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小雪) 하루 전날, 눈 대신 비가 내렸다. 절기상 입동과 대설 중간쯤이니 완연한 겨울이건만, 일주일전 심은 상사화가 뿌리를 잘 내리고 있는지 확인하러 일찌감치 현관문을 나섰다. 소설에 꽃을 심고 가꾸는 게 의아할 수도 있겠으나, 이즈음은 아직 한겨울은 아니고, 또 이따금씩 따뜻한 햇살도 비쳐 소춘(小春)이라고도 불리니 놀랄 일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아침저녁 뺨을 때리는 손돌바람은 제법 맵다. 상사화가 비록 추위에 강하다고는 하나 걱정을 아예 내려놓을 수는 없다.

 

초겨울에 상사화를 심은 이유는 두더지를 내쫓기 위해서다. 올 가을부터 집 앞 밭에 두더지가 찾아왔다. 녀석들을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아침에 집 주변을 돌아보면 화단과 밭둑, 밭고랑 이곳저곳을 마구 헤집고 다닌 흔적들이 선명하다. 배추 몇 포기는 하필 이 녀석들이 땅속을 뚫고 지나간 길목에 자리해 피해를 입었다.

 

 

 

밭에 두더지가 찾아온 것은 한편 반가운 일이기는 하다. 밭이 살아나고 있다는 뚜렷한 조짐이기 때문이다. 우리 밭은 4년 째 일체의 제초제와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아 지렁이 개체수가 부쩍 늘었다. 삽으로 밭을 파헤치면 지렁이들이 즐비하게 나타난다. 두루 알다시피 지렁이는 흙을 숨 쉬게 하고, 나아가 부드럽고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녀석들이다. 이 녀석들의 개체수가 늘어나면 두더지가 찾아오는 것이 생태계의 이치다.

 

한 달여 전 마늘 밭을 일구기 위해 밭을 삽과 괭이로 뒤집으며 일굴 때, 놀랍게 부드러워진 흙을 보고 내심 놀란 적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마을에서 옥토로 소문 난 문전옥답이 제대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니, 신나는 일이다.

 

그러나 두더지가 기승을 부리면 그 다음에는 뱀이 찾아온다는 이웃 어르신들의 말씀에 놀라, 두더지를 내쫓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아들이 관련 정보를 검색하기 위해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지더니, 두더지들이 싫어하는 냄새를 풍긴다는 상사화를 100뿌리쯤 구해 놓았다. 전라남도 나주에서 훌륭한 개인 정원을 평생을 거쳐 조성한 어떤 유명화가는 ‘생태계는 뱀이 찾아왔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도 했지만 우리 부부는 아직 뱀과 어울려 살 정도까지는 아니니 어쩌겠는가. 

 

농사철은 지났지만 막바지 수확이 남아 있다. 서리태 타작을 해야 하고, 마늘밭에 보온비닐도 덮어야 한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월동 준비를 위한 잔일이 남아 있다. 무에서 잘라낸 실한 시래기를 엮어 뒤란 그늘에 매달고, 메주를 쑤어 말릴 때 깔개로 이용할 짚도 잘 말려서 간추려 놓아야 한다. 추수를 모두 마친 밭에 퇴비를 뿌린 후 갈아서 밭두둑을 만들고, 그곳에 호밀을 뿌리는 일을 마쳐야 비로소 올 한 해 농사일이 마무리된다. 그뿐이랴. 김장도 해야 하고, 매화나 구지뽕나무 배롱나무 복숭아나무의 전지작업도 남아 있다. 시골 살이란 이렇듯 끝없이 일이 이어진다.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는 속담 때문인지, 바람이 심하게 불고 날씨도 바짝 추워졌다. 소설에 날씨가 추워야 보리농사가 잘 된다니, 이 정도 추위에 토를 달 일은 아니다. 맵찬 바람 탓에 일주이면 두어 차례 나섰던 뒷산 고갯길 거님도 멈췄다. 동네 어르신들이 마을회관으로 모이는 시간은 추워질수록 조금씩 앞당겨지고 있고, 창문, 대문 등 문이란 문은 집집마다 거진 닫혔다. 정신 사납던 개 짖는 소리조차 뜸해졌고, 이르게 뜬 초저녁달이 저 홀로 창백하다. 오직 부산한 것은 마을 곳곳에 선 감나무를 번갈아 오가는 까치들과 옹종망종 날아다니는 참새들이다. 이렇게 바쁜 새떼들이지만 매 한 마리 나타나 하늘 높이 유유히 날면, 거짓말처럼 일제히 침묵모드로 들어간다. 서리태 타작을 하는 기계음과, 잊을만하면 고약하게 괴성을 지르는 고라니들만이 겨울 추위의 고통을 고스란하게 전해줄 뿐이다.

 

여름이나 초겨울이나 농사꾼에게 휴일은 비오는 날이다. 비 내리면 바깥일을 할 수 없으니, 모처럼 아내와 함께 당진시내 극장으로 향했다. 틈이 생기면 젊었을 적 즐겨 들었던 영국출신 밴드 퀸(Queen)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기로 했던 계획을 마침 찾아온 ‘비요일’에 실행에 옮긴 것이다.
‘스산한 초겨울에 더 어울리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감동 그 자체였다. 귀에 익은 음악들과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의 강렬한 발성이 상영시간 내내 열정과 긴장을 자아냈다. 록과 오페라, 헤비메탈의 절묘한 앙상블이 이뤄낸 6분 광란의 축제,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

 

 

한 소년이 누군가를 총으로 쏜 후 어머니에게 고백하고 사형을 받으러 끌려가는 내용을 담은 노래 ‘보헤미안 랩소디’의 오페라 부분에선 억울함과 원망을 가지고 현재의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소년의 내적 갈등이, 에이즈에 걸려 사실상 죽음을 통보받은 프레디 머큐리의 실제 삶으로 오버랩 되는 전율로 다가온다. 

 

이 노래가 더 감동적인 이유는 소년, 아니 프레디 머큐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원초적 본능(I don`t want to die.)에 머물지 않고, 다시는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다(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는 데까지 사고의 영역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프레디 머큐리가 절규하듯 ‘I`d never been born at all.’을 목이 터져라 노래하는 장면에서, 부지불식간 ‘그래요.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요. 윤회의 굴레에서 기필코 벗어나세요.’라는 응원, 아니 기원이 가슴 속에서 솟구친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하이라이트는 엔딩 부분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 장면이다. 수만 군중 앞에서 거침없이 활개 치는 밴드 퀸과 동시대를 살았기에 이 장면에 더 가슴이 짠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퀸을 몰랐을 젊은 관객들도 훌쩍일 정도로 그들은 시공을 넘어 감동을 준 ‘레전드’였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앙코르처럼 상영된 퀸의 실제 ‘Don't stop me now.’공연 실황이 다 마쳐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초겨울의 정취에 맘껏 젖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