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4회                              

 

                               뜨거운 번뇌

 

 저수지는 서래사에서 면소재지 가는 길의 협곡에 있었다. 길은 저수지 양쪽으로 나 있었는데 한쪽은 자동차가 다녔고 다른 쪽은 산불이 났을 때 소방차가 갈 수 있는 산림도로였다. 선융은 선방의 포행시간에는 산림도로를 혼자 산책하곤 했다. 좌선 중에 굳은 다리근육과 긴장을 풀기 위해 유유자적 걷는 것을 포행이라고 불렀다.
 선융은 그 여름 하안거 중에 포행시간을 이용하여 날마다 저수지 산림도로를 걷다시피 했다. 협곡으로 흘러오는 물을 가둔 저수지는 작았지만 수심은 깊었다. 담수된 물은 사철 내내 쪽빛이었다.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는 저수지는 에메랄드빛으로 바뀌기도 했다. 벚나무와 단풍나무, 이팝나무가 산림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기 때문에 여름에도 그늘이 드리워져 누구라도 산책하기에 적당했다. 
 그날도 선융은 점심공양을 한 뒤 포행에 나섰다. 서래사에서 저수지는 1마장 정도의 거리였다. 저수지를 다녀오게 되면 10리 길을 산책하는 셈이었다. 선융은 포행할 때도 화두를 의문덩어리인 채 품고 다녔다. 선융의 화두는 ‘나는 누구인가?’였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누구인가?’라고 생각하는 ‘나는 누구인가?’였다. 그러니까 화두란 의문에 빠져드는 것이지 의문에 답하려고 하는 사유가 아니었다. 진공스님의 당부에 의하면 어미닭이 병아리가 나올 때까지 알을 품듯 의문덩어리(疑團)를 온몸으로 껴안고 있어야 했다. 선융은 습관대로 계곡의 물이 졸졸 흘러드는 곳에서부터 산림도로를 걸어갔다. 반환점은 성벽 같은 저수지 둑이 가까운 지점이었다. 물가 비탈에 소나무 한 그루가 멋들어지게 서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날 선융은 소나무가 선 곳까지 가지 못하고 산모퉁이를 돌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선가 사람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전에 목쉰 사람 소리를 내며 우는 노루를 마주친 적이 있는 산모퉁이였다. 노루 한 마리가 물을 먹기 위해 물가까지 내려왔다가 선융을 보고는 겅중겅중 도망쳤다. 짝짓기를 위해 노루 수컷이 쇳소리를 내며 운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선융은 머리끝이 쭈뼛거렸다. 놀랍게도 젊은 여자가 물가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그러나 선융은 모른 체하고 지나쳤다. 그러나 소나무가 있는 곳까지 갔다가 자신도 모르게 잰걸음을 했다. 산모퉁이 물가에는 여자가 여전히 울고 있었다. 무슨 변이 생길지도 몰라 잰걸음으로 왔지만 여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선융은 소리 내어 흐느끼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 선융이 조심스럽게 여자를 불렀다. 여자와 무슨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여자를 보고 지나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이봐요!”
 “....”
 여자가 선융을 뒤돌아봤다. 생머리를 한 여자는 20대 후반으로 보였다. 선융은 공연히 여자를 불렀나 싶어 잠시 우물쭈물했다. 선융은 자신도 모르게 흐느끼고 있는 여자의 편이 되어 말했다.
 “울고 싶을 땐 실컷 우세요.”
 “.....”
 선융이 여자를 위해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선융은 여자 앞에 있는 시퍼런 물빛을 흠칫 보고는 산모퉁이를 지나쳤다. 절로 돌아온 뒤에는 선방에 바로 입실했다. 면벽을 하고 다시 의문덩어리인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나는 누구인가?’를 가슴에 품었다. 화두는 머리에서 목 아래로 내려와 있는 단계였다. 그러나 다른 날과 달리 화두가 잘 품어지지 않았다. 저수지에서 만난 그 여자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 여자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선융 자신 탓이었다. 스스로 그 여자를 떠올려서 붙들고 있는 셈이었다. 결코 그 여자는 선융의 수행을 방해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선융은 내일 포행 때는 저수지 반대방향으로 가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 여자를 회피한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이 비겁한 수행자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선융은 저녁예불을 한 뒤부터 갈등했다. 그 여자 앞에 있던 시퍼런 저수지 물빛이 아른거렸다.
 ‘여자가 충동적으로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게 책임을 묻지는 않겠지. 하지만 수행자로서 타인의 불행을 방관한 것도 허물이 아닐까. 부처님께 죄를 짓는 일은 아닐까.’
 선융은 은사인 진공스님의 당부를 따르기로 했다. 여자가 선융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으므로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진공스님의 당부대로 화두를 들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순서상 먼저일 듯싶었다.
 ‘아, 나는 왜 출가를 했던가. 은사님 말씀은 내가 누구인지를 먼저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의사 자격도 없는 사람이 어찌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단 말인가.’
 선융은 오전 수행 정진 중에 세 번이나 선방 뒤뜰로 나와 호흡을 골랐다. 들숨이 단전에 닿기 전에 날숨으로 바뀌어 자꾸 어깨가 흔들리고 가부좌가 단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에 번뇌가 들끓고 있다는 증거였다. 뒤뜰에는 하얀 비녀처럼 생긴 옥잠화가 막 피어나고 있었다. 그늘에 퍼져 있던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그런데 그때 진공스님이 낫을 들고 오더니 짧게 한 마디 했다.
 “화두를 들고 있어야 할 놈이 망상을 붙들고 있구나! 하안거 중에는 꽃을 보는 것도 망상이여!”
 “스님, 어찌 꽃이 망상입니까?”
 “화두와 하나가 되려면 눈을 안으로 돌려야지 밖으로 돌려서는 망상만 들끓는 법이야.”
 진공스님은 낫을 휘두르며 막 피어나고 있는 옥잠화를 단번에 댕강댕강 잘라버렸다. 선융은 은사인 진공스님의 무자비한 모습을 보고는 크게 실망했다. 살아 있는 생물을 마구 학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진공스님은 비정했다. 부처도 죽이고 조사(祖師)도 죽이라는 살불살조(殺佛殺祖)가 선가의 가풍이라지만 진공스님에게서 찬바람이 느껴졌다. 
 ‘은사님이 내게 준 충격 때문인가?’
 선융은 점심공양 전까지 아무런 망상 없이 화두와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했다. 자신의 온몸이 의심덩어리가 돼버렸다. 화두를 들고 정진한 이후 첫 경험이었다. 점심공양을 한 뒤 선융은 습관대로 포행에 나섰다. 그러나 생각과 몸이 분리된 듯했다. 저수지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생각했지만 몸은 저수지 산림도로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의식과 상관없는 행동이었다. 이제는 의심덩어리가 된 몸이 의식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평소처럼 의식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몸이 의식을 지배하는 셈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역전이었다. 선융은 저수지 가운데로 자루처럼 튀어나온 산모퉁이로 난 산림도로를 걸었다. 저수지 물은 한낮의 햇살을 받아 투명한 에메랄드빛으로 변해 있었다. 다행히 산모퉁이 비탈에 앉아 흐느끼던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선융은 가볍게 산모퉁이 길을 돌았다.
 그러나 선융은 산모퉁이를 돌아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 여자는 소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선융은 낚시꾼이기를 바랐지만 그 여자가 분명했다. 생머리를 한 그녀는 어제와 같이  청바지 차림이었다. 선융은 모른 척 지나치기로 했다. 포행의 반환점인 소나무까지 갔다가 돌아서려고 했다. 아침나절에 선방에서 경험한 바를 오후에도 이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선융은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여자가 선융을 부르고 있었다.
 “스님!”
 “저 말인가요?”
 “예, 스님. 휴지 좀 주세요. 눈물을 닦으려고요.”
 여자는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있었다. 선융은 바지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이것밖에 없어요.”
 여자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선융이 내민 손수건을 받았다. 그런 뒤  소나무 그늘에 앉아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선융은 어제처럼 안도했다. 여자가 몹쓸 생각은 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자가 감정에 휘말려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차분하게 우는 모습이 이성적으로 보였다. 슬픈 감정에 몰입한 여배우의 모습과 흡사했다. 그래서인지 선융은 그녀를 뒤로 하고 그 자리를 떴지만 별로 마음에 부담은 없었다. 산모퉁이를 돌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녀에게 이상은 없었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지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선융의 반대방향으로 사라졌다. 그 방향이라면 면소재지로 내려가는 길뿐이었다. 선융은 싱겁게 웃었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간밤에 번뇌를 붙들고 있었던 자신이 우스웠다.
 선융은 그 여자를 곧 잊어버렸다. 선방에서 면벽 좌선하는 선열(禪悅)에 깊이 빠져들었다. 선방 정진을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도망쳐버린 탁발승도 있었지만 선객들은 가끔 보는 일이라며 상관하지 않았다. 하안거 해제하는 날이 가까워지자 선융은 시간이 금싸라기처럼 아까웠다. 그래서 눕지 않고 밤을 새워 참선했다. 이를 선방 선객들은 평소보다 더 참선한다고 해서 가행정진(加行精進)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선융은 자신과 눈앞의 벽이 산산조각으로 부수어지는 체험을 했다. 나라고 고집하는 선융 자신과 벽이 사라져버리니 허공과 하나가 됐다. 나와 허공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벽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깨달은 체험이었다.
 ‘원래 나는 허공이었건만 내가 벽을 만들어 나를 가두고 살았구나.’
 선융은 선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달이 자애롭게 웃으며 선융에게 달빛을 보냈다. 세상은 달빛으로 가득 넘쳤다. 달은 분명 어제 보았던 달이 아니었다. 선융과 하나가 된 지금의 달일 뿐이었다. 달빛에 젖은 하늘과 땅이 모두 선융에게는 새롭게 태어난 우주의 시간과 공간이었다.
 ‘아, 어제의 시간과 공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세상은 그대로이나 어제의 세상이 아니잖은가.’
 선융은 선방용 샘으로 갔다. 샘물에도 달이 하나 떠 있었다.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 찬물은 단맛이 돌았다. 찬물이 뱃속을 휘돌자 비로소 흥분이 가라앉았다. 선융은 주지 방으로 올라갔다. 불이 꺼져 있었지만 선융은 참을 수 없었다.
 “스님, 스님.”
 “선융이구나.”
 진공스님은 잠결에도 선융임을 바로 알고 불을 켰다.
 “들어와.”
 “예.”
 진공스님은 선융이 찾아온 용건을 이미 알고 있었다. 선방 선객들이 참선수행 중에 어떤 변화가 오면 아무 때나 주지 방으로 올라가 점검을 받았던 것이다.
 “말해 보거라.”
 “몸 안에 먹구름이 가득 차오르더니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고 제 몸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것뿐인가?”
 “눈앞에 있던 선방 벽도 없어졌습니다.”
 “됐다. 이번 하안거 공부는 어지간히 됐다. 아무에게도 이 일을 발설하지 말거라.”
 “화두가 타파된 것입니까?”
 “오온(五蘊)이 공(空)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참선공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힘을 얻었으니 잘 해나갈 것이다. 너는 고해(苦海)를 건너갈 수 있는 보배를 하나 얻었다. 이를 득력(得力)이라고 해.”
 서래사 선방의 특징은 화두를 들고 정진하다가 변화가 온 수행자들은 하안거 해제 전이라도 퇴실할 수 있었다. 다만 진공스님에게 화두가 타파됐는지 점검하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선융이 깨달은 상태를 진공스님은 초견성(初見性)으로 보았다. 초견성이란 처음으로 자신의 성품(性品)을 보았다는 선가의 단어였다. 선융이 깨달은 것은 진공스님이 볼 때 <반야심경>의 첫 구절이었다. 오온이 공하므로 나라고 주장하는 나는 본래의 내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런데 선방에서 소임을 맡지 않고 오랫동안 참선만 해온 구참(久參) 스님은 선융이 깨달은 견처(見處)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변화는 구참 스님 자신도 여러 번 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구참 스님은 선융을 중학교 입학시험에 갓 합격한 학생처럼 여겼다. 사미승 신분으로서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식이었다. 구참 스님은 부처와 같은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려면 금생은 물론 내생까지라도 참선수행을 해야만 마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사형인 진공스님보다 더 고지식한 원칙주의자였다. 수행자들 중에서 견처가 생겼다고 해서 퇴실시키는 진공스님이 못마땅한 듯 이따금 투덜거렸다.
 “부처님은 5백생 동안 정업(淨業)을 닦아서 불도를 이루셨는데 지견(知見) 좀 생겼다고 풋중들을 선방에서 내보내는 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해.”
 선방을 퇴실한 선융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구참 스님의 눈치를 보았다. 구참 스님이 말하는 ‘부처의 5백생 정업’이란 말만 들어도 숨이 막혔다. 어느 날에 마칠지도 모르는 수행을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하기도 했다. 초지일관하는 구참 스님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지만 그것이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원했던 것일까, 하고 문득 의혹이 들기도 했다.
 
 그 여자를 다시 만난 것은 하안거가 끝나고 난 뒤였다. 저수지에서 다시 만난 것이 아니라 그 여자가 당돌하게도 서래사로 선융을  찾아왔던 것이다. 여자는 자신을 괴롭히던 것들이 해결됐는지 밝은 얼굴이었다.
 “스님, 그때 저를 용서해주세요.”
 “용서라니요?” “스님께 무례하게 굴었던 것 같아요.”
 “나는 벌써 다 잊어버렸어요.”
 “스님, 손수건을 돌려주려고 왔어요.”
 “아, 그랬군요.”
 선융은 여자에게 손수건을 돌려받았다. 선융은 여자를 방으로 들여 차를 주었다. 여자는 차를 처음 마시는 듯 찻잔을 어색하게 잡고 마셨다. 차는 서로 마주보고 마시는 법인데 술잔처럼 고개를 틀었다.
 “스님, 저는 그때 참 힘들고 괴로웠어요.”
 “왜요?”
 여자는 자신의 처지를 숨기지 않고 고백했다. 젊은 나이인데도 그녀는 이혼한 이혼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면소재지 부근에 있는 교회 목사였고 그녀의 남편은 전도사였다. 선융은 그녀의 처지를 더 묻지 않았다.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는 더 이상 저를 찾아와서는 안 됩니다.”
 “제가 목사 딸이기 때문인가요?”
 “여기는 선방이 있는 절이지요. 불자라고 하더라도 법문하는 날만 출입할 수 있지요.”
 “스님, 몰랐습니다.”
 여자는 선융의 말을 듣고는 선선히 나갔다. 면소재지라면 시오리 길이었다. 버스가 들어오는 시각에 내보낼 수도 있었지만 구참 스님의 눈치가 보여 여자를 내쫓듯 보냈다. 그래서인지 선융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구참 스님의 감시하에 산다는 것이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 벽 하나가 홀연히 사라져버린 경험을 했는데 또 다른 벽이 하나 나타난 것이었다. 선융은 여자를 내쫓았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알 수 없는 그림자 하나가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며칠 후.
 선융은 그 여자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편지는 선융이 답장을 하지 않자 삼사일 간격으로 세 번이나 왔다. 선융으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물론 답장할 수 없는 편지들이었다. 첫 번째 편지는 아기를 갖고 싶은 자신과 금욕주의자 전도사를 만나 결혼했지만 숨이 턱턱 막히는 금욕의 집을 나오기 위해 이혼했다는 고백이었고, 두 번째 편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신한테만 시련을 주는 것도 하느님의 사랑인지 묻고 싶다는 내용이었고, 세 번째 편지는 저수지에 투신하기 직전 자신의 생명을 건져준 선융을 이제는 사랑하게 됐다며 어떤 순서를 몇 단계나 뛰어넘는 놀라운 청혼이었다.

 

 <제가 스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날 저수지의 아름다운 물은 저를 지켜준 은총의 물이었어요. 제 생명을 구해주신 스님을 존경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스님과 저의 생명이 그리스도 하느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원하며 기도할 뿐이에요. 제가 감히 스님께 청혼해도 될까요? 스님, 답장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선융은 그녀가 보낸 편지들을 소각장으로 가지고 가서 태워버렸다. 그래도 머릿속에 지독한 잔상처럼 남아 지워지지 않는 내용은 세 번째 온 편지였다. 선융을 현기증 나게 한 첫 문장부터 끝 문장까지가 그의 피톨 속으로 들어와 버린 듯했다. 본래의 선융이 아닌 편지를 태워버린 선융의 의식이 선융의 마음을 괴롭혔다. 몸은 산문 안에 있지만 마음은 저잣거리에 나가 있는 것처럼 뜨거운 번뇌가 꿈틀거렸다. 
 산문 안에 살면서 선융은 수행자로서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선융은 주지 방을 또 올라갔다. 지난번에는 한밤중이었지만 이번에는 오후 늦은 시각이었다. 석양빛이 처마 밑을 파고들고 있었다. 주지 방 마룻바닥에는 가을의 냉기가 일렁였다. 선융은 살얼음을 밟듯 마룻바닥에 서서 진공스님을 찾았다.
 “스님, 선융입니다.”
 “무슨 일인가?”
 “스님, 견딜 수 없습니다.”
 선융은 진공스님에게 그동안 여자를 만났던 일을 사실대로 이실직고했다. 주혜를 처음 인연 맺었던 일부터 최근에 받았던 그녀의 편지까지 모두 고백했다. 그런데 진공스님의 태도는 뜻밖에도 자비로웠다.
 “절을 잠시 떠나 있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여기는 네가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고향 집 같은 곳이니 그리 알거라. 네가 뜨거운 번뇌에 사로잡혀 있구나. 절을 떠나야만 열뇌(熱惱)를 식힐 수 있을 것이다.”
 “스님, 제가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깨달음이란 나와 남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든 뭣이든 말이다.”
 선융은 그 자리에 엎드려 울었다. 그러자 진공스님이 냉정하게 말했다.
 “절을 떠날 때는 승복을 벗고 나가거라. 내가 잘 보관하고 있다가 네가 돌아온다면 언제든지 돌려주겠다.”
 선융은 방으로 돌아와 승복을 벗었다. 파란 등산복으로 갈아입은 뒤, 주지 방으로 다시 올라가 진공스님에게 삼배를 했다. 그러자 진공스님이 지폐가 든 봉투를 내밀었다. 일주문을 나선 선융은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면소재지를 향해 걸어갔다. 가을바람이 흙먼지를 일으키는 깊은 가을이었다.
 산자락의 낙엽이 비명을 지르며 길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선융은 바람에 날아와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소리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5년 전 11월 열여드레 날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