번째는 기뻐하고, 슬퍼하고, 믿고, 뉘우치는 등등의 마음[心]의 흐름입니다. 네 번째는 ‘이것이다, 저것이다, 이런 견해다’ 하는 등등의 고정화된 인식과 논리의 근거[法}입니다. 이 넷을 잘 봐서 그 특성을 알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아와 법의 분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정화스님은 중생들이 함께 더불어 사는 생명의 장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삶에 모순이 생겨난다고 역설한다. 정화스님의 설명을 살펴보자.
“붉은 장미라고 하지만, 붉음은 장미 속에 없습니다. 나의 눈에도 없으며 햇빛 속에도 없습니다. 눈과 장미와 햇빛 등의 관계가 붉음이라는 장면을 연출할 뿐입니다. 이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데, ‘하나하나의 모습이 어우러진 장면이 바로 삶이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매순간 만남의 장면 그대로 생명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관계를 알지 못한 채 붉은 색만을 절대화시킵니다.”
그렇다. 실제로 온갖 사물들은 따로따로 특성화될 수 없는데도 우리는 그것들을 특성화시킨다. 특성화시키므로 사물들이 변별되어 존재하게 된다. 인식관계 속에서 주관과 객관을 분리시켜 떼어 내고,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도 인위적으로 떼어 내어 하나하나를 독립된 실체로 본다. 이런 모순된 삶에 대해 정화스님은 절규하듯 묻는다. ‘하나하나를 떼어낼 수 있습니까? 붉은 꽃에 흐르는 생명의 흐름을 떼어 낼 수 있습니까? 그 가운데 인식하고 있는 나를 떼어놓을 수 있습니까?’라고. 

 

이 책은 한문으로 된 ‘유식 30송’을 풀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불가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지구상에 많은 성인이 나타났으나 그 성인에 의해서 인류 전체가 동시에 편안해진 시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분들에 의해 인류가 동시에 구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 생각이 일어난 순간에, 자기 자신을 열린 마음으로 바꾸어 가는 노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성인들의 외연(外緣)은 열린 만큼 이해되고 이해된 만큼 같이한다. ‘자기 생각을 관찰하는 힘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만 삶의 문제가 해결된다.”
어떤 성인도 자신의 가르침으로 인류 전체를 동시에 편안하게 만들지 못했다고 밝힘으로써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어떤 가르침이나 선언이 아니라는 단언이다. 정화스님은 ‘세상을 바꾸는 것은 나 하나의 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나와 너와 우리가 하나 되는 힘이 될 때 비로소 이뤄지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나의 페친이기도 한 석정원스님은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이 책을 만난 감동과 소회를 이렇게 밝혀 눈길을 끌었다.
“일주일 이상의 침체모드 및 방일모드의 끝자락에서 이 책을 만났다. 2년에 걸쳐 유식관련 과목을 듣고, 이번 학기 내내 특별히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던 유식관련 의문들이 안개 걷히듯 밝아지는 느낌과 더불어 유식을 이리 생동감 있게 펼쳐 보이시는 (정화)스님에 대한 놀라움과 찬탄으로 책을 (법문을) 이틀 만에 집중 일독했다. 이제는 스님께서 강조하신 것들을 실행하는 것만이 내게 남은 과제이다. 조만간 이 법문을 다시 펼쳐보면서 내가 어느 정도 연기실상의 세계를 실천해가고 있는지 점검하리라.”

 

생각을 쉬어주는 것, 일어나는 생각들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 그리고 만남이 앎이고 앎이 곧 삶인 것을 바로 아는 것, 그것이 바른 삶을 살아내는 길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저자 정화스님이 서문 끝머리에 붙인, 시 같기도 하고 법문 같기도 한 한편의 운문을 덧붙이는 것으로 나의 첫 번째 ‘불교명저 산책’을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