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상을 보게 하는 문
궁월과 지방관아는 삼문과 삼조의 형식으로 짓는데, 화성행궁도 그렇게 지어졌습니다.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와 중삼문인 좌익문 ․ 내삼문인  중양문이 일직선상에 늘어섰고, 솟을대문 모양의 좌익문과 중양문을 지나면 화성행궁의 정당인 봉수당에 이르게 됩니다.

 

 

 

‘곁에서 돕는다’는 뜻을 가진 좌익문(左翊門) 좌우에는 외치를 담당하는 서리청 ․ 비장청 ․ 집사청 ․ 외정리소 건물이 세워져있고, 그 건물의 아전들은 행궁과 수원부 관아의 문서관리업무, 수원부사 수행, 살림살이와 왕이 치룰 행사 준비 등을 담당하였습니다.

 

중양문(中陽門)은 중앙의 큰문 좌우에 협문을 두었고, 협문 옆으로는 행각이 이어져 정당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막아주는 경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기록에는 문이 동쪽을 향하고 있고, 동쪽은 “봄”을 뜻하기 때문에 봄을 일컫는 다른 말 ”양중“을 빌어 중양문이라 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 세상을 ‘끝 가는 세상’이라면서 어느 한 쪽으로 확 기울어져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극단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요. 이런 분들께 삼천대천세계가 있고, 그 중에 중음세계도 중양원이라는 세상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중간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자기가 살아가는 행태에 잘못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우칠 수 있을 것이고, 살아가는 방법도 건실해질 것 같거든요.

 

 

 

그런데 정조가 그런 세상을 꿈꾸었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왜냐하면 ‘좌익문과 중양문 사이’가 본능적인 욕망에 젖어서 사는 사람들의 세상과 더 성숙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 간의 완충지대로 보이는데, 여기에 있는 문을 열어 한 차원 높은 세상을 보게 하거나 한 차원 낮은 세상을 볼 수 있게 그리고 서로 통하게 하려고 중양문이라 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중양문을 지나면 유명한 “봉수당”이 나오는데, 봉수당이 유명한 이유는 왕실의 잔치가 열렸던 장소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봉수당은 어떤 집이기에 혜경궁의 회갑연을 치루는 장소가 되었을까요?

 

봉수당은 어떤 집인가?
사도세자 묘소를 현륭원(후에 융릉으로 승격)으로 천장할 당시의 수원부 동헌이름은 ‘숨어있는 듯, 없는 듯 한집’이라는 “은약헌(隱若軒)”이었고, 수원부 관아가 신읍치로 이전하게 되자 정조는 동헌이름을 “장남헌(壯南軒)”이라고 새로 지은 다음 손수 현판까지 써서 내려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화성행궁의 정문은 남쪽을 진압하는 “진남루”이고, 동헌(정당)은 남쪽을 진압할 굳센 기상이 서려있는 집인 셈입니다.

 

 

 

남쪽이 왜 굳셈과 씩씩함의 표상이냐 하면 국가적인 의례를 치루기 위해 문무백관이 늘어선 차례와 행사 장면을 그린 반차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반차도에 행진하는 깃발이 적색인 주작(南), 청색인 청룡(東), 황색인 등사(중앙), 백색인 백호(西), 검은 색의 현무(北) 순서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로써 선두를 이끄는 씩씩한 부대가 남쪽을 담당하는 부대임을 알게 합니다.

 

수원부 관아를 옮기고 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도 정조는 “장남헌”이라는 이름을 유지시키더니, 혜경궁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치를 것을 계획한 후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는 뜻을 담은 “봉수당(奉壽堂)”으로 바꿉니다.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집에서 회갑연을 치룬 효과였는지, 혜경궁은 81살까지 장수를 누렸습니다.

봉수당 잔치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백성들이 국왕을 나라와 동일시하던 시대에 왕실의 가족행사는 한 집안만의 행사가 아니라, 온 백성이 같이 즐거워하거나 슬퍼해야 할 행사였습니다. 그렇지만 왕실의 집안 행사는 모두 궁궐 안에서 왕실가족과 축하하는 신하들끼리만 모여 거행될 뿐이었지요.
왕실은 관혼상제는 물론 출생 ․ 생일 ․ 성장과정 등 많은 행사를 그렇게 자기들끼리 기념하였고, 행사의 세세한 일까지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다음 행사를 치름에 도움이 될 매뉴얼로 남겼습니다. 그 글과 그림은 당연히 왕실의 존엄이 최대한으로 나타나야 했고, 보는 사람은 왕과 왕세자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했지요.

 

그런데 “조선”처럼 이치를 따지고 규정과 절차의 흠결을 찾는데 목숨을 거는 나라가 있었던가요? 그런 틈바구니에서 왕실행사를, 그것도 국왕의 어머니인 혜경궁 회갑연을 도성이 아닌 수원부에서 치렀다는 것은 왕의 결단이 없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1795년은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가 회갑을 맞는 해였습니다. 혜경궁의 생일은 6월 18일. 봉수당에서 혜경궁 회갑연이 치러진 날짜는 윤2월 13일. 그러니까 정조는 혜경궁 회갑연을 원래의 생신일보다 무려 5개월이나 앞서 차린 것이 됩니다.
수명이 짧아 생일을 못 찾아먹고 저승 가는 일이 잦았던 시절 그리고 궁핍하게 살던 시절에는 생일을 앞당겨 차려 먹는 것이 ‘희망사항이고 일상이었다’라 하지만 먹을 것이 풍족한 왕실에서 5개월이나 앞당겼다는 것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혜경궁의 회갑연은 화성행궁에서 가졌으면서도 원래의 생일 6월 18일에 창경궁의 명정전에서 또 한 차례 회갑연을 베풀어졌습니다. 이때 정조는 “노래자 색동옷 입게 됐으니 만년토록 이 경사 빛이 나리라. 한잔에 1만 년씩 3만 년을 사소서”라는 노래 가사까지 지어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홍화문에 친히 나가서 수원부에서 진휼행사를 한 것보다 더 많은 미곡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내려줍니다.

 

어느 지방에서 넘치는 식욕을 다스리려고“헛제삿밥”을 만들었다 하지만 굶주린 백성이 넘쳐나는 것을 알고 있는 정조가 혜경궁의 회갑연을 두 번씩이나 가졌다는 것은 정조가 하늘이 낸 효자라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수원부에서의 회갑연은 ‘혜경궁 회갑연’이라는 이름을 붙여 회갑을 맞지 못하고 횡사한 사도세자의 한스러움을 덜어내려 한 행사가 아닌가하는 것이지요. 사도세자 묘소가 행궁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사도세자의 생일도 행궁에서 회갑연이 열린 날과 가까운 1월 21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백성들도 부모님이 환갑을 맞지 못하고 돌아가시면 환갑 때 제사를 지내드리는데, 효자 왕으로 소문난 정조가 그냥 지나칠 사람이 아니거든요. 

 

새로운 고향에서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
정조가 혜경궁의 회갑연을 내년(1795년)에 수원부에서 가질 것임을 신하들에게 알리자, 수원부에서는 그 해(1794년)에 혜경궁의 침소를 완공시킵니다. 그리고 정조는 한고조 태후의 거처인 “장락궁”의 이름을 따 “장락당(長樂堂)”이라 짓고, 직접 편액을 써서 걸었습니다.

 

 

 

행궁 제일 앞에는 신풍루, 제일 뒤쪽에 있는 집은 장락당입니다. 정조가 ‘왕비가 못된 어머니께 중국 황제의 태후가 살던 그런 궁(宮)을 지어드리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신풍(新豊 새로운 고향 수원부)에서 오래도록(長) 즐기고(樂) 싶었다’라 생각해도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장락당은 회갑연이 열리는 봉수당과 이어지도록 툇마루를 달아 혜경궁이 오고가기가 용이하게 하였고, 별도의 담장으로 설치해 다른 곳과 경계를 삼았는데 두 개의 작은 문을 만들어 다복문(多福門) ․ 장복문(長福門)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부지런함도 쉬어가면서
봉수당 옆에는 “노래당(老來堂)”이 있는데, 1795년 행궁에서 각종 행사가 진행된 만큼 중간 중간 생기는 그 틈새에 정조가 쉬었다는 집입니다.
행궁 도착한 다음날 아침에 향교를 방문해 공자님을 뵌 시간이 새벽 5시 45분이었고, 행궁으로 돌아와 8시에는 문무과 과거시험을 참관하였고, 낮에는 합격자를 발표하고 어사화를 내리는 방방행사를, 이어서 회갑연 예행연습을 진행하였습니다.
다음날은 현륭원 참배를 위해 혜경궁을 모시고 새벽 4시 45분에 행궁을 떠났다가 돌아와 수원화성을 지키는 낮 훈련을 하였고,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는 밤 훈련을 참관하였습니다.

 

 

 

그렇게 새벽까지 계속된 훈련을 마치고 세 시간이 지나서는 신풍루에서 쌀과 죽을 나누는 진휼행사를, 8시에는 회갑을 맞은 수원부 백성들을 축하하는 양로잔치를 열고 그곳에 나가 백성들과 똑 같은 식사를 하며 즐거워합니다.
정조도 시시각각 계속되는 행사를 치르면서 막간에 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바쁘게 이어지는 스케줄 와중에 틈틈이 쉴 수 있었던 이 집의 이름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늙는 것(老來)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거처하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내용의 “노래당”이라는 시(詩)에서 정조가 빌려왔다고 합니다.

노래당 출입문 이름은 늙기가 어렵다는“난로문(難老門)”인데, 늙어감을 순순히 받아들이면 ‘늙기가 어렵다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뜻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행궁을 자주 드나드는 편인데, 이 문을 볼 때마다‘수자상을 떨치면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다는 생각에 빠져듭니다. 
화성행궁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어 한 정조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이야기는 다음에도 이어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