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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전남 광양에서 구한 어린 매화나무 다섯 그루를 뜰 앞에 나란히 심었다. 청매 세 그루, 백매와 홍매 각각 한 그루인데, 어찌나 기특하게 잘 자라는지 한 여름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면 웃자란 나무 가지가 베란다의 창문을 무섭게 때리곤 했다. 지난봄에는 성글게 피어난 매화꽃 수십 송이에 감격해 카메라를 이리저리 들이대며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나는 청매(靑梅)를 특히 좋아하는 데, 꽃을 피운 첫해여서 그런지 청매 특유의 단아한 자태와 알싸한 향기를 마음껏 만끽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매화나무를 향한 기대가 아내와 내가 서로 다르다. 나는 이른 봄 군자처럼 고고하게 피어나는 매화꽃을 감상하고 그 향을 음미하며 꽃차를 우려내 마시는 풍류를 떠올린 반면, 아내는 ‘매화나무 다섯 그루에서 매실을 얼마나 수확할 수 있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아마도 매실을 따 발효시킨 매실엑기스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대가 다르면 어떠랴. 꽃 먼저 피고 나중에 열매가 열리는 것을!
입춘이 지나고 맵찬 바람 속에서도 봄기운이 느껴지면서 ‘자식 같은’ 매화나무에 부쩍 눈길이 닿는다. 내 생에 처음 심어본 매화나무가 죽지 않고 자라는 것 자체가 기쁨이다. 일찍이 없었던 추위에도 매화나무에서는 벌써부터 물기가 느껴진다. 시나브로 손가락만한 새 가지들이 불쑥불쑥 고슴도치 바늘처럼 돋았다. 정신 허한 사람들이 곧잘 ‘기적’을 입에 올리지만, 한 겨울 제 몸의 물기를 비운 채 죽은 듯 지내다가 귀신처럼 봄기운을 알아채 제 몸에 물기를 채우고 마침내 움으로 밀어 올리는 자체가 기적이 아닌가.

마른
나뭇가진 줄만
알았더니

속에
봄을 머금은
물기가 숨어 있었네

세상
어디에도
기적이 아닌 건 없네
             -졸시 ‘함춘(含春)’ 전문

지난해 한껏 자란 가지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여름에 베란다의 유리창이 성하기 어려울 것이기에 분당에서 매실농사를 짓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적당한 전지 시기와 방법을 물었더니, 음력으로 정월보름쯤에 지난해 새로 난 가지를 20~30센티 정도 남기고 자르고, 수형에 맞게 버릴 것은 과감하게 잘라내란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남도로 탐매행(探梅行)을 하고 있는데, 주로 만나는 매화는 집집마다 한두 그루씩 서 있는 고매(古梅)나, 산기슭 매실 밭에 눈꽃처럼 달린 매화꽃들이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내손으로 직접 관리한 매화꽃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어깨춤이 나온다. 사실 나는 당진으로 귀촌을 하면서 매화를 심어 기르며, 매화를 벗 삼고, 매화를 사랑했던 퇴계(退溪)처럼 100편 정도의 매화시(詩)를 써보겠다는 제법 ‘당찬’ 계획을 세웠다. 이런 계획을 이제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니 어찌 신바람이 나지 않겠는가.
유언을 ‘매화화분에 물을 잘 주라’고 했을 정도로, 몹시 매화를 사랑했던 퇴계는 매화에 관해 100수가 넘는 시를 지었다. 퇴계는 이 가운데 71수를 뽑아 <매화시첩>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퇴계의 각별한 매화사랑에는 기생 두향과의 정분이 깃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시를 읽노라면 격조 높은 풍류를 만끽할 수 있다.

뜰을 거니니 달이 사람 따라 오네
매화나무 옆을 몇 번이나 돌았을까
밤 깊도록 앉아 일어나길 잊었는데
옷에는 온통 매향, 몸엔 꽃 그림자
                   -‘도산의 달밤에 매화를 읊다’ 중에서

엊그제가 입춘이었다. 생전 처음 붓을 잡고 입춘첩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을 삐뚤빼뚤 참 딱한 솜씨로 적어서 길시(吉時)라는 새벽 6시에 일어나 현관문에 붙였다. 전날 밤, 먹을 갈고 한지를 잘라 펴서 글자를 쓰노라니 붓질이 영 부드럽지 않았다. 휴~, 이럴 줄 알았으면 붓글씨를 좀 배워둘걸! 뒤늦은 후회에 아내는 ‘지금부터 배우면 된다’고 다독인다. 몇 번 더 써보았지만 쓸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입춘첩 유효기간이 100일 정도라니 볼 사람이 몇이나 되랴 하는 만용으로 졸필의 부끄러움을 감수하기로 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은 봄인데 그 이유의 절반이 매화다. 이런 이유로 매화꽃 피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봄을 적극적으로 맞겠다는 내 몸부림에 아내는 그저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하는 짓이 영 어린아이 같다는 핀잔일지도 모르겠다. 예로부터 민가에서는 입춘첩(立春帖)을 써서 대문이나 기둥에 붙여 봄의 기운을 받아 한 해가 평안하기를 기원했는데, 나 역시 생전처음 입춘첩을 써 붙이고, 매화나무 전지 준비까지 마쳤으니 봄맞이 준비는 얼추 마친 셈이 됐다.
그러나 입춘이 지났어도 이 땅의 추위는 꺾일 줄을 모른다. 평창올림픽이 역대 가장 추운 동계올림픽이 될 것이라는 보도를 보니 춥기는 꽤 추운 모양이다. 그러나 올 봄을 더 춥게 만드는 건 날씨 탓만은 아니다. 평창올림픽에 참석하는 북한 대표단을 대하는 이른바 보수진영 사람들의 망동(妄動)이 마음을 더 춥게 만드는 것이다. “뼛속까지 사무치는 추위를 견디지 않고서 어찌 코끝을 찌르는 매화향기 맡을 수 있으랴”는 시구처럼 아직도 이 한반도에는 ‘사무치게 견뎌야할 시련’이 겹겹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