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동영
<제6장> 1회
나마스테
룸비니불교대학 학생이 된 선융의 모습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했다. 1년이 지난 뒤부터는 구레나룻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머리는 삭발하지 않은 채 힌디수행자처럼 상투를 틀어 올렸다. 잿빛 승복만 한국스님의 것일 뿐이었다. 선융의 산스크리트어 실력은 선융보다 3년 먼저 입학한 로렌과 시몬보다 뛰어났다. 선융은 놀랍게도 산스크리트어에 대한 재능이 탁월했던 것이다.
로렌이나 시몬은 아직도 산스크리트어로 된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을 더듬거리며 외웠지만 선융은 목탁을 치며 능숙하고도 리드미컬하게 독경을 했다. 로렌이나 시몬은 선융의 독경이 천상의 음악소리처럼 아름답다고 부러워했다. 그들은 경전을 책 읽듯 했지만 선융은 목탁을 치며 장중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선융의 타고난 능력은 결코 아니었다. 서래사에서 독경할 때 목탁을 치며 체득한 리듬감의 결과였다.
선융의 독경소리에 특히 반한 사람은 로렌의 부모였다. 몇 달 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로렌과 함께 그의 부모가 사는 오스트리아의 고도(古都) 크렘스에 갔을 때였다. 크렘스는 한국으로 치자면 경주 같은 오래된 도시였다. 로렌의 부모 집은 크렘스 시가지에서 한참 떨어진 과수원과 농장들이 산재한 변두리에 있었다. 로렌의 부모 집 정원 앞으로는 방풍림 같은 숲이 조성된 작은 언덕이 보였고, 언덕 너머에는 도나우 강이 흐르고 있었다. 토성의 흔적처럼 보이는 언덕은 강둑인 셈이었다. 언덕 벤치에 앉아 있으면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공무원이었다가 정년퇴직한 로렌의 아버지는 꽃을 가꾸기를 좋아했다. 정원은 붉고 흰 장미꽃이 만발해 있었다. 정원 한쪽에는 로렌의 어머니가 정성들여 키우는 허브의 일종인 펜넬과 양배추를 닮은 엔다이브가 자라고 있었다. 현관에 작은 온실이 있는 것을 보면 화초를 사랑하는 로렌 부모의 성정을 알 수 있었다. 공무원 생활을 한 로렌의 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크렘스에 집을 사서 눌러앉게 된 이유는 농장주와 과수원 농부들과 헤어지기 섭섭했고, 마침 예전의 수도원이었던 땅이 매물로 나온 것도 로렌의 아버지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말했다. 누구라도 정착하고 싶은 땅이었을 것 같았다. 온화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집을 감싸고 있었다. 집 앞에 도나우 강이 흐르는 데다 마당과 정원이 농장의 일부처럼 다소 산만해 보이지만 어딘지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로렌의 어머니는 아주 활동적이었다. 크렘스에서 오스트리아 수도인 빈까지 출퇴근하며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직함은 회장이었다. 선융은 빈에서도 로렌과 함께 며칠을 보냈었다. 숙소는 대학교 주변 한적한 주택가에 있었다. 로렌의 어머니가 구입한 숙소로써 리모델링하여 생활하는 데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두 개의 방과 화장실, 주방, 벽난로가 있는 거실까지 갖추어져 도심 속의 별장 같았다. 로렌의 어머니 회사는 빈 시가지를 흐르는 도나우 강 너머에 있었다. 선융이 묵었던 숙소는 로렌의 어머니가 개인적으로 휴식을 취하고 싶거나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내주곤 했던 주거공간이라고 했다.
선융이 그 숙소에 머물면서 놀란 것은 두 가지였다. 거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큰 불상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로렌의 어머니는 부활절에 성당의 꽃꽂이 장식을 혼자 맡아 할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것이다. 선융이 로렌에게 묻자 로렌이 오히려 반문했다.
“여기서 불상을 보다니 놀랍군요.”
“이상한가요? 우리 가족들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어머니가 사업차 인도에 갔을 때 눈에 띄어 사셨답니다. 부처님은 인류의 스승이니까요. 우리 가족들에게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습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숙소 밖 골목 끝에 있는 건물 때문이었다. 베토벤이 잠시 살다가 운명했던 건물이라고 로렌이 말했다.
“그래서 여기 거리 이름이 ‘베토벤 갓세’예요. 갓세란 거리란 뜻입니다.”
선융은 대학시절 한때 베토벤 음악에 심취했던 적이 있었으므로 매우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갓세’는 길을 가자고 권유할 때의 한국말 ‘가세’와도 흡사해 잊히지 않았다.
그러나 선융은 냉기가 일렁이는 빈의 그 숙소보다 크렘스 로렌의 부모 집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크렘스의 집은 강이 가깝게 있었기 때문에 공기가 건조하지 않고 촉촉했다. 더구나 숲 그늘은 하루 종일 침묵이 응집해 있었고 밤은 더 매력적이었다. 로렌 부모는 선융에게 2층 방을 내어주었는데 한 칸은 서재였고, 또 다른 한 칸은 침실이었다. 침실 지붕에는 햇살이 들어오는 유리창이 있었다. 밤에는 그 투명한 창을 통해서 별빛이 쏟아졌다.
로렌 부모는 선융을 위해 가든파티를 가끔 열어주었다. 이웃 농장 주인들을 초대할 때마다 선융은 로렌 부모의 요청으로 목탁을 들고서 독경을 했다. 모두가 선융의 독경 소리에 반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거룩한 음악이라고들 평했다. 선융의 독경 소리는 크렘스에서 단박에 유명해지고 말았다. 하루는 정원이 가득 찰 만큼 로렌 아버지의 지인들이 초대받아 왔는데, 로렌이 선융에게 미안하여 울상을 지었을 정도였다. 농부, 의사, 화가, 교수, 엔지니어, 신부, 수녀 등등 직업도 다양했다. 선융은 로렌 아버지의 소개로 단상으로 올라가 초대받은 손님들을 향해 먼저 합장하고 말했다.
“나마스테.”
로렌이 통역을 했다.
“나는 이 우주를 담고 있는, 빛의 존재인 당신을 존중합니다.”
로렌이 ‘나마스테’를 통역하자 손님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마스테와 같은 정중하고 거룩한 인사를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선융이 목탁을 치면서 <반야심경>을 산스크리트어로 독경했다. 선융이 내는 중저음의 독경 소리는 손님들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때마침 구름을 헤치고 나온 보름달 달빛이 선융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런 때문인지 선융의 독경 소리는 천상의 음악처럼 지고지순했다. 손님들이 음악회에 온 듯 선융의 독경을 다시 박수로 요청했다. 선융은 또 다시 <반야심경>을 독경했다. 이번에는 한국어로 했다. 그날 밤 가든파티가 끝났을 때 로렌의 아버지가 선융에게 다가와 한 마디 했다.
“오늘 밤 이곳의 주인은 당신이었소.”
“아닙니다. 이곳에 오신 모든 분들이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독경을 했으니까요.”
선융으로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그런데 선융은 자신이 독경을 하는데 특별한 음성이나 재주가 있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어쩌면 산스크리트어의 아름다움이 독경 소리로 발현되는지도 몰랐다. 산스크리트어의 발음은 영어나 독어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시적이면서도 따뜻하고 슬픈 울림이 있었던 것이다.
로렌은 겨울방학 때도 크렘스로 가자고 했지만 선융은 거절했다. 작년에 진공스님 일행과 가보지 못했던 부처의 유적지를 순례하고 싶어서였다. 반드시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은 기원정사(제타와나)였다. 그 다음은 라즈기르의 나란다대학 유적지나 카필라성이 멸망한 뒤 샤카족이 피난을 갔던 상카시아였다. 로렌은 틈만 나면 말했다.
“선융스님, 크렘스에 계시는 부모님이 기다리십니다. 스님의 독경 소리를 듣고 너무 행복했답니다.”
“인도는 10월부터 1월까지 순례하기 좋아요. 부처님 성지를 가보고 싶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요. 시간이 나면 아쇼까 왕의 아들과 딸이 불법을 전했던 스리랑카까지 다녀오고도 싶고요.”
로렌과 시몬은 선융을 이제는 아예 스님이라고 호칭했다. 승복을 늘 입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몬은 때때로 웃으면서 ‘사두’라고 불렀다. 상투를 튼 머리만 보아서는 영락없는 힌두 수행자 사두나 다름없었다.
“사두, 곧 방학인데 말씀하신 대로 제타와나(기원정사)를 가시겠군요.”
“그래요. 로렌과 시몬은 고향으로 가겠지요?”
“아닙니다. 우리도 스님과 함께 순례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스님을 모셔야 합니다.”
향수병으로 우울해 하던 시몬이 선융과 동행을 하겠다는 것은 의외였다. 로렌보다 마음이 여린 시몬은 룸비니불교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스위스로 떠날 것만 같았는데, 그에게 무슨 변화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로렌은 룸비니불교대학을 졸업한 뒤 빈에서 시몬과 함께 명상센터를 운영하고 싶어 했다. 물론 로렌의 처지에서는 선융이 오스트리아로 함께 가준다면 더 없이 좋을 터였다. 로렌의 부모는 선융이 원하기만 한다면 크렘스 집을 내어준다고까지 말했던 것이다. 빈에서 생활할 수 있는 거처가 있으니 로렌의 부모가 크렘스에 있는 집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선융 일행은 안개가 짙게 끼었지만 기원정사로 출발했다. 운전은 로렌과 시몬이 교대로 하기로 약속했다. 승용차는 로렌이 인도에서 구입한독일제 중고차였다. 선융은 로렌과 시몬에게 가이드 역할을 했다.
도로 사정은 그런 대로 괜찮았다. 성지 순례자들이 많아지면서 인도 중앙정부가 지원하여 지역 관청에서 끊임없이 도로정비를 한 덕분이었다. 승용차는 이따금 한적한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속도를 내지 못했다. 목동들이 이른 아침부터 염소 떼를 몰면서 도로 위에서 쉬고 있거나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도나 네팔 사람들은 동물들에게 관대했다. 동물들은 마치 그들의 식구 같았다. 승용차는 거대한 사탕수수밭과 망고동산 사이를 달렸다. 선융은 승용차 안에서 기원정사가 조성된 사연을 로렌과 시몬에게 들려주었다.
“부처님이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이 바로 기원정사지요. <금강경>을 설하신 곳이기도 하고요. 작년에 진공스님이 오셨을 때 승합차가 고장 난 탓에 급히 수리하느라고 가지 못했는데 언젠가 반드시 순례하고 싶었던 기원정사지요.”
부처가 35세에 깨달음을 이룬 지 3년째였다.
“마가다국 빔비사라 왕이 부처에게 사원을 지어 보시한 것이 죽림정사였는데, 사실은 그보다 먼저 임시로 거처할 건물 60채를 지어 보시한 재가불자가 있었어요.”
건물을 지어 보시한 사람은 마가다국의 장자 비살라였다. 비살라 장자의 부인은 코살라국의 장자 수닷타의 누이였다. 거부가 된 수닷타는 배고픈 사람들이 찾아오면 반드시 밥을 주었으므로 사람들에게 아나타핀타카 장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편, 수닷타 장자의 부인은 비살라 장자의 누이였다. 그러니 서로가 처남이기도 한 겹사돈이었다.
비살라와 수닷타는 처남 매부 관계를 떠나 친구처럼 각별하게 지냈다. 하루는 수닷타가 비살라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비살라는 수닷타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하인 우두머리를 불러서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수닷타가 다가가 “친구여, 무슨 일인가?” 하고 묻자 비살라는 “내일 죽림정사에 계신 부처님과 스님들을 초대했다네!” 하고 말했다.
수닷타는 ‘부처님’이란 말에 이끌렸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세 번이나 깬 끝에 이른 새벽이 되어서 부처를 뵈러 죽림정사로 갔다. 그때 부처는 먼동이 터오는 하늘을 보면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수닷타는 부처의 두 발에 엎드려 머리를 대고 예배했다. 그러자 부처가 수닷타에게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베푼다면 존경받는 장자’가 될 것이라는 요지로 말했다. 수닷타는 아침 일찍 비살라 집으로 갔다. 부처는 제자들과 함께 비살라 저택으로 와서 하인들이 준비한 음식을 공양 받고 있었다.
공양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수닷타는 부처에게 다가가 죽림정사는 번잡하니 사왓티(사위성)에 안거할 것을 청했다. 부처는 수닷타의 제의를 에둘러 허락했다.
“장자여, 여래는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머물기를 좋아한다.”
수닷타는 코살라국으로 돌아와서 사왓티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조용한 동산을 찾았다. 마침 사왓티 서남쪽에 우물과 연못이 딸린 동산이 하나 있었다. 수닷타는 땅 주인인 제다 태자를 찾아가 부처에게 보시하겠으니 팔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교만한 제다 태자는 외도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동산에 금화를 빈틈없이 깔아준다면 팔겠다.”며 사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했다. 실제로는 거절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수닷타의 입을 막으려고 한 제다 태자의 말은 수닷타에게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코살라국의 국법은 주인이 어떤 물건에 값을 정하기만 하면 거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수닷타는 바로 법정에 호소했고, 재판장은 제다 태자가 동산의 땅값을 수닷타에게 얘기한 사실을 확인했다.
수닷타 장자는 즉시 자신의 창고에서 꺼낸 금화를 수레에 가득 싣고 가서 깔기 시작했다. 반신반의하던 제다 태자는 동산이 금화로 거의 덮일 무렵에 “장자여, 그만하십시오. 저도 좋은 업을 지을 수 있도록 동산 땅을 조금만 주십시오.” 하고 만류했다. 수닷타가 허락하자 제다 태자는 아직 금화가 깔리지 않은 곳에 큰 대문을 세워 기증했다. 결국 기원정사 안에는 가장 큰 건물이자 수닷타 장자가 지은 간다쿠티(여래 향실), 그리고 코살라국 프라세나짓 왕이 지은 살라라가라(송림정사), 카레리쿠티(화림향실), 코삼비쿠티(코삼비 향실) 등이 크게 지어졌고, 부처는 기원정사에서만 불법을 설한 45년 동안의 기간 중에서 가장 긴 19안거를 보냈다. 인도는 한국과 달리 여름안거, 즉 우안거(雨安居)밖에 없으므로 1안거는 1년인 셈이었다.
휴게소는 갈대로 지붕을 얹힌 움막 형태였다. 화장실을 들르고 싶은 로렌이 휴게소가 보이자 말했다.
“스님, 따뜻한 짜이 한 잔 마시고 가요.”
“로렌, 짜파티도 한 장 먹고 가요.”
시몬은 여전히 시무룩했다. 향수병으로 번민이 많았다. 선융이 승용차에서 내린 뒤 시몬의 어깨를 쳤다.
“시몬, 고향이 생각나서 심란해요?”
“네, 어머니가 보고 싶죠. 친구들도 만나고 싶고요.”
간이침대를 들인 휴게소였다. 목동 두 사람이 간이침대에 앉아서 짜이를 마시고 있었다. 흰색 도티 옷차림의 주인이 화덕 앞에 앉은 채로 선융 일행에게 눈인사를 했다.
“나마스테!”
“나마스테!”
로렌이 짜이와 짜파티를 주문했다. 선융이 시몬을 위로했다.
“시몬은 그리움이 많은 사람 같아요. 그리움이 많은 사람은 자비심도 크지요.”
“선융스님, 저는 로렌처럼 마음이 강하지 못해요.”
“부처님도 여린 분이었어요. 시몬처럼 항상 어머니 마야부인을 그리워했어요. 룸비니동산 나무 아래서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 마야부인이 돌아가셨거든요. 부처님은 출가 전 호사스런 태자 시절에도, 깨달음을 이루고 난 후에도, 제자들과 함께 사원에 머물 때도, 어디를 가더라도 늘 어머니 마야부인을 그리워했어요.”
로렌이 짜이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말했다.
“부처님에게는 그리움과 자비심이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맞아요. 그리움이란 질량은 자비심의 에너지일 거예요.”
선융은 방금 로렌에게 한 말을 머릿속으로 다시 정리했다. 인도에 와서 영감처럼 떠오른 단상 때문에 스스로 놀라고 감탄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부처님만큼 그리움이 컸던 분이 또 있을까
도솔천의 부처님만큼 지구별의 힘든 중생들을
그리워했던 분이 또 있을까
자비심과 그리움은 결국 같은 말이 아닐까.
선융 일행은 그리움 같은 따뜻한 짜이와 자비심 같은 구수한 짜파티로 아침식사를 한 뒤 부처가 19년 동안이나 머무르며 수많은 경전을 설했던 기원정사로 향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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