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밖을 나서면 윙~ 하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꽃 찾아 날아온 꿀벌들 웃음소리다. 앞뜰 매화꽃으로 모여들던 꿀벌들이 이제 뒤란의 복사꽃으로 자리를 옮겼다. 온 동네 벌이 다 우리 집 복사꽃으로 몰려온 듯싶다.

 

 

 

매화꽃 지니 복사꽃이 절정이다. 봄꽃은 이른 봄부터 늦봄까지 차례로 핀다. 동백, 매화,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에 이은 복사꽃의 개화 시기는 봄꽃 가운데 늦은 편이다. 그러다보니 꿀벌들 마음도 바빠진 모양이다.

 

벌과 꽃은 서로에게 이익을 주는 윈-윈(win-win) 사이다. 꽃씨를 만들기 위해서는 꽃가루가 옮겨져야 하는데, 꿀벌이 꽃가루받이 역할을 해준다. 꽃가루받이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지만 대부분은 곤충과 바람에 의존한다. 벼, 옥수수, 소나무, 은행나무 같은 식물은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공중을 떠다니다가 우연히 암술머리에 닿으면 꽃가루받이가 이루어진다. 꽃들은 바람보다 곤충들에게 꽃가루받이를 맡긴다. 꽃가루를 옮기는 곤충에는 벌, 나비, 딱정벌레, 나방 등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벌과 나비가 으뜸이다.

 

꽃가루 옮기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면, 곤충은 보답으로 꽃으로부터 맛나고 영양가 풍부한 꿀과 꽃가루를 제공받는다. 꿀벌은 제 먹이뿐 아니라 애벌레와 여왕벌을 위해 꿀과 꽃가루를 가느다란 뒷다리에 매달고 집으로 나르기도 한다. 봄날, 꿀벌의 다리와 몸이 온통 노란 꽃가루로 뒤덮여 있는 이유다. 꿀벌의 뒷다리에는 긴 털이 촘촘하게 나 있어 꿀이나 꽃가루를 묻혀 나르는데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꽃이 씨를 맺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꿀벌이 환경오염과 파괴로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제때 꽃가루받이를 못해 씨를 맺지 못한 꽃이 늘어나고 있고, 야생화도 함께 줄어드는 중이다.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농사에도 치명적 피해도 예상된다. 꽃과 벌의 공생관계, 이 아름다운 관계는 이처럼 자연생태계의 보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고, 우리 사람들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셈이다.

 

부처님도 꿀벌과 꽃의 아름다운 관계에 대해 잘 파악하고 계셨다. 부처님은 출가 수행자들에게 “꿀벌처럼 살라”고 가르치셨다. 올바른 수행자인 비구는 사회로부터 최소한의 것을 취하고 많은 것을 되돌려주는 최상의 이타주의자여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꽃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꿀을 취하는 벌처럼, 성자는 마을에서 그와 같이 행동해야 한다.” <법구경>

 

세속의 즐거움을 포기한 진정한 비구는 비구 생활의 범위 내에서 사심 없이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마음의 해탈을 얻으려는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청빈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라는 가르침이다. 출가 수행자가 세속 사람들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 그 기준을 꽃과 꿀벌의 예로써 설명하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이런 가르침이 출가자의 수행환경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재가자라고 해서 고귀한 삶을 살 수 없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재가자로 살아가면서도 변덕스러운 마음을 길들일 수 있고, 감각적 욕망의 탐닉과 성적인 욕망과 자극을 제어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출가자들이 즐기는 완전한 청정에 도달할 수 있다. 수많은 재가 선지식들이 이를 잘 입증한 바 있다. 많은 재가자들이 무심코 내뱉는 ‘금생엔 틀렸고, 내생에 출가해서 제대로 공부하겠다’는 따위의 핑계로 할 일을 미루지 말아야 한다. 

 

과실수의 꽃 중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은 단연 복사꽃이다.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보듯 예로부터 이상향(理想鄕)을 상징했던 복사꽃은 유난히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옛날에는 집안에 복숭아나무를 즐겨 심지 않았다. 복사꽃이 피면 그 화사한 꽃 색깔과 은은한 향기에 취해 과년한 딸이나 갓 시집 온 며느리의 춘정(春情)이 동(動)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사실 나는 그동안 복사꽃을 보면 김선우 시인의 시 ‘도화 아래 잠들다’를 떠올리곤 했다.

 

“…/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김선우 시 ‘도화 아래 잠들다’의 마지막 부분.

 

절창이라 불러도 좋을 빼어난 시다. 하여, 오묘한 감흥을 일으키는 분홍꽃잎을 볼 때마다 읊조리듯 이 시를 웅얼거렸던 버릇은, 벌과 꽃과 어우러진 산골살이를 하면서, 또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반추하면서 시나브로 사라졌다.

 

절정을 지난 복사꽃잎이 한잎 두잎 날린다. 봄비 내리니 말 그대로 꽃비다. 이 비 그치면 저 화사한 꽃잎은 절반이상 지고 말 것이다. 어느 시인은 낙화를 보며 “꽃비는 내리고 지랄이야!”라며 안타까워했으나, 꽃 져야 이파리 돋고 열매 맺는 것이니, 오래 끌 미련은 아니다. 저 꽃잎이 한 달 두 달 지지 않는다면 그 또한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무상(無常)에서 희망과 기쁨을 찾으려면 맹춘(孟春)이 적기다. 산하대지 두두물물(山下大地 頭頭物物)이 그대로 법왕의 사자후라는 화엄의 가르침이 뇌리에 게송처럼 어른거린다. 

 

봄꽃 시듦을,
꽃비 내림을 설워 말라.

 

꽃잎 떠난 자리에 파릇파릇
연둣빛 이파리의 찬란한 부상!

 

그대여, 그리운 임 간절하거든
봄날의 무상법문에 귀 기울이라. 
                   - 졸시 ‘봄의 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