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19회>

 

 

소경공(昭頃公) 성녕대군은 세종의 바로 아래동생이었다. 성녕이 죽자 아버지 태종은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했다. 불교를 억압해왔던 태종은 평소 소신과 달리 넷째아들 성녕의 명복을 빌고자 재위 마지막 해가 되자 경기도 고양현에 있는 묘 앞쪽에 대자암까지 지었다.

 

이후 대자암은 왕실 원찰로서 세자나 대군, 왕족들이 개성으로 나들이할 때 하룻밤 묵는 왕실 역참 같은 구실을 했다. 세종도 대군시절부터 개성을 오갈 때 대자암을 들르곤 했다. 왕이 되어 임진강으로 강무를 나갔다가 돌아올 때도 동생 성녕이 그리워서 대자암을 찾아가 잠시 머물렀던 것이다.

 

세종의 간청으로 함허는 대자암 법회에 몇 번 참여한 적이 있었다. 함허가 증명법사로 나서는 기간에는 세종은 어린 아들딸들까지 가마를 태워 보냈다. 1426년 여름에 열었던 법회 때도 마찬가지였다. 함허로서는 대자암 법석에 앉는 마지막 여름 법회였다. 함허는 여름 법회를 끝으로 대자암에 다시는 드나들 계획이 없었던 것이다. 주역 점에 조예가 깊은 함허는 자신이 입적할 해를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50대 초반이 된 함허는 길어야 7, 8년 정도 더 살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이제는 금생의 삶을 마무리해야 할 시기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은 생은 임금의 부름에 연연하지 않고 희양산 봉암사 같은 깊은 산중의 산사로 들어가 못 다한 공부를 마치고 싶었다.

 

함허는 그런 생각이 들어 신미를 대자암으로 불렀다. 사전에 일언반구도 없었던 뜻밖의 호출이었다. 당연히 신미는 스승 함허가 자신을 왜 부르는지 알지 못했다. 조선 글의 실마리를 풀기 전에는 흥천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바 있는 함허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미는 스승의 호출에 망설이지 않고 바랑을 챙겼다. 이슬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었지만 지체하지 않았다. 신미는 역참 말구종 출신의 흥천사 노비를 따라 나섰다. 노비는 고양 역참에서 말구종을 오래 하여 경기도 길에 밝았다.

 

신미는 대나무삿갓에 도롱이를 걸쳤다. 노비 역시 거먹초립에 도롱이 차림으로 나섰다. 엉덩이까지 내려온 도롱이만 걸쳐도 이슬비 길을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노비들이 한겨울에 여름철을 대비해서 만든 볏짚과 왕골로 된 도롱이였다.

 

“스님, 비가 오니 한 나절은 더 걸리겠습니다요.”
“지름길이 있느냐?”
“있고 말굽쇼. 무학재를 넘어 개성 가는 길이 지름길입니다요.”
“알았다. 서둘러 가자.”

 

비구름이 삼각산 허리춤까지 내려와 있었다. 장대비가 쏟아질 것 같지는 않지만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비구름이 산각산 너머로 물러갈 기세는 아니었다. 하루 종일 이슬비가 오락가락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그런데 대나무삿갓만으로도 신미의 얼굴은 비 한 방울 젖지 않았다. 장삼 저고리도 마찬가지였다. 일종의 우장인 도롱이를 걸친 것만으로도 이슬비가 장삼저고리에 스며들지 못했다.

 

 

“스님, 비 오는 날 꼭 떠나야만 합니까요?”
“미안하구나.”
“저는 괜찮습니다요. 스님이 고생하시니까 그렇습죠.”
“무학재를 넘어보기는 처음이구나.”
“일이 생긴 겁니까요?”
“모르겠다. 허나 일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느냐.”
“재를 지냅니까요?”
“그건 아니다. 은사님께서 당부하실 말씀이 있으실 것 같다.”
“흥천사를 떠나시는 것은 아니지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말수가 많아 노비들 사이에서 떠벌이라고 불리는 말구종이 곧 입을 다물었다. 신미는 다시 흥천사로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함허를 따라 다니며 시봉하는 일은 접어 두고 있었다. 함허가 원하지 않았을 뿐더러 신미에게는 조선 글의 실마리를 찾아보겠다는 서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러하듯 단초를 마련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말을 소리 나는 대로 쓰는 데 한자로는 불가능했다. 한자는 뜻글자인 데다, 글자만 몇 천 자가 되기 때문에 무지렁이 백성들이 배우고 익히기가 어려웠다. 신라 때 한자에서 뜻과 소리를 빌린 암호 같은 이두가 있었지만 도태된 지 오래였다. 어정쩡하고 혼란스럽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조선말을 소리 나는 대로 빈틈없이 정확하게 옮길 수 있는 쉽고 간단한 조선 글을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그 일은 한강 백사장에서 단추 하나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신미가 잘 아는 범자(梵字; 고대인도어)나 밀자(密字; 고대티베트어)는 소리 나는 대로 쓰는 소리글자이기는 하지만 글자 모양이 한자와 같이 복잡하여 무지렁이 백성들이 외우기 쉽지 않을 것이었고 우선 남의 나라 글자였다. 조선 글은 남녀노소 누구라도 대장경을 볼 수 있게끔 쉬운 글자가 돼야 하는데 범자와 같은 모양이 된다면 차라리 오랫동안 눈에 익은 한자가 더 나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리를 표기하는 데 범자의 자모(字母) 원리를 빌리되, 단순하여 쓰기 쉽고 빠르게 익힐 수 있는 우리 글자를 창안하면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세종과 신미가 꿈꾸는 조선의 글이었다. 그러나 신미의 생각은 거기에서 몇 달째 멈췄다. 자모의 글자를 만드는 데 단 한 치의 진전도 없었다. 세상천지에 없는 자모의 글자를 창안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창안한 글자가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어야 했다. 글자 의미와 원리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웃음거리가 되고 말 일이었다. 그러니 조선 글을 만드는 일은 어느 날 홀연히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 솟아나는 것만큼이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신미는 말구종 노비의 말대로 한 나절이 조금 지나서 대자암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도착했다. 비는 여전히 부드럽게 속삭이듯 내렸다. 비에 젖은 삿갓과 도롱이의 무게가 비로소 느껴졌다. 장삼저고리도 알게 모르게 군데군데 젖었는지 축축했다. 대자암 위로는 성녕대군의 능이 하나 솟아 있고, 능 좌우로는 산자락이 말굽처럼 감싸고 있었다.

 

“스님, 쇤네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요.”
“아니다. 비가 오니 하룻밤 쉬었다 가거라. 나와 같이 돌아가면 될 것이니라.”
“원주스님께 오늘 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요.”
“나와 같이 가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오늘은 배불리 먹고 푹 쉬거라.”

 

신미는 돌돌돌 소리치며 흐르는 개울로 들어가 짚신과 황토 묻은 발을 씻었다. 말구종도 뒤따라 들어와 흙 묻은 바짓가랑이를 개울물에 헹구었다.

 

“스님, 요즘 무슨 공부를 하십니까요?”
“허허. 이놈이 별것을 다 묻는구나.”
“대중들이 수군수군해서 묻습니다요.”
“그래, 뭐라고 하더냐?”
“임금님께서 시키신 일을 하고 있다는 말도 있습죠.”
“누가 그러더냐?”
“절 안에 도는 얘깁죠.”
“다시는 입 밖에 내지 마라. 입을 재앙의 문이라고 하지 않더냐.”

 

신미는 말구종에게 단단히 일렀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다시는 그런 얘기는 하지 마라.”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요.”

 

대자암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성녕대군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조각한 주지스님 명호(明昊)를 비롯하여 승려들이 20여 명이나 되었는데, 지계(持戒)에 철저하고 염불을 잘하였으므로 다른 절의 승려보다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세종 2년 여름에는 21명이 역마를 타고 입궐하여 창덕궁 인정전 옆 누각인 광연루(廣延樓)로 올라가 구병관음정근(救病 觀音精勤) 기도를 했던 것이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원경왕후가 학질에 걸린 지 두 달 만에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자암에 딸린 노비는 120명이었다. 노비들이 묵는 건물만 해도 여러 채였다. 원경왕후가 살아생전 두 번에 걸쳐 시주한 노비들이었는데, 그들은 주로 농사를 지었다. 농토는 태종과 세종이 하사한 땅이었고 대자암 초입부터 능 사이의 넓은 들판은 모두 대자암 소유였다. 태종이 50결, 세종이 1백결을 하사하였던 것이다. 1결이 2백 마지기 정도이니 150결은 3천 마지기나 되는 어마어마한 농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