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적치적 비가 내린다. 겨울 가뭄 뒤 내리는 단비라 더 반갑다. 봄비다. 봄비 내리면 습관처럼 가수 박인수의 ‘봄비’가 절로 웅얼거려진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나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이 비 그치고 나면 본격적인 농사철이 시작될 것이다. 농부들은 벌써부터 바빠지기 시작했다. 논과 밭을 갈기 전에 퇴비를 뿌리거나, 비닐이 훼손된 비닐하우스의 비닐 교체가 마을 곳곳에서 한창 진행 중이다. 내게도 도와달라는 요청이 와, 부랴부랴 장화를 신고 아랫마을 홍 씨네 하우스의 비닐 교체작업에 참여했다. 일손이 부족한 농촌이라 손 하나가 아쉬우니, 나 같은 농사 풋내기도 쓸모가 있는 모양이다.
해뜨기 전에는 제법 스산하지만, 일단 해가 뜨고 나면 따뜻한 기운 완연한 영락없는 봄이다. 매화나무를 비롯하여 마당에 심어놓은 나뭇가지들에는 하루가 다르게 생동감이 펄펄 살아난다. 이제 며칠 지나면 잔잔하게 붙어 있는 매화 봉우리들부터 터져 그 환한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역시 봄은 생명이 솟아오르는 계절이다. 솟구치는 힘의 원천은 물론 태양이다. 생명이 솟는 과정을 촬영했다가 빠른 속도로 돌리면 마치 용수철처럼 움이 튀듯 솟구칠 것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봄을 스프링(spring)이라고 표현했고, 한자에서도 해(日)에서 세 겹의 껍질을 뚫고 솟아오르는 모양을 한 춘(春) 자로 봄을 상징했을 것이다.
집 주위를 돌아보면 온통 봄기운이다. 봄을 느끼는 것은 몸이 먼저다. 길과 논밭을 가리지 않고 뛰노는 옆집 강아지들의 몸짓도 가볍고 산뜻하다. 아직 푸른 기운이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곧 온 천지가 연둣빛 파스텔 톤으로 채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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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올 것이라는 기상예보를 듣고 하루 전, 밭에 닭똥(鷄糞)을 원료로 만든 퇴비 140포를 옮겼다. 외바퀴 리어카에 한 포에 20킬로그램 무게의 퇴비를 3포 씩 싣고 50여 회를 날랐다. 한 나절 퇴비를 나르고 나니 허리가 뻐근해진다. 혹시 허리가 삐끗할까 조심했지만 뻐근해지는 것까지는 피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봄비 그치면 포대를 뜯어 퇴비를 밭에 골고루 펼치는 일을 해야 한다.
산골로 내려올 때부터 친환경 농사를 짓기로 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가능한 화학비료는 피하는 것이 원칙이다. 부득이하게 화학비료를 사용하더라도 친환경 제품을 사용한다. 비료든 농약이든 친환경 마크가 붙으면 그 가격이 두 배 이상이지만 우리 가족이 먹을 것이니, 감수하기로 했다. 그런데 밭이 450평이나 되는 터라, 사실 우리 집 식구만 먹기에는 그 양이 넉넉하다. 남는 것은 처가나 형제들, 가까운 지인들에게 보내곤 하는데, 그 때마다 고맙게도 수고비를 보내준다. 처음에는 돈을 받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두 해 넘게 그런 경우를 겪다보니 그마저 차츰 자연스러워진다.
생면부지의 마을에 처음 이사 와서, 모든 게 낯선 우리에게 농사일을 포함 이런저런 도움을 준 한 마을 젊은이를 만나 올해에도 도움을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이지유~.” 그의 쾌활한 목소리에 절로 미소가 머금어진다. 사실 젊은이라고는 했지만 나이는 40대 후반이다. 매년 2~3만 평 농사를 짓는 그는 밭농사에 관한한 전문가다. 가뭄이나 홍수로 농사를 망치지 않는 한 연간 억대가 넘는 수입을 올린다. “농사꾼이 겉보기에는 이렇게 너저분해보여도 괜찮아유. 저도 40이 다되어서야 그걸 알았지만….” 생산한 농산물을 소화시킬 탄탄한 판로도 확보해놓아 큰 걱정도 없단다.
사실 나는 그에게 예초기 작동 방법부터 밭갈이까지 크고 작은 일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작년 봄에는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그 부부를 집으로 초대해 내가 오랫동안 아껴두었던 30년 산 양주를 함께 마시기도 했다. 나나 그나 주량이 턱없이 약한 편이라 금세 알딸딸해졌고, 내친김에 형님, 아우로 지내기로 했다.
아무려나, 아내는 벌써부터 올해 농사 계획을 세우기에 바쁘다. 고추는 지난해보다 늘려서 60주 늘어난 400주를 심기로 했고, 고구마 한 이랑, 감자 두 이랑, 참깨 두 이랑, 땅콩 두 이랑, 팥 한 이랑을 심고 나머지 300평에는 서리태와 메주콩, 들깨를 심기로 농사 설계를 마쳤다. 물론 봄부터 가을까지 내내 뜯어먹을 푸성귀를 심을 공간은 집 가까이에 비워두기로 하고. 모든 것이 우리 식구 먹을 것이니 올해도 정성을 다해 건강한 먹 거리로 기를 예정이다.
농사도 몇 해 직접 지어보니 요령이 는다. 첫해에는 밭 매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작년부터는 모든 고랑을 부직포로 덮었다. 그러다보니 위에서 내려다보면 밭이 온통 검정색이다. 부직포는 빗물은 스미고 햇볕은 차단하는 효과가 있으니, 일단 호미질의 고역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농사짓고 수확하다 보면 자연 이런저런 기계나 장비를 구입하게 마련이다. 고가를 지불하고 농약 주는 기계, 고추건조기, 냉동고 등을 들여놓았다. 친환경 농사를 위한 장비들도 구입했다. 물론 농사를 지은 수확물을 전량 다 내다 팔아도 그 비용에 턱없이 못 미친다. 그래도 이런저런 장비나 기계가 하나 둘씩 갖춰지는 것도 제법 재밌는 일이다. 차츰 농사꾼이 되어간다는 방증이기도 하니까.
“형님, 부처님께 기도 좀 잘 해주시유. 작년처럼 가물지 않게유. 하하.” 아직 조금은 어색한 마을 아우의 너털웃음이 귓가에 스치는 봄바람처럼 상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