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개인 후의 가을 아침, 노른자위빛 햇볕이 퍽이나 상큼하다. 맛으로 치자면 매콤하다고나 할까. 동트기 전부터 끝물로 달려가는 고추 한 자루를 수확하고, 습관처럼 집 둘레를 돌아보다 불현듯 부시게 피어난 무궁화 꽃송이와 맞닥뜨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눈에 띄지 않던 무궁화가 여보란 듯, 화사하게 미소를 뽐내고 있다. 작년 봄 동네 이장님으로부터 볼품없는 수형(樹形)의 무궁화 두 그루를 얻어 현묘재 뒤쪽 언덕에 대충 심어놓았는데, 글쎄 이 녀석들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이리 아름답게 나툰 것이다. 무궁화가 이토록 아름다운 꽃인 줄 미처 몰랐다. 볼수록 끌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무궁(無窮)이란 ‘다함이 없다’는 뜻이다. 무궁화는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새로 난 가지의 밑에서부터 위로 차례차례 꽃을 피우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가지가 자라면서 시차를 두고 계속해서 무려 2~3천 송이나 되는 꽃을 피우니 사람들은 끝없이 피는 진취적인 꽃이라 여겼고, 그 끈기를 높이 사 ‘무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생명력 강하고, 씨로도 번식도 잘 되는 강인한 생명력이, 우리 민족의 강인한 의지를 닮아 나라꽃(國花)의 반열에 올랐다.

 

무궁화의 성(性)을 따지다면 여성도 남성도 아닌 중성(中性)이라고 해야 한다. 무궁화에는 요염한 색채도, 짙게 풍기는 향기도 없다. 지나치게 농염하다는 이유로 뜰에 양귀비를 심지 않았던 우리네 선인의 젊잖은 풍미에 맞을 뿐 아니라, 향기를 기피한다는 이유로 물푸레나무를 뜰에서 추방한 프랑스의 문호 아나톨 프랑스조차 타협할 수 있을 은근한 매력을 지닌 꽃이 무궁화이다. 또한 무궁화는 여름날 삼베옷을 입고 부채를 부치며 초암의 뜰을 거니는 선비의 정경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수수한 꽃이다.

 

뿐만 아니라 무궁화는 군자가 구하고 기리는 덕성을 갖추고 있다. 덕 있는 이가 몹시 꺼리는 세속의 추한 냄새라든가, 세속적 탐욕은커녕 그 여운조차 찾아볼 수 없고, 아울러 요망하거나 간사함, 방자함, 오만 따위의 징후를 찾아볼 여지가 없다. 어디까지나 점잖고 은근하고 겸손하여, 너그러운 대인의 풍도(風度)를 지녔다. 그러므로 무궁화는 겸(謙)의 꽃이다. 겸손은 주역(周易)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심경일 뿐 아니라, 나아가 온 누리를 누릴 수 있는 미덕이 아니던가.

 

무궁화를 의미하는 한자는 근(槿)인데,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무궁화가 많이 자란다고 해서 근역(槿域)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서기전 3세기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과 그 변방의 지리·풍속·산물 등에 관하여 기술한 <산해경> 권9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군자국(君子國)은 대인국(大人國) 북쪽에 있다.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며, 짐승을 주식으로 한다. 두 마리의 큰 호랑이를 옆에 두며 사냥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 무궁화라는 풀이 자라는데 아침에 났다가 저녁에 죽는다.[君子國 有 薰華草 朝生模死]”

 

여기에서 ‘아침에 났다가 저녁에 죽는다’는 표현은 하루만 피고 지는 무궁화 꽃의 속성을 말한다.

 

 

한편 근역은 ‘근화지향(槿花之鄕 또는 槿華之鄕)’으로도 불린다. 충남 덕숭산에 주석했던 고승 만공(滿空, 1871~1946) 선사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과 세계평화를 기념하는 뜻에서 무궁화 꽃잎에 먹을 묻혀 ‘世界一花’ 네 글자를 썼는데, 수덕사 박물관의 이름을 ‘근역성보관’이라 정한 것도 이 박물관이 세계일화를 바탕으로 한 민족 정신문화의 보루가 되라는 선사의 뜻을 담고 있다. 특히 무궁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5장의 꽃잎이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꽃잎이 모두 하나로 붙어 있는 통꽃의 구조를 하고 있어, ‘화합과 통합의 꽃’으로 통한다. 따라서 만공선사께서 ‘世界一花’를 굳이 무궁화 꽃잎으로 쓴 깊은 뜻을 알 수 있다. 또한 무궁화는 갖은 심신을 맑히는 효능도 지니고 있어, 수련을 하는 스님들이 산사에서 몸과 마음을 맑게 하기 위해 무궁화로 된장국을 끓여 먹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일본불교에서는 무궁화를 ‘나무에 피는 연꽃’이라 하며 신성하게 여겼다고 하니, 무궁화와 불교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

 

무궁은 훗날 아미타 부처님이 된 ‘법장비구의 48대원’ 가운데 하나인 지변무궁원(智辯無窮願)에 등장한다. 이 원은 “정토의 보살들은 한량없는 지혜와 말솜씨로 자유자재하게 설법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법장비구의 다짐이다. 또한 불가에서는 무궁과 같은 뜻을 지닌 무진(無盡)이라는 말도 자주 사용하는데, 둘 다 상대가 끊어진 절대를 의미하는 용어로 무상의 진리를 상징한다. <법화경>에 나오는 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은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서원을 세운 보살의 상징인데, ‘관세음보살보문품’에는 무진의보살이 관세음보살에게 보배영락을 공양했고 부처님의 권유로 보배영락을 받은 관세음보살은 다시 석가모니 부처님과 다보탑에 보배영락을 바쳤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포교사였던 무진장스님으로 인해 널리 알려진 무진장(無盡藏)은 한량없는 자비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식(移植)의 몸살을 이겨내고 마침내 멋들어진 꽃을 피운 무궁화 두 그루. 화려한 향과 자태를 자랑하는 봄꽃의 대표주자 매화꽃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현묘재를 장엄할 가을 벗을 만난 기쁨에, 오늘 나는 작은 흥분을 감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