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퇴비를 뿌리는 것과, 콩을 쑤어 메주를 만드는 것으로 올 농사일을 다해마쳤다. 메주 만들기도 서너 번 경험하다보니 제법 수월해졌다. 나무로 만든 사각 메주 틀을 사용해 만든 메주가 지난해보다 더 매끄러워졌다. 손으로 잘 매만진 메주를 쇠스랑에 추려낸 짚을 깐 판 위에 늘어놓으니, 모양이 그럴듯하다.

 

끝이 없을 것 같이 이어지던 농사일이 얼추 마감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글 농사에 더 매진할 때다. 사실 산골시인에게 더 중요한 것은 글 농사이다. 밭농사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육체노동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글쓰기에 리듬을 잃는 난관이 있었다. 글쓰기라는 것이 밀린 숙제하듯이 틈나는 대로 진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한번 잃은 리듬을 되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집도 읽고, 경전도 읽고, 또 틈틈이 명상수행도 해보지만 막상 책상 앞에 앉으면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내년 출간을 위한 글쓰기도 서둘러야 하고, 매체에 기고할 원고도 작성해야 하고, 부탁 받은 글도 작성해야 하지만 머릿속은 힁하기만 하다.

 

좌불안석이 도무지 해소되지 않을 땐, 습관처럼 가만히 일어나 집 한 바퀴를 돌아본다. 전지를 기다리는 매화나무 다섯 그루를 살피며 행선(行禪)하듯 느릿느릿 발바닥의 촉감을 알아차리며 거니노라면, 이파리 떨어져 앙상해진 나뭇가지에서 그네 타며 놀던 참새 떼 화들짝 놀라 푸드득 달아난다. 참새 떼의 갑작스러운 비상은 현묘재 뒤 감나무에서 까치밥 파먹던 까치들을 놀라게 해 돌연 새들이 이리저리 하늘을 날아다니는 진풍경을 부른다.
 
그러고 보니, 집 둘레의 산 숲정이에서 소란하게 울던 온갖 동물들의 울음소리에 조금은 무심했던 것 같다. 생김새와는 영 딴판으로 거칠게 우는 고라니의 웩웩거리는 울음소리와, 이따금씩 들리는 수리부엉이의 구슬픈 노래 소리, 암컷을 놓고 싸우는 지 수꿩들의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 소란하다. 그 순간 후다닥 땅을 박차고 무엇인가 달음박질을 한다. 이웃집 고양이인줄 알았더니 갈색 털을 한 고라니 새끼 한마리가 앙증맞은 뒤태를 드러내며 산등성이를 향해 냅다 뛰었다.

 

동지가 가까워지면서 노루꼬리만큼 해는 짧아지고, 해진 뒤에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와 뒷산 솔숲과 대숲은 속 깊은 소리로 울어댄다. 미친바람을 맞으니, 문득 화단의 배롱나무가 얼어 죽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정성껏 짚으로 보온장치를 해주었다. 배롱나무는 매화나무와 달리 추위에 강한 편이 아니어서 최소한의 보온장치가 필요할 듯싶어서다.

 

내 어릴 적 이맘때면 집집 굴뚝마다 저녁 짓는 연기가 아스라이 피어올랐으나, 그런 정겨운 광경은 산골에서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 대신 밭과 논에서 콩대며 지푸라기를 태우는 연기가 여기저기서 하늘로 솟아오르곤 한다. 이따금씩 폐비닐을 태우는 얌체족도 있어서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데, 아내의 건의로 지난해 마을회관 한 쪽에 재활용 분리수거 공간이 마련되면서 불쾌한 경우는 부쩍 줄었다.

 

점심때가 가까워오면 동네 집집마다 대문이 서로 연통이나 한 듯 일제히 닫힌다. 12월에 접어들면서 마을회관은 노인회관으로 전용되어, 마을 어르신들이 회관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따뜻하게 난방이 된 마을회관에서는 효도마을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부녀회의 봉사로 매일 점심이 제공되니, 어르신들은 한 자리에 모여 대화도 나누고 식사도 하면서 겨울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이 자리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온갖 것들이 공유되는 곳이기도 하니 한편으로는 매우 무서운 공간이기도 하다. 작은 일이라도 입길에 오를만한 실수가 있으면, 이 공간을 통해 삽시간에 마을 전체로 소문이 확산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 집과 같은 외지인에 대한 몇몇 사날없는 어르신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아서 조금은 신경을 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무려나, 아내에게 농사일 마치면 멀리 1박2일쯤 마실이나 다녀오자고 했던 말이 연말이 다가올수록 부채처럼 밀려온다. 송년모임에 참석하라는 기별로 가득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기가 더 민망한 시절이 오늘도 어제처럼 흘러가고 있다.

 

하루 세끼를 꼬박 집에서 해결하는 생활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아서 이따금씩 동네 국수집을 찾아 소박한 외식을 하기도 하지만 온종일 서리태 콩 고르다 때가 되면 밥상을 차리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은 여전히 가시지를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리태를 한 알 한 알 손으로 고르는 것이 무리인 것 같아서, 읍내 농협이 운영하는 농기계 센터에 설치된 ‘콩 고르기’ 기계로 일차 분류를 마쳤다. 이렇게 기계로 고른 콩을 그대로 판매한다고 하지만, 아내는 우리 집 콩을 원하는 지인들에게는 양질의 콩을 제공해야 한다며 일일이 손으로 고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도 기계로 일차 분류를 했으니, 훨씬 일의 양이 덜어졌다며 표정이 밝아진다. 작은 일에 기뻐하는 표정을 보니, 어느덧 소욕지족(少慾知足)의 삶이 몸에 밴 모양이다.

 

소욕지족의 삶은 어쩌면 우리 부부에게는 운명처럼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면서 지금은 입적하신 석주스님께 주례를 부탁드렸는데, 예식장이 아닌 절에서 하면 주례를 맡아주겠노라는 반허락을 하셨다. 그러나 이웃종교를 믿는 몇몇 친척들의 반대로 스님을 주례로 모시지 못했는데, 고맙게도 부자로 사는 부적이라며 ‘吾唯知足’을 써서 결혼선물로 주셨다. 우리 부부는 석주스님의 이 소중한 선물을 거실 벽에 걸어놓고 늘 삶의 지남(指南)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산골의 삶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오유지족의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부족하고, 아쉽더라도 욕심을 내지 않고 만족하는 마음으로 살면 편안하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밤이 깊어지면서 바깥에는 찬바람이 쉴 사이 없이 태질하고 있다. 처마를 스치는 바람소리 스산한데 풍경소리 청아하다. 현관 밖 잔디마당엔 바람에 날아온 낙엽들이 답쌓이고, 비닐하우스 문짝은 칼바람에 거풋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