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크게보기15살의 어린 나이에 출가했던 한 소녀는 그러나 슬프지 않았다. 아버지는 곧 스승이었고 어머니는 사숙이되었다. 그 소녀는 훌륭한 스님이 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그리고 70여년이 흐른 지금 한국 비구니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제2대 전국비구니회 회장을 역임한 정각사 주지 광우스님이 출가 당시의 각오, 정진하던 70여년, 도심 포교의 원을 세우고 실천한 50여년의 삶을 『부처님 법대로 살아라』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이 책은 현대불교신문 최정희 전 편집국장이 스님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오랜기간 스님과 교유해온 최 전 국장은 스님의 인생 마디마디를 짚으며 질문을 했고 스님은 담담하게 70여년 승려로서의 삶을 풀어 놓았다. 책 출간을 기념해 열린 간담회에서 스님은 이렇게 회상했다.

“15살에 출가했어요. 어머니 손잡고 갔지요. 출가를 위해서는 은사가 필요한데 남장사에는 비구니가 없어 직지사에서 성문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어요. 출가허락이 떨어지고 3번에 걸쳐 머리를 잘랐는데 마지막 삭발을 하려는데 혜봉 스님께서 ‘멈춰라’하시더니 제게 묻는 겁니다. ‘불퇴전의 마음으로 정진할 수 있겠느냐?’ 저는 ‘네’라고 당당히 대답했고 그때서야 다시 허락이 떨어져 삭발을 마쳤습니다.”

그에게 마지막 순간 ‘정진할 수 있겠냐’며 매몰차게 되물었던 혜봉스님은 광우스님의 속가 아버지다.

아버지가 출가자의 길을 걷는 분이라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했는데 이제 당신도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되니 이제 아버지라는 말은 입속에서도, 머릿속에서도 영원히 떠나갈 것이었다. 그런데도 스님은 “아버지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했던 것이 아버지로 모시고 살던 때보다 더 행복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출가는 작은 문턱에 불과했다. 당시에는 비구니 강원이 없어 공부하려면 스승을 직접 찾아야했다. 그 어디에도 비구니를 받아주는 강원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걸 부처님의 공덕이라 하나보다. 1941년 남장사에 최초의 비구니 강당인 관음강원이 세워졌다. 스님은 관음강원에서 수학한 후 최초의 비구니 강원 졸업생이 됐다. 그후 스님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이 줄곧 따라다녔다. 비구니 최초 강원 졸업생을 필두로, 비구니 최초 대학졸업생, 비구니 최초 명사법계 품서. 스님이 걸으면 그 곳이 곧 길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말기 관음강원은 위안부로 끌려가는 처녀들이 많아 젊은 여성들끼리 모여있으면 위험하다고 하여 스님이 졸업한 직후 관음강원은 곧 문을 닫았다. 비구니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스님은 전국 비구니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을 했다. 이 결과 1967년 최초의 비구니모임인 ‘대한불교 비구니 우담바라회’가 창설됐다.

“전국 방방곡곡 안다녀본 곳이 없어요. 그렇게 구석구석 비구니 스님들을 만나며 이야기 하니 모두들 찬성하고 동참해 주었어요”.

이때 결성된 우담바라회는 후일 전국비구니회가 되었고, 광우스님은 혜춘스님에 이어 2대 회장을 역임했다.

누구보다 힘들게 공부했던 스님은 이후 돈이 없거나 공부할 거처가 없는 사람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스님의 후원에는 승속의 구분이 없었다. 사실, 불교게 곳곳에서 일하고 있는 소장, 학자, 스님 등 수백여명이 광우 스님 도움으로 공부를 했다는 사실은 절집 주변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크게보기스님의 원력은 비구니의 권익과 교육여건을 넘어 도심포교로 이어졌다. 스님은 1958년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도심포교당을 세웠다. 도심포교가 힘든 시기였지만 스님은 “포교에 있어 힘든 시기였지만 비구니이기 때문에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도리어 포교 포교는 비구니가 더 잘 할 수있다”며 “비구니는 섬세하고 자상한 성품을 가졌으므로 이웃에게 부처님이 가르침을 전하는 데 적격이고, 특히 세상을 부드럽게 감싸는 여성성은 포교에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이어 “부처님이 마하파자파티에게 일체중생희견여래와 같은 대법사 될 것이라며 수기를 준 것도 그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고 전했다. 도심포교당은 혜봉스님의 법제자이며 스님에게는 ‘오빠’와 같은 김동화박사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스님이 성북동에 200여 평의 터를 잡고 정각사를 세운 뒤 정기법회를 열었을 때 처음에는 1명이 법회에 왔는데 김동화 박사의 부인 이만덕화 보살이었다. 이후 만덕화 보살이 친구 4명을 이끌고 법회에 참석했고, 김동화 박사와 당시 강사로 유명했던 스님들이 팔을 걷고 도와주면서 정각사에 대한 소문이 점차 퍼지기 시작했다. 게중에는 통일교의 총무부장도 있었고, 정각사 아래 있다는 교회의 목사님도 가끔 법회를 들르곤 했다.

올해는 정각사를 짓고 도심포교에 뜻을 세운지 꼭 50년이 되는 해이다. 50년이라면 반세기가 지난건데 기념할만도 하건만 스님은 “50이라는 숫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무슨 일을 얼마나 했으냐가 중요하고, 만약 한 일이 없다면 헛나이만 먹은 것”이라며 “지난온 50년 보다 더 중요한 앞으로의 50년을 위해 상좌나 후배들이 어떻게 준비할까를 생각하는 자리는 한번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스님은 왜 갑자기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는 걸까? 앞으로의 50년을 준비하는 스님의 마지막 당부에 답이 있는 듯 하다.

“불교를 믿는 불자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참으로 진실되게 믿는 불자들이 분명 많지만 오직 기복에만 빠져 수행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는 불자들도 있다. 기복이 시발점이 되어 불교에 들어 올 수 있지만 기복만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해주길 불자들께 바란다”

스님이 걸어간 70년의 출가이야기는 바로 한국 비구니들의 역사이며, 한국불교의 초석 위로 기둥과 지붕이 이어져가는 과정이었다. 광우 스님 혼자만의 원력은 분명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있었기에 비구니의 길이 조금은 평탄해 졌으며 한국이 세계비구니들의 종주국으로 자리매김하는 길 또한 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스승으로 삼아야 했던 그 소녀는 이제 우리 시대의 법모(法母)가 되어 ‘부처님 법대로 살겠노라’는 다짐을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