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마실 때는 객이 많으면 수선스럽고
수선스러우면 그윽한 정취가 없어지느니라.
홀로 마시면 싱그럽고 둘이 마시면 한적하다.
서넛이 마시면 재미있고 대여섯이 마시면 덤덤하며
일고여덟이 마시면 나눠 먹이와 같더라.
                           -명나라 도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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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즐기는 것은 단순히 목이 말라서가 아니라
맑음과 고요와 그 향기를 누리기 위해서다.
차는 빛깔과 향기와 맛이 두루 갖추어져야 온전한 것이라지만
그중에서 가리라면 나는 선뜻 그 향기를 취하겠다.
차의 향기는 단연 첫째 잔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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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된 차는 좋은 물을 만나야
그 빛과 향기와 맛을 온전히 낼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차일지라도 물이 좋지 않으면
차 안에 비장된 그 빛과 향기와 맛이 우러나지 않는다.
차맛은 물이 좌우한다. 산중에 흐르는 시냇물을
길어다 마실 때의 차맛이 향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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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롯가에 앉아서 모처럼 차를 마셨다.
초겨울 들어 내 몸에 세월의 무게를 느끼면서도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차를 거의 마시지 못했다.
속이 채워지지 않은 채 뻑뻑했고
내 속뜰에 겨울 숲이 들어선 듯했다.
오늘 마신 차로 인해 그 숲에 얼마쯤 물기가 감돌았다.
차의 향기와 맛 속에 맑은 평안이 깃들어 있었다.
한동안 표정을 잃은 채 다소곳이 놓여 있던 다기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고 그동안 돌보지 못했음을 미안해했다.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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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공복에 마셔야 그 향기와 맛을 알 수 있다.
나는 올 겨울 들어 새벽으로 차를 마시고 있다.
새벽 예불을 드리고 나서 좌선을 마치자마자
다기를 내놓고 차관에 물을 끓여
여명의 창 아래서 차를 두어 모금 마시고 있으면
이 오두막의 생활에 잔잔한 즐거움이 피어오른다.
우리는 차를 잔 가득 부어 습관적으로 마시는데,
잔의 3분의 1이나 4분의 1쯤만 따라 두어 모금 음미해 보아야
차의 고마움과 그 진미를 알 수 있다.
공복에 마시는 차는 우리 영혼을 맑게 한다.
                                <새들이 떠난 숲은 적막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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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쓰는 다기는
손 안에 들어올 만큼 작은 것이 살뜰하다.
차갑게 느껴지는 백자 잔보다 주황색이나
갈색 계통의 다기가 한결 푸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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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나라에서는 차 품평을 늦가을에 한다고 한다.
봄철에 갓 만들어 낸 햇차는 그 빛과 향과 맛이 비교적 신선하다.
그러나 고온다습한 장마철을 거쳐 늦가을에 이르면
그 차의 우열이 저절로 드러난다.
철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좋은 차를 대하면,
한 잎 한 잎 정성을 다해 선별해서 만든 그 사람에게
새삼 고마운 생각이 든다.
만든 사람의 인품이 차 향기에 배어 있는 것 같다.
사람의 일도 또한 이와 같을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덕을 부리지 않고 그가 지닌 인품과 인간미를
한결같이 이웃과 나눌 수 있다면
그는 만인이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이웃이다.
이런 친구를 가까이 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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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우에서 입하를 전후한 때가 햇차를 따는 적기다.
지리산 자락과 보성, 강진, 해남 등 남도지방에서는
이때가 좋은 차의 수확기다.
칠불사 운상선원에서 수도 정진하고 있는 스님이
한 장의 서찰과 함께 운상차 한 통을 보내왔다.
달과 함께 길어온 샘물로 햇차를 달여 첫 잔을
불전에 공양하고 다실에 돌아와 공복에 둘째 잔을 드니,
운상의 싱그러운 향기가 뼛속에까지 스며드는 것 같다.
이따금 느끼는 바이지만 향기롭고 맑은 한 잔의 차로
나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의 조건은 우리들 일상의 여기저기에 무수히 널려 있다.
그걸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으면 된다.
                               <버리고 떠나기> 중에서

 

 

벌써 십수 년째 나만의 연중행사이다.
소박한 산중생활 속에서도 봄이 올 때마다
가장 기다려지는 일 중의 하나가 ‘차 나들이’다.
묵은 차마저 떨어진 시기라 어디서 차를 빌려올 수도 없는
차 춘궁기이므로 곡우가 지나면 부푼 마음으로
차 덖는 집을 찾아가게 된다.
이제는 커피 같은 기호식품의 맛을 넘어
선가에서 마시듯 수행의 의미로 차가 나를 이끈다.
초의스님은 후학들을 꾸짖어 말했다.
“차 마시며 어찌 진리를 이룰 날이 멀다고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