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17회>

 

 

사헌부의 아침 일과는 자못 엄숙하게 시작했다. 비가 오거나 눈보라가 몰아쳐도 한결 같았다. 대사헌이 사헌부 아전 구실아치를 앞세우고 출근하면 마당에 관원들이 품계에 따라 도열해서 맞이했다. 희우와 같은 처지의 잡직 구실아치들도 처마 밑에 서서 대사헌이 다시청으로 들어갈 때까지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이는 수장의 권위에 복종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관들은 새로 부임한 대사헌이 수장으로서 부적격하다고 판단되면 도열을 거부했다. 일종의 태업이었다. 임금이 임명한 장관 품계인데도 대담하게 항명했다. 세종이 이발(李潑)을 대사헌으로 임명하여 보냈을 때도 대관들이 시위했다. 대사헌으로 제수 받은 이발이 아침 일찍 사헌부 솟을대문을 들어섰지만 대관들이 일부러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대사헌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자 수모였다. 이발은 마당에서 뒷짐을 진 채 오만상을 찌푸리며 혀를 차다가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희우가 다모로 오기 전의 사건이었다. 다음날 세종이 주동자격인 정 4품의 장령 송인산(宋仁山)을 근정전으로 불러 질책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대사헌 이발을 어찌하여 마중하지 않느냐?”
“발이 과거에 중국사신으로 들어갈 때 세포(細布)를 가지고 들어가 장사했습니다. 이는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로 어명을 욕되게 하였사옵니다. 그러니 발은 헌부의 장관이 될 자격이 없사옵니다.”
“과거에는 사신으로서 그런 것까지 금하는 명령이 없었기 때문이다. 발이 고의로 범한 것이 아니니 앞으로는 그를 마중하도록 하라.”
“감히 하교를 받들지 못하겠사옵니다.”
“싫다고만 하다니. 인산의 고집에는 과인도 어찌할 수 없구나.”
부하 관원들이 수장을 인정하지 않는 데는 나라의 지존인 임금도 별 도리가 없었다. 타협할 명분도 약했다. 국왕의 사신으로 간 사람이 개인의 이익을 취하고자 장사를 하였으니 송인산의 주장이 틀렸다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사헌부는 관리들의 부정이나 풍기를 감찰하는 기관이므로 수장은 누구보다도 청렴결백해야 영이 설 수 있는 자리였다. 결국 세종은 이발에게 내린 대사헌 임명을 취소하고 형조참판으로 바꾸어 제수했다.

 

하연은 이발 후임이었다. 하연이 대사헌으로 부임하고 나서야 사헌부는 안정을 되찾았다. 하연이 수장이 되어 처음으로 한 일은 세종의 의중과 달리 불교종단을 개혁하는 일이었다. 세종은 태종 때부터 간관으로서 이름을 떨친 하연의 상소를 거부하지 못했다. 하연은 조계종 등 불교 7종파를 선교 양종,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절과 토지, 노비는 국가로 환수 조치하고 말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연은 가장 매서운 수장 중에 한 명이었다. 그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가장 많은 관원들이 감찰과 벌을 받았다. 회례사로 갔던 박희중도 사헌부의 탄핵을 면치 못했다. 세종은 회례사로 세운 공을 가상하게 여겨 품계를 올려주려고 했지만 사헌부는 제동을 걸었다. 일본을 다녀온 박희중의 행실을 문제 삼았다.

 

전라도 진원(珍原; 현 장성) 출신 박희중이 회례사로 뽑힌 것은 그의 일본어 실력과 탁월한 서체 때문이었다. 일본어는 영암군수 시절 남해안으로 표류하여 정착해 사는 왜인들에게 배웠다는 설이 있었고, 바람처럼 걸림 없는 서체는 타고난 재능과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박희중은 특히 위해서 아래로 흘려 쓰는 초서에 능했으며 당시에도 벌써 명필의 반열에 올라 있을 정도였다. 왜인들이 사신이 올 때 요구하는 사항 중 하나는 명필이나 화원이 오기를 바랐는데, 박희중도 그런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왜인들은 조선에서 온 사신들에게 얻는 글씨나 그림에 열광했다. 그만큼 일본문화 수준이 조선보다 뒤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박희중도 왜인들의 성화에 못 견뎌 시를 지어 남겼다. 이른바 ‘회례사로서 일본에 머물며 읊조리다(以回禮使在日本吟)’란 일본에서 느낀 소회를 표현한 담담하고 고졸한 시였다.

 

 

희우는 대관들이 차를 마시는 다시(茶時)에 이런저런 사건의 얘기들을 저절로 들을 때가 많았다. 특히 불교혁파에 관한 얘기는 희우를 긴장케 하였다. 그날도 대관들 사이에서 박희중을 탄핵하자는 얘기가 오갔는데 이상하게도 희우는 자신의 일처럼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그래서 희우는 대관들이 사헌부를 비운 오후가 되었을 때 아버지처럼 의지하는 정현 감찰을 찾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감찰 나으리. 대관님들이 왜 소윤님을 벌해야 한다는 것이옵니까?”
소윤이란 회례사 박희중을 말했다. 세종은 박희중을 회례사로 마음에 두고 영암군수인 그를 내직인 전농시 소윤으로 불러 올렸던 것이다. 이는 임금의 명을 받은 사신으로서 격을 갖추기 위한 조처였다.
“일본에서 당인(唐人; 중국인) 한 명을 데려오면서 지금까지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지.”
“쇤네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무엇이냐?”
“일본에 ‘대장경’ 전체가 아닌 <화엄경>만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수가 아니라 상을 줘야 할 일이 아닙니까?”
“그렇구나. 비록 ‘대장경’을 가져가라는 전하의 명을 어겼다고 해도, 만약 그리 했다면 다행한 일이 아니겠느냐. 왜국 사신들이 해마다 건너와 달란다고 그때마다 ‘대장경’을 줘버리면 다음에는 무엇으로 그들을 달래겠느냐. 아마도 회례사는 전하의 마음을 읽고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태종 때 세자들의 공부를 지도하는 서연관(書筵官)으로 일한 적이 있는 박희중이 세종의 속마음을 알고 어명을 어겼을 것이라는 감찰의 추측이었다. 박희중은 태종 때 세자 중에서도 총명한 충녕을 눈여겨보았을 것이고, 충녕은 훗날 왕이 되어 박희중의 인물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회례사로 임명했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일본 사신 범령(梵齡) 등은 박희중이 돌아온 뒤에 예물을 가지고 건너와서 ‘대장경’ 전체 판본이 아닌 <화엄경> 판본만 보내주었다고 항의하며 떼를 썼다.
“‘대장경’ 문제 말고도 회례사의 공은 또 있느니라.”
“무엇이옵니까?”
“왜구들이 납치해 간 우리 어부들을 데리고 온 공이다. 풍랑에 표류해 간 어부들도 있겠지만 구주 총관을 힐난해서 데리고 온 것이다.”
감찰은 사헌부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관리들의 자잘한 정보까지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다. 회례사 선군(船軍) 한 명을 구타해 사망케 한 왜인 승려 두 명을 잡아왔다고 하는구나. 아마도 선군이 일본 절에서 우리 사신들의 위세를 믿고 난동을 부린 것 같다. 오죽했으면 중이 나서서 매질을 했겠느냐?”
배를 젓는 노잡이와 사신을 호위하는 군사들을 선군이라 하는데 그들 중에는 막행막식하는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는 일본에 도착하여 사신 일행에서 슬그머니 이탈하여 잠적해 버린 선군도 있었다. 그렇게 말썽을 부린 선군은 반드시 체포하여 일본 사신 편에 돌려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감찰도 박희중이 당인(중국인)을 몰래 데리고 온 것은 잘못이라고 보았다.
“당인을 데리고 온 것도 잘못이고, 그랬으면 당연히 보고했어야 하는데 몰래 집에 은신시키고 부려먹은 것도 잘못이다.”
박희중이 당인을 데리고 온 이유는 간단했다. 중국말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일본말을 배워두었기 때문에 회례사가 됐듯 중국말도 할 줄 알게 되면 요긴하게 쓸 데가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박희중은 자신의 서체를 더욱더 갈고 다듬고자 명필이 허다한 명나라도 가고 싶어 했던 것이다.

 

결국 사헌부 대관들은 회례사의 행실을 문제 삼아 박희중을 탄핵했다. 그러나 세종은 박희중의 공과 과실을 견주어보고는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 뒤 박희중이 명나라 사신 일행으로 갔다 온 뒤 정 3품의 예문관 직제학으로 품계를 올려주었다.

 

성품이 강직한 박희중 역시 대관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런 성품 때문에 박희중은 내직에 있든 외직으로 나가든 오랫동안 대관들과 사사건건 부딪쳤다. 마침내는 남원부사로 내려가 있는 동안 대관들의 표적수사를 받은 끝에 관직을 빼앗기고 향리 진원으로 내려가 후학들을 가르치며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