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고추 400주를 심었다. 지난해보다 60주가 늘었다. 지난해에는 최소한의 농약을 사용하다 보니 탄저병이 와 낭패를 보았다. 그렇다고 농약을 사용을 마구 늘릴 수는 없어서 친환경적인 방법을 더 보강하기로 했다.

 

 

 

살충제를 뿌리는 대신 은행잎을 녹즙기로 짜낸 추출액을 희석시켜 뿌렸다. 식초를 희석해 벌레와 균을 내쫓거나 약화시키는 방법도 사용했다. 나방과 노린재를 퇴치하기 위해 공시 준비로 마침 집에 머물고 있는 아들이 페트병을 잘라 만든 트랩을 고추밭 군데군데 설치했다. 제법 많은 노린재와 나방들이 트랩 속에 담긴 막걸리에 빠져 유명을 달리했다. 이 녀석들이 날아다니며 고추를 공격했다면 그 피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균에 대한 저항력을 늘리기 위해 작년보다 퇴비를 듬뿍 주었다. 고추가 튼튼하게 자라면 병균에 버티는 힘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우리 식구의 먹거리이니 최대한 친환경 농사를 짓기 위해 노력 중이다.

 

풀과의 싸움은 이미 중반전을 넘어섰고, 벌레와의 싸움이 한창 진행 중이다. 정성에 보답이나 하는 듯 고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튼실하게 달려 있는 고추들을 보노라면 저절로 미소가 머금어진다. 제대로 된 농부는 아니더라도, 농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바로 이 흐뭇함 때문에 고되고, 돈도 안 되는 농사를 계속 짓는 게 농심이 아니겠는가.

 

혹시 나방이나 노린재에 쏘여 변색되거나 물렁해진 고추가 발견되면 재빨리 따내야 한다. 다른 고추에게 피해가 옮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400주나 되는 고추를 찬찬히 살피노라면 어느 순간 허리가 뻐근해진다. 엉거주춤 허리를 숙이는 자세가 반복되는데서 오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붉어지는 고추가 하나 둘씩 눈에 띈다. 아직 한 여름인데도 벌써 고추가 영글기 시작한 것이다. 일주일 전부터 고추밭에 고추잠자리가 날아다니기 시작해 철모르는 철부지들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잠자리 녀석들은 벌써 고추가 붉어지는 것을 알아채고 날개 짓을 시작한 것이다. 고추잠자리가 날아다니면 가을이 가까워졌다는 것인데, 참으로 세월은 흐르는 물처럼 빠르다. 하늘이 더 높아지면 창공은 고추잠자리들의 춤사위로 장엄될 것이다.

 

며칠 전 파종한 서리태도 어느새 싹을 틔워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라도 잘못 심었거나 산비둘기가 먹어 빈 곳이 많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빈 곳이 많지 않아 반갑다. 까치가 종자를 심은 구멍을 헤집어 놓으면 산비둘기가 날아와 콩을 집어 먹는다. 새들의 ‘콩 서리’ 장면이 눈에 띄면 소리를 지르며 좇아가지만 나는 새를 당할 재간은 없다. 콩 세 알 중 한 알은 남겨놓기를 바라지만 녀석들 입장에선 어림없는 일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싹이 나지 않은 곳은 따로 길러놓은 모종을 옮겨 심어야 한다. 아무려나, 비닐 덮인 이랑에 줄지어 고개를 내민 서리태 이파리들이 만드는 광경은 말 그대로 장관이다.

 

집 가까이의 이랑에 뿌려놓은 들깨 모종도 파릇파릇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녀석들도 하루가 다르게 자랄 것이다. 들깨 모종이 어느 정도 자라면 그들을 위해 비워놓은 자리로 옮겨 심어야 한다. 늦가을 김장을 위한 배추와 무를 심는 것을 제외하면, 들깨를 심는 것으로 올해의 파종은 얼추 마무리되는 셈이다.
 
고추 밭 한 귀퉁이에 자리한 방울토마토와 가지나무도 생산을 시작했다. 방울토마토는 하루에 10~20십 개씩 따 먹을 정도이니,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양이다. 가지는 지난해보다 한 주 적은 두 주만 심었다. 지난해 세 주의 가지나무에서 무서울 만큼 열리고 자라는 가지의 생산량을 감당 못했던 터라 한 주를 줄였는데, 잘 한 선택인 듯싶다. 가지를 푹 쪄서 손으로 찢어 양념간장에 무친 것을 좋아하는 터라, 아내가 정성껏 만들어 밥상에 올려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밭 아래쪽 길가에 심은 고구마도 줄기와 이파리가 무성해졌다. 2년 전 고구마를 무턱대고 많이 심었다가 캐내느라고 곤욕을 치렀던 탓에 올해는 우리 식구 먹을 만큼만 심었다. 적게 심으니, 수확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아 좋다.

 

새벽 5시면 일어나 밭으로 나가는 아내를 따라 나서 일을 하다보면 서늘한 데도 땀이 구슬처럼 줄줄 흘러내린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 농사를 지어보기는커녕 벼를 ‘쌀나무’라고 불렀던 아내가 이렇게 전문농부가 되어 밭과 어우러져 사는 것을 보노라면 가끔씩 가슴 한 켠이 짠해온다. 몸이 아파 귀촌을 서둘렀지만, 돈 잘 버는 남편을 만났더라면 스트레스도 덜 받았을 것이고 병도 오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산골에 살면서 건강도 좋아지고 표정도 밝아지긴 했지만, 일주일에 한번은 시내 한의원을 찾아 물리치료를 받고 침을 맞으니 늘 미안한 마음이다.

 

산골의 일상은 단조롭다. 그러나 그 단조로움 속에서 늘 새로운 경우와 부딪친다. 그러므로 농사에는 왕도가 없다. 그때그때마다 가장 적합하고 적절한 방법을 찾아내 적용해야 한다. 그 방법을 터득하기까지의 시간이 ‘산골 적응부담금’인 셈이다.
저녁시간 일을 마치고 삽과 괭이 등 쟁기를 짊어진 채 왜죽왜죽 집으로 향하면 제집인 양 늘 우리집 마당에서 노니는 건넛집 개 두 마리가 종종종 뒤를 따른다. 어릴 적 물렸던 아픈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어 개를 좋아하지 않는 걸 육감으로 아는지 녀석들은 꼬리를 흔들면서도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그래도 며칠 보이지 않으면 궁금해지니, 시나브로 이 녀석들과 정이 들었다.

 

낮이 긴 여름이라 저녁나절도 길다. 어둑해질 무렵 마당으로 나가 솔솔 불어오는 남풍을 맞이하면 마음까지 청량해진다. 이 또한 당진살이가 주는 쏠쏠한 기쁨 가운데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