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5회>

 

 

신미는 차츰 현등사의 승려로부터 말하기를 꺼려하는 조선불교의 현실을 알게 되었다. 함허는 이따금 임금이 불교를 배척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승도들의 타락에 있다고 탄식했다. 태종은 아버지인 태조, 형인 정종과 달리 드러내놓고 배불정책을 폈다. 그는 젊은 시절 과거시험에 3등 급제한 수재로 유학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 연유로 태종은 임금이 되기 전부터 승려보다는 유학자들과 친교가 빈번했던 것이다.

 

정종 재위시기만 해도 큰 저잣거리마다 고려시대부터 해오던 경행(經行)이 있었다. 경행이란 수백여 명의 승려들이 수레나 가마에 부처를 모시고 불경을 외우면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행사를 일컬었다. 경행은 저잣거리의 사찰인 복을 비는 자복사(資福寺)가 주관하기 마련이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오색의 번(幡)들이 거리에 내어걸리고 소라껍질로 만든 나각(螺角) 소리가 요란한 매년 2월과 8월의 경행 날은 수많은 백성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승려들을 뒤따르며 복을 빌었다.

 

그런데 태종은 백성들이 마음으로 의지하는 저잣거리 자복사(資福寺)들을 의정부 대신들의 청을 받아들여 없앴다. 유교를 숭상하고자 하는 배불정책의 일환이었다. 이에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자, 무마책으로 자복사의 일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사찰을 지정하여 대신하게 했다. 저잣거리 사찰을 산중으로 추방해버린 셈이었다. 또, 사간원의 상소를 받아들여 승려들이 예부터 지내왔던 각 고을의 풍요를 기원하고 재앙을 물리치고자 지내는 진산(鎭山) 제사를 중지시켰다.

 

그러면서도 태종은 자식이나 왕족의 복을 비는 일에는 관대하여 의정부 대신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자복사나 진산제사에 대소 신하들에게는 접근을 엄금하면서 자신은 형편에 따라 불교와 유교 사이를 왔다갔다 했기 때문이었다. 자식들 중에 가장 애지중지했던 넷째아들 성녕이 14살에 죽자, 진관사에서 바로 수륙재를 베풀었고 성녕의 무덤 앞에 능찰인 대자암(大慈庵)을 짓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수륙재를 지내기에 앞서 문장가 변계량(卞季良)이 태종의 애끓는 마음을 표현하였던 바, 동부대언(同副代言) 성엄(成揜)이 명을 받들고 진관사로 가서 읽었던 그 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아아! 목숨의 길고 짧은 것이 가지런하지 아니함은 천명(天命)이니 바꿀 수 없고, 부자의 지극한 은정(恩情)은 천성이니 그만 둘 수가 없다. 이것은 사람이 본래부터 타고난 바이지만 운명에 앞서 정해진 것이다. 생각하건대, 네가 태어난 때는 을유년이었으니 이제 14살, 너는 일찍이 하루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내가 수라를 들고자 하면 네가 반드시 먼저 맛보았고, 내가 활 쏘는 것을 구경하고자 하면 네가 반드시 따라 나서 수행하였고, 모든 움직임에 반드시 너와 함께 하였던 바, 이제는 그럴 수 없으니 무엇으로 허전한 내 마음을 위로하겠느냐?

 

아아! 슬프도다. 모습이 단정하고 깨끗하여 아무런 흠결이 있지 않았으며, 네 행동은 총명하고 온아하고 효제(孝悌)함뿐이었고, 때때로 글을 읽어 익히고, 활쏘기를 배워서 자주 과녁을 맞추었느니라. 나는 네게 장가를 들도록 하였고, 대군으로 봉하였으니 장차 어른이 되어 나의 쇠노(衰老)함을 위로하리라 여겼거늘 아아! 이제 그럴 수 없으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네가 처음 병들었을 때 어린 아이들의 흔한 일이라 생각하였으나 병이 이미 위독하여져 비록 후회하였지만 어찌 미칠 수 있었겠느냐? 기도하며 묻노니 궐(闕)했음인가? 의료(醫療)가 잘못되었음인가? 희디 흰 네 얼굴이 눈에 항상 선하고, 낭랑한 네 목소리는 아직도 귓전에 쟁쟁하다.

 

아아! 슬프도다. 나와 중궁(中宮)이 네 죽음을 두고 통곡하나 또한 이제 그만이로다. 너는 효성으로써 죽음에 임하여서도 어버이를 생각하였으니 한을 품음이 구천지하(九天地下)에서도 그만둠이 있겠는가? 너는 나의 아들이 되어서 이미 효도하였고 또 재주가 있어서 자식의 직분을 싫어하지 않았다. 목숨의 길고 짧음의 운수는 실로 하늘에서 나오는 바, 너의 죄는 아니니 네가 어찌 그것을 한스럽다고 해야 되겠느냐? 나는 네 아비가 되지만 염(殮)에서 옥과 이부자리를 볼 수 없었고, 빈(殯)에서 관을 어루만져보지 못했고, 또 광(壙)에 임석할 수도 없었으니 천 필 수레의 군주라고는 하지만 도리어 필부의 자식 사랑함만 같지 못하도다. 내가 정(情)을 잊어서가 아니라 사세(事勢)가 그렇게 만드니 내가 한스럽다고 하는 바이지만 그것이 또 어찌 최상의 모습이겠는가?

 

아아! 슬프도다. 이에 신하에게 명하여 너의 직질(職秩)을 높이고 너에게 시호를 주어 은수(恩數)의 융성함을 상례보다 다르게 하리라. 이제 근신(近臣)을 보내어 진관사에서 수륙재를 설치하여 명복을 빌고, 또 치부(致簿)하고 전(奠) 드려 말로써 권하여 흠향하게 한다. 아아! 말에는 다함이 있으나 정(情)에는 끝이 없는데, 너는 그것을 아는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가?’

 

 

 

실제로 태종은 교서를 살펴보면서 반쯤 이르러 자신도 모르게 흐느껴 울어서 끝까지 읽지 못한 채 “나의 정의(情意)는 다하였도다!”라며 물리쳤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남에게는 엄하고 자식에게는 관대한 것이 인지상정인 것이었다.

 

아무튼 불교를 억압하던 시대에도 일부 사찰만은 왕권의 비호 하에 예외였으니 그곳에는 절의 노비나 사전(寺田), 진귀한 음식과 술, 호화로운 의복 등이 넘쳐났다. 그러나 청빈이 멀어지면 타락이 찾아오는 법이었다.

 

세종 1년 11월.

 

마침내 사헌부에서 계를 올렸다.

 

<진관사 중 사익(斯益)이 절의 여종을 간음하였는데 주지 연징(演澄)이 단속하지 못했으니 모두 불러들여 문초하소서.>

 

사익의 타락은 함허도 알고, 경기도 사찰의 승려들이 다 듣고 있는 씁쓸한 소문이었다. 사헌부의 계가 세종에게 보고된 지 불과 12일 만에 사간원에서도 철저하게 암행 조사하여 글을 올렸다. 그만큼 타락한 승려와 여종과의 간음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석씨(釋氏; 석가모니부처님)의 교는 청정을 으뜸으로 삼는 까닭에 고행걸식하고 안일과 포식을 구하지 않는 것이 그 도입니다. 주지된 자가 백성에게 얻은 것으로 방자하게 안장 차린 말을 사고 의복과 술, 식비로 쓰고 있으며 도징(道澄), 설연(雪然)과 같이 스승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절의 계집종을 간음하여 스스로 계율을 어겼으니 진실로 절의 노비를 혁파하여 불도를 다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오나 해마다 싸여진 폐습을 갑자기 혁파할 수 없으므로 다만 절을 줄이고 노비의 수를 정하여 10리 밖에 살게 하되 계집종은 절에 들어가서 일하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이는 중들이 음욕에 빠지지 않게 하고자 함입니다.

 

회암사와 진관사는 이름난 절인데도 사익과 성주(省珠)는 절의 계집종과 간음하다가 발각되어서 도망하였고, 정후(正厚)와 신각(信覺) 가휴(可休)도 또한 계집종을 간음하였다고 하니 그 음욕을 자행한 것은 도징과 설연보다 심한 것입니다. 회암사와 진관사가 이러할진대 하물며 다른 절의 중이겠습니까. 중은 이미 어버이를 이별하고 애정을 끊었으니 비록 부모의 노비라 할지라도 부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절의 노비를 혁파하고 중들의 노비도 본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그 스승의 청정한 가르침에 부응하게 하소서.>

 

신미는 함허가 왜 서울 도심에 있는 왕가의 원찰로 가지 않고 깊은 산중의 절에만 주석하는지를 깨달았다. 왕실의 지원을 받는 서울의 저잣거리 사찰은 무엇이든 부족한 것이 없을 만큼 넘쳐났지만 한쪽에서는 부패한 냄새가 진동했던 것이다.

 

함허는 유독 현등사에 주석하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영민한 신미는 함허가 산승(山僧)으로 살고자 하는 이유를 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눈치챘다.

 

달빛 밟다 우러르니 산은 첩첩하고
바람 좇아 귀 기울이니 물이 차갑다
도인의 살림살이 다만 이와 같으니
어찌 구구하게 세상인정 따르리오.

 

步月仰看山疊疊
乘風俯耳水冷冷
道人活計只如此
何用區區順世情

 

어느 날 신미가 범자 자모를 외워 바치자, 함허가 만족한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미야, 내가 왜 호의호식하는 서울의 절로 가지 않는지 알겠지?”

 

“저도 스님의 길을 따르겠습니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다. 그러니 너의 길이 따로 있다. 중은 혼자 가는 사람이니라.”

 

“스님, 이제 또 어디로 가시렵니까?”

 

“보조국사께서 계셨던 남쪽 끝에 있는 송광사다.”

 

“저도 따라가 시봉하고 싶습니다.”

 

“방금 내가 뭐라고 했느냐?”

 

“중은 혼자 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알았으면 됐다.”

 

다음해, 함허는 신미를 현등사에 남겨두고 떠났다. 함허는 누구보다도 흐트러진 승가를 청정한 구도집단으로 거듭나게 했던 보조의 가풍을 흠모했다. 현등사로 와 주석한 것도 보조의 자취를 좋아해서였다. 절에는 보조국사가 현등사를 중창하면서 건립한 지진탑이 있었다. 함허가 보조의 가풍을 좇아 송광사로 내려간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