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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 <20회>
정찬주 2018-08-20 (월) 06:49
천강에 비친 달 <20회>
귀의
대자암 산문을 들어선 신미는 다소 놀랐다. 산문 앞에는 문지기 병사 두 명이 내리는 비를 피해 산문 지붕 밑에 서 있었고, 무장한 한 무리의 병사들이 경계를 서는지 법당 처마 아래서 어슬렁거렸다. 법당 좌우로 동당과 서당이 있었는데, 서당 쪽은 아예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신미는 도롱이를 벗고 법당으로 곧장 들어가 삼배한 뒤 동당으로 갔다.
동당 작은 방 앞에서 말구종 노비와 함께 원주스님을 만났다.
동당 작은 방 앞에서 말구종 노비와 함께 원주스님을 만났다.
“함허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왕실의 귀한 분들을 만나고 계시니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왕실의 귀한 분들을 만나고 계시니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젊은 원주스님은 짙은 눈썹 탓인지 강인한 인상이었다. 말할 때마다 눈썹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뉘시라고 말씀드릴까요?”
“신미라 합니다.”
“전해드리고 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자의 숙식을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미라 합니다.”
“전해드리고 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자의 숙식을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원주스님은 노비를 데리고 갔고, 신미는 원주 방에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낙숫물 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그때 문득 함허스님이 왜 자신을 불렀을까 하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조선 글의 실마리가 풀릴 때까지 흥천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했던 함허스님이기 때문에 자신을 부를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런데 신미가 짐작하기로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조선 글에 대한 함허 나름의 조언이 아닐까 싶었다. 스승 함허가 어떤 실마리를 풀어준다면 신미로서는 당장 살길이 생기는 셈이었다. 그만큼 신미는 사지에 빠진 것과 같이 진퇴양난의 처지였다. 조선 글의 자음과 모음의 원리는 범자에서 참조할 터이지만 글자의 이론적 배경이나 모양 같은 문제는 조금도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신미는 원주스님 안내로 함허가 주석하는 조실채로 갔다. 함허는 후원으로 가는 길목의 조실채에서 묵고 있었다. 조실채는 다른 건물보다 높았다. 신미는 가사를 수하고 함허에게 삼배를 올렸다. 함허는 예전과 달리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불자(拂子) 같은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와 위의를 풍겼다.
신미는 원주스님 안내로 함허가 주석하는 조실채로 갔다. 함허는 후원으로 가는 길목의 조실채에서 묵고 있었다. 조실채는 다른 건물보다 높았다. 신미는 가사를 수하고 함허에게 삼배를 올렸다. 함허는 예전과 달리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불자(拂子) 같은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와 위의를 풍겼다.
“청안하셨사옵니까?”
“그동안 강화도 정수사를 왔다 갔다 했다. 절은 퇴락하였으나 솟아나는 맑은 샘물이 아까워 중창했다.”
“정수사로 가실 것입니까?”
“중창을 했는데 다시 갈 일이 있겠느냐.”
“대자암에 주석하시겠다는 말씀이군요.”
“아니다. 만행을 더 하다가 금생을 마칠 무렵이 되면 희양산 봉암사로 들어갈 것이다.”
“그동안 강화도 정수사를 왔다 갔다 했다. 절은 퇴락하였으나 솟아나는 맑은 샘물이 아까워 중창했다.”
“정수사로 가실 것입니까?”
“중창을 했는데 다시 갈 일이 있겠느냐.”
“대자암에 주석하시겠다는 말씀이군요.”
“아니다. 만행을 더 하다가 금생을 마칠 무렵이 되면 희양산 봉암사로 들어갈 것이다.”
신미는 안부를 물으면서도 함허의 입에서 조선 글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함허는 끝내 수행에 관한 것만 얘기했다.
“흥천사는 요즘 참선대중이 얼마나 되느냐?”
“선종본사로 지정된 이후 예전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너도 선방에 들어가느냐?”
“안거는 대중과 함께 하지만 해제기간인 산철에는 토굴에서 혼자 공부합니다.”
“토굴에서 하는 공부는 진척이 있느냐?”
“선종본사로 지정된 이후 예전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너도 선방에 들어가느냐?”
“안거는 대중과 함께 하지만 해제기간인 산철에는 토굴에서 혼자 공부합니다.”
“토굴에서 하는 공부는 진척이 있느냐?”
토굴 공부란 조선 글을 궁구하는 것을 말했다. 신미는 사실대로 고백했다.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전에 말하지 않았더냐. 범자를 잘 배워두면 쓸 데가 있을 것이라고.”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겠사옵니까?”
“머리에 불이 떨어진 것 같이 더욱 정진해라. 나는 우리말, 특히 우리 사투리와 범어가 한 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스님, 난생 처음 들어보는 얘깁니다.”
“호남이나 영남에서 올라온 중들의 말을 가만히 곱씹어보니 범어와 같지 뭐냐.”
“내가 예전에 말하지 않았더냐. 범자를 잘 배워두면 쓸 데가 있을 것이라고.”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겠사옵니까?”
“머리에 불이 떨어진 것 같이 더욱 정진해라. 나는 우리말, 특히 우리 사투리와 범어가 한 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스님, 난생 처음 들어보는 얘깁니다.”
“호남이나 영남에서 올라온 중들의 말을 가만히 곱씹어보니 범어와 같지 뭐냐.”
함허가 사투리를 예로 들었다. 아비, 아바이, 에미, 하나부지, 하나비, 머심, 거시기, 머시기, 아따, 그라고, 그랑께, 그라믄, 해부렀다, 떼브리제, 쓰것다 등이었는데 신미로서도 흥미로웠다. 사투리가 아닌 말도 많았다. 님금, 사나이, 엄마, 언니, 머심, 택(집,宅), 사(스승, 師), 수(목숨, 壽), 꼬마 등이었고, 오다, 가다, 먹다, 밝다, (장가)드리다, 주리다, 씻다, -보다 등과 같이 범어와 우리말의 뿌리가 같은 말도 수없이 많았다.
“스님, 이는 무얼 말하는 것이옵니까?”
“동이족인 우리나 천축 사람들 조상이 수미산 어느 산자락 성에서 함께 살다가 각자의 인연 따라 옮겨 살았다는 증거지.”
“동이족인 우리나 천축 사람들 조상이 수미산 어느 산자락 성에서 함께 살다가 각자의 인연 따라 옮겨 살았다는 증거지.”
신미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한 번도 동이족이 어디선가 흘러왔다는 생각이나, 뿐만 아니라 같은 말을 쓰던 천축 사람들과 어디에선가 갈라져 집단으로 이동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미의 뇌리 속으로 한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스쳤다. 신미는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말했다.
신미의 뇌리 속으로 한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스쳤다. 신미는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말했다.
“놀랍습니다, 스님. 부처님도 동이족의 조상이라는 것이옵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수미산에서 가까운 천축에서 태어나셨으니까 우리는 부처님의 현손(玄孫)의 현손이다.”
“그렇다고 봐야지. 수미산에서 가까운 천축에서 태어나셨으니까 우리는 부처님의 현손(玄孫)의 현손이다.”
그런데 함허는 우리말과 범어의 근본이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면서도 정작 딴청을 피웠다. 실제로 신미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다른 데 있는 듯했다. 이윽고 흥분을 가라앉힌 신미는 조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함허가 한 얘기는 신미가 마음 졸이며 기다렸던 것과 겉돌았던 것이다. 신미는 화제를 돌렸다.
“현등사에 들르실 계획은 없으시옵니까? 그곳 대중이 스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사옵니다.”
“구름이 가고 싶은 대로 흘러가듯 앞으로는 그렇게 살 것이다.”
“원래 운수납자(雲水衲子)가 아니옵니까?.”
“네 말이 맞다만 세상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무상한 것이 부질없는 이름 아니더냐? 색(色)이 공(空)하다고 수만 번 들었고 또 그렇게 가르쳤건만, 허나 삶 자체가 집착덩어리인 색(色)이 아니더냐? 세속의 인연을 끊지 못한 채 나의 출가인생은 흐르다가 멈추곤 했던 꼴이었지. 다행히 이제부터는 타의로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구름이 가고 싶은 대로 흘러가듯 앞으로는 그렇게 살 것이다.”
“원래 운수납자(雲水衲子)가 아니옵니까?.”
“네 말이 맞다만 세상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무상한 것이 부질없는 이름 아니더냐? 색(色)이 공(空)하다고 수만 번 들었고 또 그렇게 가르쳤건만, 허나 삶 자체가 집착덩어리인 색(色)이 아니더냐? 세속의 인연을 끊지 못한 채 나의 출가인생은 흐르다가 멈추곤 했던 꼴이었지. 다행히 이제부터는 타의로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함허는 헛헛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출가인생을 수행자로서 온전하게 보내지 못했다는 자책을 미소로 흘려보냈다. 신미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함허가 부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스님, 무슨 연유로 부르셨사옵니까?”
“너는 왜 불렀다고 생각했느냐?”
“조선 글의 실마리를 주실 것으로 생각했사옵니다.”
“그거라면 잘못 생각했다.”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이옵니까?”
“그렇다.”
“무엇이옵니까?”
“이제 알게 될 것이다.”
“너는 왜 불렀다고 생각했느냐?”
“조선 글의 실마리를 주실 것으로 생각했사옵니다.”
“그거라면 잘못 생각했다.”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이옵니까?”
“그렇다.”
“무엇이옵니까?”
“이제 알게 될 것이다.”
사진 출처=강화 선원사 홈페이지
함허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 뒤 입맛을 쩝쩝 다시고 나서는 갑자기 일어났다. 함허가 문을 열자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났다. 아침부터 시작한 이슬비가 부드럽지만 완고하게 내리고 있었다. 암막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마치 투명한 수정을 꿴 발처럼 보였다. 신미는 함허를 뒤따라 나갔다. 함허는 마당을 가로질러 서당으로 갔다. 함허가 서당으로 가는데 경계를 선 병사들이 아무도 나서서 막지 않았다.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두 손을 모으고 고개 숙이며 예를 표했다. 서당 토방에 놓인 함지박에서는 연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가시가 소름처럼 돋은 대궁들 위에 붉은 홍련과 흰 백련이 얹혀 있었다. 연꽃에서는 갓난아기의 향이 났다.
함허가 방으로 들자, 쉬고 있던 어린 세자가 일어나 손짓으로 법상이 있는 자리를 함허에게 권했다. 세자 옆에는 왕자와 공주가 함께 있었다. 신미는 함허 옆에 두어 걸음 떨어져 앉았다. 함허가 말했다.
“소승은 전하의 성은을 입어 대자암 법석에서 여러 번 법문을 했습니다. 허나 오늘 이후부터는 소승의 법을 이은 제자가 저를 대신할 것이옵니다.”
그러자 세자를 비롯하여 왕자들과 공주가 일어나 신미에게 삼배를 했다. 신미도 당황해 하면서 맞절을 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으므로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자를 따라온 동궁내시와 유모상궁인 신빈김씨도 놀란 채 지켜보기만 했다. 훗날 문종이 될 세자가 조신하게 한 마디 했다.
“아바마마께서 대자암에 가거든 누구든 스승이 될 사람에게 반드시 삼배를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때 세자는 13세, 수양은 10세, 안평은 9세, 정의공주는 12세였다. 2년 전 혹독한 마마에 걸려 죽은 세종의 첫딸이 되는 정소공주만 자리에 없는 셈이었다. 신미는 세자의 얘기를 듣고서야 다소 안심이 되었다. 삼배를 받고 난 뒤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어찌 소승이 세자 저하의 스승이 될 수 있겠사옵니까? 허나 자애로우신 전하의 명이 있었다 하오니 소승은 영광스러울 뿐이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수양이 당차게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흥천사 신미대사를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함허가 합장하며 말했다.
“이 일은 소승이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소승 생각 하나로 세자 저하와 왕자님, 공주님의 귀의를 받겠습니까? 전하께서 부탁하셨습니다.”
잘생긴 데다 재주가 많은 것 같은 안평도 맞장구를 쳤다.
“아바마마께서 흥천사에는 귀의 받아 마땅한 왕사가 될 분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날 밤 함허는 신미에게 지시를 또 하나 했다. 자신처럼 수염을 위엄 있게 기르라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성안 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갓을 쓰고 수염을 기른 채 벼슬아치처럼 변복하면 성안을 수월하게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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