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읽는 소리에 감동된 범
한하계의 말기에 <육화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큰 바위 하나가 있는데 그 서쪽 상관음봉 줄기에는 오뚝하게 부처가 앉은 모양과 같은 <상관음바위>가 있으며 동쪽 문주봉 중턱에는 마치 범이 쭈그리고 앉아 내려다보는 것 같은 <범바위>가 있다.
백호미술창작사 1급화가 배영걸
이 범바위에는 그럴듯한 전설이 깃들어있다. 옛날 세지붕 꼭대기에는 금강산의 만물상을 보호하는 <신령>이라는 범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만물상 골 안을 오르내리면서 만물상을 지키고 있던 범은 어느 날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세지붕과 잇닿은 문주봉 마루에 가 보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범은 한하계곡에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와 수정같이 맑은 물에 취해서 한참동안 서 있는데, 문득 물 생각이 났다.
물을 찾아 문주봉 줄기를 따라 아래로 성큼성큼 내려오던 범은 건너편 상관음봉에 있는 <상관음바위>를 보자 사람인줄로만 알고 길을 피하려고 하였다.
이때 아래골짜기로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사람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범이 목을 쭉 빼들고 자세히 살펴보니 웬 사람이 큰 바위위에 앉아 건너편 <눈꽃바위>를 바라보면서 흥에 겨워 시를 읆고 있는 것이었다. 호기심에 끌려 건너편을 바라보니, 삐쭉삐쭉 모가 난 휜 바위벽이 달빛에 비껴 눈꽃과 같았다.
만수대창작사 1급화가 송철준 '금강산 신내계곡'
그러자 범은 <저같이 아름다운 경치는 만물상에서도 보기 드물지 않는가. 과연 감탄할만도 하다>라고 하면서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더욱이 그 황홀한 경치에 매혹되어 침식도 잊고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 감동된 범은 <나는 금강산의 만물상을 지키는 신령으로 금강산을 저 사람처럼 정열적으로 사랑해본적은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하였다.
범은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러운 감도 있고 그동안 자기의 행동에 대한 자책감도 있고 하여 만물상으로 다시 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범은 줄곧 그 자리에 앉아 글 읽는 사람만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범은 쭈그리고 앉은 채 돌로 굳어지고 말았다.
이때 <육화암>이라는 큰 바위위에서 시를 읆던 사람이 바로 양봉래라고 전한다
봉래 양사언의 초상
*이 전설은 달밤의 한하계의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범바위>와 결부시킨 이야기로서 여기에 양봉래하는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가 활동했던 16세기 후반기 이후에 꾸며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