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26회>

 

 

신미의 과거행적을 조사한 영동 관아의 보고서는 세 달 만에 올라왔다. 대사헌 이숙치(李叔畤)가 서명하여 지시했지만 보고서는 신속하게 올라오지 않았으며 그 내용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현감이 공석 상태였으므로 그랬다. 충청도 감사 정인지의 건의로 기생들과 술판을 자주 벌이던 현감 곽순(郭珣)이 파면돼 한동안 관아의 업무가 마비됐던 탓이었다. 뿐만 아니라 옥구병마사를 지냈던 신미의 아버지 김훈이 살아 있으므로 아전과 군관들이 서로 눈치 보며 조사를 미루기만 했던 것이다.
보고서는 사실이라기보다는 뜬소문을 옮긴 것에 불과했다. 그것도 이런 저런 허물을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고 있어 보고서 내용만으로는 탄핵하기가 궁색했다. 이숙치가 허술한 보고서를 한번 훑어보고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석 달 동안 조사한 것이 고작 이따위란 말인가!”
보고서는 두루뭉수리하게 쓴 몇 줄의 문장뿐이었다.
‘신미는 간사한 중입니다. 중이 되기 전에 일찍이 학당(學堂)에 입학하여 함부로 행동하고 음란하고 방종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으므로 학도들이 그를 사귀지 않고 무뢰한으로 지목했습니다. 그 아비 김훈이 불효 불충의 죄를 짓자 폐고(廢錮; 관리가 되는 자격을 박탈함)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몰래 도망해 머리를 깎았습니다.’
“배 헌납, 읽어보시게. 헌부를 어찌 보았기에 이런 엉터리 보고서가 올라온 것인가?”
사간원에서 파견 나온 헌납 배강이 이숙치의 짜증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지평 권자홍이 배강을 대신해서 말했다.
“대헌(大憲) 나으리. 이 정도면 탄핵하는 데 무리가 없사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사옵니다. 중 되기 전의 무뢰한을 어찌 입궐시킬 수 있겠사옵니까?”
“학당에서 음란하고 방종한 짓을 했다는데 신미가 무슨 행동을 했다는 것인지 그 내용이 애매하다는 말일세.”
“아비를 보면 그 아들을 안다는 말이 있지 않사옵니까? 신미의 아비 김훈은 맹수를 잡을 만큼 거칠고 무예에 능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사옵니다. 아마도 신미 역시 아비를 닮아 힘이 좋아 행실이 거칠었을 것이옵니다. 또한 김훈은 여색을 좋아하여 수원의 관기 벽단단을 데리고 인덕궁을 출입하곤 하였으니 그 아들 역시 음란하였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러니 무뢰한이라는 말이 지나치지 않사옵니다.”
찻잔을 만지작거리고만 있던 정효강이 나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김훈은 이미 사면되어 영동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사옵니다. 전하께서 사면시킨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옵니다. 짐승과 달리 개과천선하는 것이 사람이옵니다. 아비의 허물을 아들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지나치고 억울한 일이옵니다.”
배강이 찻잔을 소리 나게 놓으며 말했다.
“이보시오, 정 지평. 아비가 곤궁에 처했는데 아비를 부끄러워하며 저만 살겠다고 도망쳐 중 된 사람의 행실이 옳다는 말이오?”
“제가 듣기로는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것이 아니라 아비의 흥망을 곁에서 보고 인생무상을 절감한 채 속세를 떠난 것으로 알고 있소.”
“속세를 떠난 중이 산중에 머물 것이지 왜 궁궐을 들락거린단 말이오?”
“전하께서 부르시니 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소.”

 

 

 

다시청의 회의는 길게 가지 않았다. 이숙치와 사간원에서 파견 나온 배강 사이에 묘한 긴장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년 전, 배강이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였다. 배강이 일찍이 길에서 종이를 관리하던 장흥고(長興庫)의 직장(直長) 권간(權揀)을 만나 유지(油紙)와 돗자리를 청구했는데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마음속으로 원망을 품고 있다가 권간이 동료의 기첩을 빼앗아 첩을 삼았다고 감찰하여 관직을 빼앗은 일이 있었다. 이때 대사헌 이숙치는 배강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권간을 파직시켰으므로 그도 역시 추핵하여 선비의 기풍을 맑게 하자고 세종에게 아뢰었던 것이다.
이숙치가 다시청을 나가자 배강은 분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신미는 무뢰한이 분명하오. 관리들도 육조거리에 들면 말에서 내려 걷는데 신미라는 중은 역마를 타고 드나드는 무뢰한이란 말이오. 누구를 믿고 그렇겠소?”
권자홍이 은근히 맞장구쳤다.
“전하의 신임을 받아 그러는 것이오. 이는 백관의 풍속을 크게 해치는 일이니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는 신미는 탄핵 받아 마땅합니다. 당장 파직시켜야 하오.”
“전하께서 윤허하시지 않을지도 모르오.”
배강은 수전증 환자처럼 찻잔의 차를 흘렸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모양이었다. 권자홍이 다시 말했다.
“중을 환대하다니 상왕(태종)께서 살아 계신다면 크게 노하실 일이오.”
“권 지평, 어쩌면 신미가 전하의 눈을 어둡게 하는 일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르오. 그렇지 않고서야 전하께서 무엇 때문에 신미를 감싸고돌겠소?”
“맞소이다. 무언가 요상한 일이 있을 것이오.”
“권 지평께서 은밀하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 중 하나 없애는 건 간단하니 우선 전하께서 왜 신미를 감싸는지 그것부터 알아봄이 좋을 것 같소.”
정효강은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적어도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들은 신미가 세종의 명을 받아 비밀리에 진행하는 일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간들이 문제 삼고 있는 바는 신미가 집현전 학사를 제수 받은 사실과 세종의 신임이 두텁다는 것뿐이었다.
또 하나 다행인 점은 이숙치와 배강이 서로 견제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신미의 과거행적을 조사하여 탄핵하는 문제만 해도 이숙치와 배강의 처리방식은 달랐다. 이숙치는 보고서 내용만으로는 신미를 탄핵하기가 부담스럽다고 했고, 배강은 충분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배강은 이숙치와 맞서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청을 나선 배강은 씩씩거리며 사헌부 맞은편에 있는 사간원으로 건너가 자신의 상사인 좌사간 서성과 우사간 임종선을 찾았다.
“사간 나으리. 대사헌께서 무슨 영문인지 신미의 방종한 과거행적이 드러났는데도 탄핵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 대헌께서 석교를 남몰래 신봉하는 것은 아니오?”
“그럴 리는 없습니다. 교종과 선종의 본산인 흥덕사와 흥천사가 성 안에 있다 하여 일종(一宗)으로 혁파하여 진관사로 옮기자고 상소한 분이 아닙니까? 비록 전하의 윤허를 받지 못했으나 누구보다도 불교혁파를 주장한 분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탄핵을 미적거린단 말이오.”
“아마도 제가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저를 파직시키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원망이 있어 그럴 것입니다.”
임종선이 웃으며 말했다.
“배 헌납, 그 일은 이미 좋게 마무리된 것이오. 또 다시 그 일을 거론하기보다는 간사한 중 신미를 성 밖으로 쫓아낼 방법이 무엇인지 궁리하시지요.”
그날 오후.
정효강은 감찰 정현을 사헌부 뒤뜰로 불렀다. 지독한 겨울가뭄으로 개울과 연못은 검은 바닥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한쪽의 개울바닥은 오후 햇살로 살얼음이 녹아 뱀의 허물처럼 하얗게 번득거렸다. 아침에 삼각산 쪽에서 불어오던 찬바람은 잦아 있었다. 정효강은 선 채로 소리를 죽여 말했다.
“아무래도 신미대사님 옥체가 걱정이오.”
“무슨 방도가 없겠습니까?”
“집현전에서 물러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으나 대사님은 그럴 분이 아니라서 머리가 무겁소.”
“말 그대로 진퇴양난입니다.”
“전하의 명이라면 불구덩이 속이라도 뛰어들겠다는 대사님께서 스스로 사직할 리도 없으니 그 말이 맞소.”
“지평 나으리. 대사님께 충직하고 영리한 종을 하나 붙여드리면 어떠하겠습니까?”
“왜 그렇소?”
“대사님 옥체를 보호하기도 하고 지평 나으리와 수시로 연락을 취할 수 있으니 그렇습니다.”
정효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안평대군께서 하사하신 말구종을 대사님께 보내야겠소. 긴박한 일이 생기면 나와 안평대군께 연락할 수 있으니 말이오.”
“무예에도 능한지 궁금합니다.”
“늙은 것이 흠이긴 하지만 젊은 날에는 힘깨나 쓰는 말먹이꾼이었소. 역참에서 무예를 익혔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소.”
그러나 신미에게 말구종을 하나 붙이는 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골수 유신들이 모인 집현전을 아주 떠나는 것이 최선일 뿐이었다. 정효강은 세종과 독대할 기회가 생기면 바로 그 점을 직언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충직한 말구종을 신미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