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고익진 박사(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의 저서 『현대한국불교의 방향』을 요약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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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신(所信)

학문하는 사람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마음가짐은 자기 연구에 대한 소신이다. 소신이 없을 때 기존 학설에 대한 비판이나 새로운 창의는 발휘할 수가 없을 것이다.

고려말의 보환(普幻)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스님이다. 그러나 그이 능엄경에 대한 연구는 대단했던 것으로 ‘능엄경환해산보기(楞嚴經環解刪補記)’라는 저술이 현존하고 있다. 송의 고승 계환(戒環)이 지은 능엄경요해(楞嚴經要解)에 대해서 그의 잘못을 바로 잡고 자기의 독자적인 견해를 보태 산보(刪補)한 책이다.

계환의 주석이라면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있어서 아무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권위였다. 그의 능엄경에 대한 ‘요해’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법화경에 대한 주석도 당시의 고려에 크게 유통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주석서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정음(正音)으로 번역되어 간경도감에서 간행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한 계환의 능엄경에 대해서 한낱 무명의 납자였던 보환은 감히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보환의 이러한 능엄경환해산보기(楞嚴經環解刪補記)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책 끝에 실려 있는 그의 발원무과 발문(跋文)이다. 그는 먼저 발원문에서 다음과 같은 뜻을 표현하고 있다.

“삼보자존(三寶慈尊)은 굽어 살펴 주옵소서. 제자 보환은 성심으로 참회하여 서원합니다, 후세에도 다시 출가하여 불법을 닦아 이 능엄경을 연구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깨친 깊은 뜻으로 그 경에 주석하여 서명을 능엄정의(楞嚴正義)라고 하고 다른 주석가들의 풀이에 의하지 않고 순일 무잡하게 정법(正法)을 유통하겠습니다.”

그리고 발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적어 넣고 있다.
“후세에 내가 다시 원력(願力)을 타고 태어나서 이 글(自著)을 만나 보게 될 것을 생각하여 책으로 엮어 이름을 ‘산보기’라 하고 발원문을 함께 책 끝에 첨부 합니다”

그의 소신이 어떠했던가를 엿볼 수가 있다.
지나친 소신은 완고한 학문적 고집이 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문에 확고한 소신이 없을 때 그것은 김빠진 맥주처럼 아무런 힘도 내지 못할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