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학종 미얀마 수행기
<이학종의 미얀마 수행기 >
이학종 urubella@naver.com 2019-02-15 (금) 14:47
1. 은둔의 나라, 빗장을 두드리다
내게 미얀마는 유독 은둔의 나라로 남아 있었다. 30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불교 기자로 살았지만 이상하게도 미얀마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기자 일을 접고 귀촌을 단행한 뒤에야 미얀마는 내게로 다가왔다. 벼랑 끝에 선 한국불교가 지향해야할 방향을 고민하면서 자연스럽게 테라와다에 관심이 높아지던 중, 미얀마 방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미얀마 성지를 순례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센터에서 30일 동안 오로지 수행만 하는 일정이었기에 나는 주저 없이 미얀마 행을 결심했다. 부처님 당시의 불교전통이 온전하게 전해지는 나라, 한국불교는 물론 세계의 불교가 향해야할 미래, 즉 ‘불교의 오래된 미래’가 미얀마에 전해 내려오는 수행불교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미얀마는 늘 시간에 쫓기며 겉핥기식 취재를 해야 하는 기자의 신분으로 살펴볼 대상이 아니라는 부처님의 뜻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미얀마의 경이롭고 찬란한 탑과 사원을 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미얀마 불교의 옷깃 속을 파고들어가 그 속살부터 보고 느낄 수 있는 게 더 없이 중요한 일이 아닌가. 아울러 머리로만 불교를 해왔던 한계를 수행전통이 살아 숨 쉬는 미얀마 상가(Sangha))의 일원이 되어 몸과 마음으로 흠뻑 젖어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번 미얀마 행이 내 삶의 일대전환을 가져다줄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어떤 영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비행기에서 바라본 미얀마 양곤 시의 풍경
미얀마는 내게도 먼 나라였듯이,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은둔의 나라였다. 동남아시아 국가 가운데 태국보다도 넓은 영토를 가졌지만, 1962년 네윈 장군에게 모든 권한이 접수되면서 미얀마는 시나브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악몽으로 남아 있는 군부독재가 장기간 이어지면서 미얀마는 정치적으로 매우 미개한 나라로 인식되었다. 특히 불교전통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지 않은 서구인들에게 미얀마는 오랜 시간동안 독재와 굴종의 망령이 횡행하는, 기피 또는 혐오의 대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구인들에게, 아닌 세상 사람들에게 미얀마 사람들의 삶을 관통하는 부처님이나 황금으로 장엄한 탑과 사원들, 그리고 가장 존경받는 수십 만 비구들은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관심을 둘 대상은커녕 조롱과 무시의 대상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미얀마는 당연히 세계사적 담론에 거의 등장한 적이 없었고, 경제의 수준도 주변 나라들에 비해 수십 년은 족히 뒤쳐진 보잘것없는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미얀마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나라다.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고유의 문화와 종교, 전통을 온전히 보존해온 저력의 나라임을 결코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혹은 민주주의 등의 세계가 공유하는 기준으로 판단할 때 미얀마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후진국의 국민들이겠지만, 자본의 성장이 절대선이라는 고정관념을 뿌리친 눈으로 본다면 그들이야말로 부처님과 뿌리 깊은 불교 전통에 바탕한 ‘평화와 평정’의 값진 가치를 누리며 사는 행복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미얀마 사람들은 매우 종교적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종교적이라는 것은 불교적이라는 것과 등치된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베풀 줄 안다. 베풀고 남들과 함께 나눠야 할 필요성을 일상생활 속에서 늘 절감하며 살아간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시련과 불행, 억압을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조차도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고 꿋꿋하게 살아가며, 몇 푼이라도 주머니에 들어오면 곧바로 축제를 열거나 사원을 찾아 보시한다. ‘왜 돈을 버느냐?’고 물으면 ‘다나(기부, 보시)하기 위해서’라고 답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한 여행 작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볼 수 있는 나라’로 미얀마를 꼽았다. 그는 자유롭지 않은 정치 상황과 그로 인해 가난한 생활이 계속되는데도 욕심이 없는 듯, 마음을 비운 듯 그저 웃으며 지내는 미얀마 사람들의 믿기지 않는 평정을,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떠올리곤 한다고 털어놨다.
여행 작가의 말이 아니더라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뿌리내린 선량한 불교는 미얀마와 미얀마 사람들에게 아주 특별한 평화와 평정을 정착시켰다. 가난과 숨 막히는 압박마저 뒷걸음치게 하는 이 위대한 고요와 평화로움,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시원한 행복은 사원에서, 탑에서, 아니 일상에서 황금빛 파동을 타고 이 땅에서 연꽃 같은 미소로 만개하고 있었다.
2018년의 마지막 날, 하노이를 거쳐 양곤 공항에 내리면서 만난 미얀마 사람들에게서 나는 붓다의 시대에나 있었을법한 맑디맑은 표정들과 마주쳤다. 부처님을 항상 가까이 섬기고, 그분의 품안에서 산다는 환희 충만한 미소를 타고 습관처럼 배어나오는 저 담백함이라니! 순간 나는 말법 세상을 탈출하여 그렇게도 동경하고 궁금했던 정법 세상의 문을 막 열고 들어온 기쁨을 만끽했다. 그들의 순박한 얼굴과 맑고 선한 미소에서 미얀마 사람들이 일구고 가꿔온 작지만 위대한 기적들, 그 놀라운 결실들을 목도할 수 있었다.
나의 목적지는 미얀마의 구(舊) 수도 양곤 외곽에 있는 위빠사나 수행처 ‘담마마마까(Dhamma Mar maka, ‘담마와 함께’라는 의미) 고려사 국제명상센터’(이하 담마마마까). 이곳에서 나는 2019년 1월 30일까지 한 달 동안 수행자로 살아갈 것이다. 취재를 위해 외국행을 여러 차례 했었지만 이번처럼 수행자가 되어 오롯이 수행체험을 하기 위한 여정은 처음이다.
오랜 세월 동안 위빠사나 수행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주었던 도이 법사와 부처님 교설의 분명하고도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라도 미얀마 수행센터에서의 수행체험이 필수라는 소신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 온 김진태 전 동국대 교수가 이끄는 이번 여정에는 테라와다 수행에 관심을 가진 한국인 불자들이 10여 명이 함께 했다. 성지순례가 아닌 오로지 수행을 하기 위한 여정이어서 그런지, 우리 일행의 표정에는 긴장이 흘렀다. 마치 군대에 입대하러 가는 심정 같다는 조크가 일행 중에서 터져 나오기도 했다.
열두 시간이 넘는 긴 여정 끝에 양곤 공항에 도착, 미얀마 스님 두 분의 마중을 받으며 담마마마까를 향하여 소형버스를 타고 달렸다. 후끈한 기온과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광경은 인도의 그것과 비슷했다. 30여 분을 달려 담마마마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곳 시간으로 오후 7시를 훌쩍 넘긴 뒤였다.
담마마마까 고려사 국제명상센터 초대원장 에인다까 사야도.
담마마마까 건립을 주도한 창건주 혜송스님의 통역으로 이곳의 최고스승이자 초대원장인 에인다까 사야도와 첫 인사를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사야도는 교학과 수행에 정통한 고승으로 제자를 거느릴 충분한 실력과 신망을 갖춘 비구를 지칭하는 말이다. 에인다까 사야도는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며 부드러운 미소와 자애로운 표정으로 한국에서 온 수행자 일행을 환영했다. 그리고는 ‘맛있는 음식을 보고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것과 그 음식을 직접 맛보는 것’의 차이를 비유로 들며 ‘불교를 머리로 하는 것과 수행으로 하는 것’의 차이를 설명했다. 에인다까 사야도는 “여러분에게 사띠파타나 위빠사나 수행의 방법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은 나와 혜송스님의 책임이지만, 가르쳐준 대로 수행에 집중하는 것, 사띠(알아차림)를 놓치지 않는 것, 시시각각 변하는 무상의 지혜를 알아차리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사띠파타나 위빠사나 수행법은 신수심법, 즉 사념처를 수행주제로 관찰하는, 부처님께서 제시한 수행법이다.
담마마마까의 공식 일정은 오전 4시부터 시작된다. 서둘러 취침에 들어가야 할 준비를 할 시간이므로 사야도와의 인사는 간단하게 마칠 수밖에 없었다. ‘내일 새벽에 보자’는 인사를 나누며 우리 일행은 배정받은 각자의 꾸띠(수행자들이 머무는 숙소)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담마마마까의 꾸띠는 1인 1실 기준으로 화장실과 작은 주방이 달린, 미얀마 수행센터들 가운데에서는 최고의 시설로 정평이 나 있다. 이는 수행자들이 숙소 문제로 불편을 겪지 않고 오직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사원을 설계하고 조성한 혜송스님의 배려 덕이다.
짊을 풀어 간단하게 정리를 마친 후, 긴 여정의 피로를 씻어내기 위해 샤워를 했다. 미얀마 수행센터에서의 첫 밤은 이렇게 저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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