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가까이 사는데도 문득 저녁 바다가 보고 싶어 서해에 왔다. 꾸지나무골해수욕장 부근이다. 서해바다는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낙조(落照)가 일품이다. 낙조에는 굳이 명소가 필요하지 않다. 정초에는 일출을 본다며 사람들이 동해로 몰려가지만 서해낙조는 365일 묵묵히 한결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제법 많은 봄비가 내린 끝이어서 마침 미세먼지도 물러갔고, 황사도 한풀 기가 꺾인 터라 평소보다 멋진 낙조를 만날 수 있으리라. 

 

 

곧지 않아도 당당한 해송(海松) 사이로 낙조가 시작되고 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해의 주변은 사프란 꽃 색깔로 장엄하게 물들었다. 해가 수평선에 가까워질수록 노을빛이 짙어지는 건 온종일 세상을 밝힌 뒤 노곤해진 몸을 추스르는 단심의 색깔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오염시키는 탐진치(貪瞋痴) 삼독은 어두움(無明)에서 비롯된 것이니, 오늘 하루 누리를 환히 밝힌 저 해를 부처님(대일여래)으로 부르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솔잎을 헤치고 달려와 온몸을 감싸는 석양빛이 부처님 품안처럼 따사롭다.
  
일출은 ‘시작’과 ‘희망’을 상징하지만, 낙조는 ‘완성’과 ‘회향’을 의미한다. 시작과 희망만을 바라보는 세상은 역동적이지만 동시에 막막하다. 더러는 완성이나 회향도 입에 올려줘야 세상이 편안하고 너그러워지는 법이다. 고은 시인이 그의 시 ‘낙조’에서 ‘영웅’을 원하지 않고 ‘영웅적인 세계’를 원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벗이여 나는 영웅을 원하지 않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영웅적인 세계 그것이네

 

지금 그 세계가 우리들의 손을 떠나서 이루어지고 있네

 

벗이여 이제는 술조차 필요치 않네
                                      -고은 시 ‘낙조’ 전문

 

낙조는 넉넉하다. 낙조는 박찬호나 박지성, 김연아의 출현에서 느꼈던 돌출적 스타의 이미지가 아닌, 월드컵 응원이나 촛불혁명에서 보았던 집단적 어우러짐의 감동을 가져다준다. 일출의 감동은 백제대향로나 고려청자, 석굴암에서 보듯 신이한 솜씨로 빚은 천하명품이 주는 환희와 같아서 뭔지 모를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낙조는 이름 모를 조선의 도공들이 빚어낸 막사발에서 느끼는 집단 미의식이나, 민초들이 토닥토닥 다듬어 조성한 마을미륵의 푸근함으로 다가온다.
 
서해낙조를 보고 있노라면 추억이 파노라마가 되어 아련히 흐른다. 어느덧 이순(耳順)이 가까워지다 보니, 하나 둘, 세상을 떠난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지병이 생겨 고생하는 동무들도 부쩍 늘었다. 인생을 하루해에 비유하면 내 나이는 막 낙조가 시작되는 시기쯤 될 것이다. 이마 주름이 시나브로 깊어지고, 머리는 하얗게 세었다. 동창들 모이면 머리카락 수를 놓고 놀리거나 부러워하는 정경이 일상이다. 예전에는 말술을 먹던 녀석들이었지만 어느새 소주 한 병 훌쩍 해치우는 놈 찾기가 어렵게 됐다.
아들딸이 명문대를 진학하면 한 턱을 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자식 취직과 결혼이야기가 주요 화제가 되었다. 인생의 낙조가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이제 며칠 후면 ‘부처님오신날’이다. 불자들에게는 최대 경축일이지만,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적주(賊住)들이 절집에 넘쳐나다 보니 올 ‘부처님오신날’의 기상도는 역시나 잿빛이다. 서해낙조를 바라보며 어쩌면 이 땅의 불교가 처한 운명이 저 낙조에 비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지는 해처럼 때가되면 미련 없이 사라질 줄도 아는 안목들이 우리 절집 안에도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부처님의 이름은 열 가지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 선서(善逝)라는 이름이 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의 언덕(彼岸)에 이르러 다시는 삶과 죽음의 고통 속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삶을 완전하고 아름답게 마무리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선서를 기준으로 보면 잘 죽는 연습이 수행이요, 잘 죽는 것이 해탈과 열반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한국불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이 가슴을 갑갑하게 한다. 진퇴의 적기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는 해를 붙잡아보겠다며 바둥거리는 일부 명리승(名利僧)들의 모습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교단의 엄중한 상황을 짐짓 외면하며 명리승들이 활개칠 수 있도록 여건을 제공하고 있는 나머지 승려들의 비겁함은 또 어쩌랴. 이들에게는 저 낙조가 들려주는 대법문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떠오르는 해는 눈 부셔 정면으로 바라보기 어렵지만, 낙조는 편하게 바라볼 수 있다. 일출의 빛은 날카롭지만 낙조의 빛은 부드럽고 넉넉하다. 그래서 시인 김완하는 그의 시 ‘서해 낙조’에서

 

 “(전략)…

 

서해, 하루는 붉게 달아올라
큰 바다 비로소 받아 안는 해의 몸
길에서 바다로, 다시 파도 속으로
너에게로 오롯이 이어져
가슴속에 등불 하나 살아 오른다”고 노래했는지도 모른다.

 

올 ‘부처님오신날’엔 김완하 시인이 노래한 시어처럼, 내 ‘가슴속에 등불 하나’ 밝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