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곶감을 난생 처음 만들어보기로 했다. 감나무가 없어 곶감 만들 계획은 아예 없었지만, 이웃마을 지인께서 고맙게도 감식초 만들 정도만 남겨놓고 자기 집 감을 따가도 좋다고 알려왔다. 지금은 폐교가 된 옛 남산초등학교 부근에 서있는 대봉 감나무인데, 튼실하게 영글었다는 것이다. 우리 집 뒤란의 복숭아를 따기 위해 사놓았던 잠자리채 모양의 알루미늄 장대를 챙겨들고 감나무에게로 달려갔다. 정말로 먹음직스러운 수백 개의 감들이 주렁주렁 가지가 부러질 듯 달려있었다.

 

감 따는 실력은 갈수록 느는 것이어서 3년째 되는 올해는 제법 노련해졌다. 먼저 이 감나무 주인집 감을 넉넉하게 따드린 후 본격적으로 감 수확을 시작했다. 한나절쯤 따다보니 200여 개가 넘는 대봉을 수확했다. 

 

수확한 감이 넉넉한 양이다보니, 감을 분류하던 아내가 곶감 한 번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나의 대답은 ‘그거 좋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감으로 곶감을 만들기로 하고, 나머지는 감 말랭이와 홍시용으로 각각 분류했다. 실패해도 좋으니 시험 삼아 도전해본다는 데 의미를 두고 골라놓은 감을 깎았다. 100여 개에 가깝게 정성껏 깎아서 비닐하우스 안쪽에 줄을 매고 그곳에다 차례로 걸었다. 곶감은 해가 안 들고, 통풍이 잘 되는 서늘한 곳에서 말리는 것이 좋다고는 하지만, 우리 집은 사방이 양지여서 부득이하게 비닐하우스를 곶감 말리는 장소로 정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이어서 곶감이 검은 빛깔을 띠겠지만, 집에서 먹을 것이므로 색깔 따위는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서둘러 구입한 곶감걸이에 두 개씩 짝을 이뤄 줄지어 걸어놓고 보니 미완의 곶감들이 만들어낸 광경이 제법 그럴 듯하다.

 

이제 남은 것은 곶감이 잘 익을 때까지 조바심을 내지 않고 참으며 기다리는 일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떫은맛은 줄어들고 단맛이 돌게 될 것이다. 곶감을 빨리 먹고 싶으면 건조기를 사용하면 되겠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가져다주는 맛을 따라올 수 없다. 곶감 농가에서는 대부분 기계(건조기)를 사용하여 신속히 수분을 빼고 그 후에 자연건조를 해 빨리 상품화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시간을 갖고 옛 방식대로 만들기로 했다.

 

곶감의 맛도 끈기 있게 기다릴 때 제 맛을 만날 수 있다. 어디 곶감뿐이겠는가. 어떤 일이든 제대로 되려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지루함과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인내와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곶감이 말라 쪼글쪼글해지면 정성스럽게 주름을 펴고 보기 좋게 모양을 내는 수고가 또 한 차례 뒤따를 것이다. 곶감손질은 곶감의 모양은 물론 맛까지 아주 크게 바꾸어 준다고 한다. 정성스럽게 손질을 오래 여러 번 하면할수록 당도가 높아지고 식감(쫄깃쫄깃)이 훨씬 좋아진다는 것이다. 최고의 곶감을 얻기 위해서는 이렇듯 인내와 정성이 반드시 깃들어야 하는 것이니, ‘곶감, 기다림의 철학’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도 이 기다림의 철학과 상통하는 가르침이 있다. ‘감인대(堪忍待)’, 즉 견디고, 참고, 기다리는 것인데, 육바라밀 가운데 인욕(忍辱)바라밀이 여기에 해당한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사바세계라고 부르는데, 사바(Saha)의 뜻이 감인토(堪忍土) 또는 인토(忍土)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는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의 번뇌를 겪어내야 하고, 오온(五蘊)으로 비롯되는 고통을 참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절집에 감인대와 관련한 재미난 이야기가 전한다. 근대의 한국불교의 대표적 고승인 동산(東山)스님은 당신을 찾아온 불자들에게 일일이 ‘堪忍待’ 세 글자를 써 주시고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법문을 자주 들려주셨다고 한다. 
 
불같은 성격 탓에 가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젊은이가 있었다. 어느 날 뒷산 암자 노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스님은 ‘감인대(堪忍待)’라는 세 글자를 좌우명으로 써주었다.
‘사바세계는 견디고 참고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 세상입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견뎌내야 하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참아야 하고, 절망 앞에서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며 살라는 뜻입니다.’ 노스님의 법문에 크게 감동한 젊은이는 그 글씨를 표구해서 방에 걸어두었다.
그가 어느 날 볼일이 생겨 원행을 떠나게 되었다. 아내를 혼자 두고 나서는 것이 찜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일이 빨리 끝나 그날 중으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밤중에 사립문을 열던 그는 깜짝 놀랐다. 안방에서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아내의 불륜을 의심한 그는 마당에서 도끼를 찾아들고 방문을 열어 젖혔다.
그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족자로 걸어둔 ‘堪忍待’ 세 글자였다. 그는 스님의 가르침대로 일단 화를 참고 아내를 향해 ‘이럴 수가 있느냐’고 울부짖었다. 그 순간 등을 돌리고 있던 외간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아, 그는 바로 장인어른이었다. 그날따라 우연히 딸네 집 근처를 지나다가 안부가 궁금해 들렸는데 혼자 밤을 보내게 된 사연을 듣고 말동무를 해주는 중이었다. 사내는 들고 있던 도끼를 떨어뜨리며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동산스님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모든 수행은 고난과 분노를 견디고 참으며 때가 되기를 기다릴 줄 알아야 성취될 수 있다. 비단 수행뿐이 아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 또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곶감을 만들며 문득 떠올린 세 글자, 감인대!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지녀야할 마음가짐을 일러주신 동산 큰스님의 가르침이, 하필이면 곶감을 만들며 떠올라 겸연쩍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