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農事)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다. 농사의 ‘農’자는 ‘曲’자와 ‘辰’자의 합으로 곧 우주를 노래하는 뜻을 담고 있다. 별을 뜻하는 ‘신’자는 태양과 달의 황경이 일치될 때를 말한다. 농사가 우주라는 공간과 시간과 어우러져 노래하는 더 없이 숭고한 행위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왜 옛 선인들은 농사에 노래를 뜻하는 ‘곡’자와 별, 즉 우주를 의미하는 ‘신’자를 끌어들였을까. 그것은 직접 농사를 지어보면 알 수 있다. 솔직히 나는 아직 초보농사꾼이라 이유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지만, 충분히 그럴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가는 중이다.

날이 더워지면서 새벽시간과 해가 서산에 걸리는 저녁나절에나 밭에 나간다. 마을 방송에서도 뜨거운 시간에 논밭에 나가는 일을 삼가달라고 권한다. 단순한 일상이지만, 이렇게 농사가 시공간에 걸쳐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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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수확한 마늘

이른 새벽, 쟁기를 들고 밭으로 나가면 싱그러운 새들의 울음소리가 왁자하다. 이따금씩 수꿩의 ‘깨는’ 비명소리가 잡석처럼 섞이곤 하지만 동트기 전 만생명의 원천, 일출을 찬탄하는 교향악이 아닐 수 없다. 며칠 전부터는 소쩍새도 합창단에 합류했다. 온갖 새들의 새벽 합주는 저녁나절 공간을 메우는 개구리들의 합창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우리 마을은 아니지만, 남도의 어떤 농부는 모내기가 끝난 논에 30~50센티미터마다 삼각대형으로 대나무 통을 꽂아놓는다고 한다. 목성의 기운을 끌어들이는 대나무를 꽂아둠으로써 음지의 기운과 양지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들여다볼수록 농사는 아무렇게나 짓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파종과 김매는 시기, 수확을 하는 시기가 우주의 변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농촌에 살다보면 날을 받아 농사를 짓는다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된다. 옛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데 60갑자를 널리 활용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람에게 사주가 있듯이 식물에게도 사주가 있을 것인데 함부로 날을 잡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해가 쉬워졌지만, 농사가 달을 비롯해서 내혹성, 외혹성들의 공진과 자전 등 천체의 흐름에 따라 역동하는 우주의 기운이 대지에 흡수되어 지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섭리를 잘 활용한 숭고한 몸짓이었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생경하다.

엊그제, 감자와 마늘을 수확했다. 수확의 시기는 대개 가을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감자와 마늘을 캐낸 자리에는 곧 메주콩과 들깨가 들어설 것이다.

몹시 가물었던 작년과는 달리 올해에는 적당하게 비가 내려주었다. 빗물과 이슬만 먹고도 제법 감자농사가 잘 되었다. 친환경 농사로 수확한 감자라는 것을 아는 지인들의 요청으로, 적은 양이지만 정성껏 수확한 감자는 하루아침에 우리 집을 떠나갔다. 지난해 11월 심어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마늘도 제법 잘 여물었다. 수확한 마늘을 말리기 위해 비닐하우스 안에 가지런히 펼쳐놓으니 장관이다. 값을 따지면 몇 푼 되지 않지만 수확을 마친 농부의 보람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이다.

정성껏 밭을 일구고, 파종하고, 김매고, 바람에 쓰러지면 일으켜 세웠던…, 그리고 언제나 비가 올까 하늘을 쳐다보았던 숱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알토란같은 마늘을 바라보는 우리 집 대표농부 아내의 표정에는 감동이 깃들어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아이를 낳은 엄마의 느낌이 이런 것과 비슷한 건 아닐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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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묘재의 노을

여름 수확을 하고 보니 좋아하는 시 ‘대추 한 알’이 떠오른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의 시 ‘대추 한 알’ 전문

빨갛게 영근 대추 한 알을 보고 시인은 우주의 기운이, 아니 우주가 그 안에 깃들어 있음을 간파하고는 이렇게 절창을 토해낸 것이다.

어디 대추뿐이겠는가. 어느 것 하나 저절로 영그는 건 없다. 다 그 안에 태풍과 천둥 번개, 달빛과 햇빛, 눈과 무서리, 안개와 아지랑이의 기운이 섞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농산물에게는 마땅히 ‘메이드 인 유니버스’라는 훈장이 수여되어야 할 것이다.

몇 해 농사를 짓다보니 자연스럽게 ‘먹거리’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그냥 된 것은 없다는 생각이 절절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옛날 스님들이 주경야선을 했던 것이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최고의 공부과정이었던 것이다.

온갖 정성 두루 쌓인 이 공양을

부족한 덕행으로 감히 받는구나.

탐심을 버리고 허물을 막고,

바른 생각으로 육신 지탱하는 약을 삼아

도업를 이루고자 이제 받아먹노라.

計功多少量彼來處

村己德行全缺應供

防心離過貪等爲宗

正思良藥爲療形枯

爲成道業膺受此食

스님들이 공양(식사)하실 때 합송하는 오관게(五觀偈)가 농사를 지어보니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인지를 알겠다. 기자 시절 인터뷰 했던 고승들이 왜 그렇게 하나 같이 시은(施恩)을 두려워했는지도 새삼 감동으로 밀려온다. 시은을 허투루 여기는 가승이 판치는 이 수상한 시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