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사람  김성채

 

겨울이 훌쩍 지나가고, 한가한 틈이 생긴 날, 평택에 있는 만기사를 찾았습니다. 만기사는 불심 깊은 고려태조 왕건 치세 시에 창건된 사찰이기에 문득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입니다.

 

고려 태조는 수원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후삼국시대, 왕건은 견훤과 몇 년 동안의 전쟁에서 연이은 패배로 기가 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고창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송악으로 올라가던 중 수원 광악산(光嶽山)에 머물게 되었는데, 산 정상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는 빛을 보고서는‘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며 산 이름을 광교산(光敎山)으로 바꾸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만기사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인 일주문 현판은 “무봉산 만기사” 봉황은 ‘태평성세에 나타난다’는 전설상의 새입니다. 그런 봉황이 나타나 춤을 춘 곳에 만 가지의 기이한 일이 있었음을 알리기 위해 만기사가 세워졌으니, ‘얼마나 볼 것이 많겠느냐?’며 산문을 들어섰습니다.

 

이야기를 잇기에 앞서 꼭 말씀드려야 할 것은 고려 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기록만 있을 뿐, 경내에 있는 전각과 유물 어느 것에서도 고려시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만기사의 현재 위치도 처음 창건된 위치가 아니고, 전각들도 새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전각이 세워졌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여기서 새로 펴겠다’는 주지스님의 원력이 컸다는 이야기고, 신도들의 보시와 축원도 많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사가 언제 이루어졌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만기사가 우리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롭게 하는 사찰임은 분명합니다.

 

일주문으로 들어서 5분여를 걸은 후 뒤돌아보니 멀리 있는 산들도 내려다보이는 널따란 전망이 꽤 훌륭합니다. 만기사는 무봉산 끝자락에 앉아있는데,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하천(진위천)에서부터 서서히 높아진 탓에 높은 곳에 있는 듯 한 불가사의함을 가졌습니다.  

 

 

 

 

널따란 주차장을 지나 절집으로 오르는 계단 좌우편에는 봉안당이 설치되어, 안치된 망자들은 공기와 풍광이 좋은 곳에서 매일매일 법문을 듣고 공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계단이 끝나는 곳에 “명부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통상, 사찰 경내로 들어서기 위해서 일주문을 지난 다음 금강문과 천왕문을 거치고, 이층으로 된 누각의 일층 가운데에 난 계단을 올라 대웅전이 있는 마당으로 들어섭니다. 그렇지만 큰 사찰이 아니면 금강문을 세우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명부전 전각 앞에 멈추면서, 건물 한 채가 여러 기능(?)을 갖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명부전 아래층은 “천왕문” 현판이 걸려있지만 금강문 역할도 수행하고 있는데, 좌우 문에 울퉁불퉁한 가슴근육과 보검을 힘차게 움켜진 팔뚝·눈을 부릅뜬 금강역사를 그려져 있어서, 천왕문이 만기사를 지키는 금강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문안에는 불법을 지키고, 마군을 물리치며, 불교에 귀의한 불자들에게 마음이 흐트러트리지 말라는 듯 사천왕상이 큰 위엄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사찰에서 보는 사천왕상은 마군을 제압시켜 발로 밟은 형상으로 조성된데 비하여, 만기사 사천왕은 왼발을 허공에 띄우고 있어서 조금 아쉬운 감이 있습니다.

 

 

 

 

천왕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에 명부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습니다.
명부전 주렴은 “地藏大聖威神力  恒河沙劫說難盡  見聞瞻禮一念間  利益人天無量事”입니다. ‘지장보살님의 오묘한 이치는 말로 나타낼 수 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서, 항하의 모래만큼이나 많은 세월에 걸쳐 이야기해도 끝을 알 수가 없네. 보고 듣고 절하며 우러르는 시간이 그렇게나 짧은 한순간이지만 사람과 하늘이 받는 이익은 헤아릴 수 없어라.’
더 많은 죄를 짓지 않고 살다가 죽게 해달라는 마음으로 머리를 숙였습니다.

 

명부는 죽은 영혼이 가는 세계이기에 이곳 명부전도 당연히 모든 중생들의 구원을 염원하신 지장보살이 육환장과 장명보주를 갖고 계신 모습으로 연화좌에 모셔져 있습니다. 지장보살 좌우에는 경전을 받들고 있는 무독귀왕과 저승사자의 착오로 염라대왕에게까지 끌려갔다 살아나온 도명존자가 협시하고 있고, 저승세계에서 빠질 수 없는 10대왕과 판관·동자들도 나란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명부전 벽화는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표현되어 이제까지 보았던 “반야용선도”보다 훨씬 친밀한 감을 갖게 합니다. 뱃머리부터 배의 끝까지가 한 마리의 청룡으로 이루어졌고, 다리는 극락세계를 향하여 거센 파도를 헤쳐 나가는데, 크고 작은 동그란 비늘이 모여 더 큰 동그란 비늘이 되어 온 몸을 덮었습니다. 배 앞에는 인로왕보살이 뱃길을 인도하시고, 뒤쪽에는 지장보살이 자비스런 눈빛으로 중생들을 바라보십니다. 극락세계로 향하는 반야용선에 탑승한 중생들은 지장보살님의 구원에 감사드리는 여인과 극락세계로 나가는 기쁨에 춤을 추는 노파, 염불하는 스님과 합장 기도드리는 망자들인데, 입고 있는 각각의 복식이 현대인의 평상복으로 그려져 있어서 반야용선의 의미가 새롭고, 보는 재미도 한 층 더 생겨납니다.

 

 

 

 

살아간다는 게 아쉬움과 동행하는 것이고, 행복을 느끼는 때는 동행하던 아쉬움이 떨어져나가는 잠깐의 순간입니다. 만기사를 답사하고자 한 큰 요인은 철(鐵)로 조성된 부처님을 뵙고 싶은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철조여래좌상은 보이지 않고, 금부처님이 계신 겁니다. 잠깐 동안에 아쉬움이 일었다가 사라졌습니다. 경전의 ‘여래를 능히 보지 못하느니라’라는 구절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안내판에는 ‘철조여래좌상의 높이는 1.43m로, 광배와 대좌 없이 불신만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철조여래는‘우주와 생명의 실상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셨던 길상좌로 6년의 고행을 보여주려는 듯 다른 불상에 비해 얼굴과 몸통이 갸름한 편입니다.
수인은 길상좌로 깨달음에 이르러 파순을 물리치고 취하신 항마촉지인입니다. 대의를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내림으로써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인데, 정성을 다했다 하더라도 철로 조성된 때문에 표현이 섬세할 수 없어 대의가 두껍게 나타났고 거친 편입니다.
철(쇠)로 부처님을 빚는 것은 공정이 복잡하여 실패할 확률이 높고, 성공했다 하더라도 표면이 거칠어 부드러운 표현을 나타내는 것이 어렵다는 등의 단점이 많다고 합니다. 쇠로 빚은 여러 불상의 가슴과 팔뚝 등에 용접한 듯한 흔적이 남아있음과 비교하면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은 거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두텁게 금도금을 하였거나 도금하기 전에 옻칠을 두껍게 하는 등의 많은 손질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만기사 대웅전 후불탱은 여러 쪽의 나무에 부처님과 여러 보살, 제자들과 사천왕 등을 부조형식으로 새긴 목각탱화입니다. 목각탱화 전부를 금도금하였고, 부처님의 육계·나발, 보살과 나한의 눈썹·입술 등에는 그림을 그려넣었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탱화보다 뚜렷한 음영이 나타남으로써 입체감이 살아있습니다. 또 하나의 특색은 철조여래불의 바로 뒤편에 두광과 신광을 새겨놓았는데, 어찌나 조화를 잘 이루었는지 철조여래불을 빚을 때 목각탱화도 같이 조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처님을 장엄하고, 불국토를 나타내는 것이 후불탱화를 조성하는 목적이라면 만기사 목각탱화만큼 잘 구현된 곳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음 계속)

 

※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은 보물 제56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여래부처님을 보여드리고픈 마음도 있으나, ‘시간 나실 때 직접 참배하십사’ 하는 마음으로 사진을 올려드리지 않았습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