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나 조선왕조가 행궁을 지었던 지난날의 행태는 현시대라고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크기나 모양만 바뀌었을 뿐 집을 짓는 목적은 예전과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대전 ․ 대구 ․ 부산은 유행가 가사로 뜨기 훨씬 전부터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도시임을 알고 계시지만, 이 도시들은 안타깝게도 임시 수도였던 도시들입니다. 부산 남포동 근처에 가시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며칠 지나지 않았건만 졸지에 쫓겨 내려가 머물었던 "임시수도 기념관"이 있습니다. 한심하고 슬픈 역사입니다.

 

 

그러나 현명했던(?) 우리의 왕들은 우왕좌왕 하는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전란에 대비해 미리 요소요소에 피란처를 건축했으니, 바로 요새 많은 관람객을 불러들인 영화 “남한산성”에 있는 광주행궁과 북한산성에 있는 양주행궁입니다. 어떤 왕은 강화도로, 어떤 임금은 의주까지 도망가서 머물렀는데, 당연히 그곳에도 미리 지어놓은 행궁이 있었습니다.

 

한글 창제의 격무에 시달렸던 세종은 온양과 이천온천을 여러 차례 행차하였고, 그렇게 치료하고 휴양도 해야 하는 사유로 그곳에도 행궁이 지어졌습니다.
지금은 모든 국민들이 찾아가는 관광지가 되었지만 여러 대통령이 휴양지로 삼았던“청남대”도 옛말로 하면 행궁입니다. 이렇게 행궁은 예전에도 현재에도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운을 떼겠습니다.
 
그런데 화성행궁은 설치 목적이 다른 행궁과 전혀 다릅니다. 사도세자의 묘소를 영우원에서 현륭원(융릉)으로 천장하고 나서 세웠기 때문입니다. 조선 왕릉이 42기나 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지만 더불어 행궁을 갖춘 왕릉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왕릉은 한양 도성에서 80리 안에 두어야 한다’는 규정은 경국대전에서 나온 것인데, 나라에 변란이 발생할 경우 하루가 지나지 않아야 다시 궁궐을 장악할 수 있다고 본 때문입니다. 즉 80리를 벗어나지 않아야 왕이 수행하던 신하들과 도성으로 돌아와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다른 왕릉들이 행궁을 두지 않았다는 것은 그 왕릉에서 도성까지의 거리가 80리를 넘지 않았다는 것이고, 화성행궁을 둔 현륭원은 도성에서 80리가 넘는 거리라는 것이지요.
인터넷지도 길찾기로 숭례문에서 현륭원까지를 검색하면 48km가 나오는데, 4km를 10리로 하면 현륭원은 120리나 되는 먼 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넘어도 한참 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사용하던 리수로 산출해도 80리가 넘는 거리로 계산이 됩니다.(조선시대에 사용하던 주척이나 영조척이라는 잣대로 환산하면 10리는 5.7km 또는 4.7km 입니다)

 

당연히 신하들은 ‘국법이 정한 거리를 벗어납니다’며 반대를 했고, “계급이 깡패다”라는 속된 말처럼 정조가 ‘이제부터 한양에서 수원까지는 80리다’라고 명했기 때문에 80리가 되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사실 현륭원 자리는 선조와 효종의 묫자리로 거론되었을 정도로 명당인데, 신하들이‘명당임은 분명하지만 한양에서 거리가 멀고, 민가를 이전해야한다’는 사유로 반대를 한 장소였습니다. 그렇지만 정조는 천하의 명당터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에 민가를 신읍치로 이전시키고, 거리까지 주름잡아 단축(축지법?) 시켜가면서 천장을 실시한 겁니다.

 

능행을 수행한 신하와 그 밖의 따르는 사람들 모두가 말을 탄다면 모를까, 걷거나 가마를 타는 당시로써는 한양을 떠난 당일에 되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화성행궁은 필요했고, 매년 한 차례씩 능행을 위해서도 절대적이었습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13차례에 걸쳐 현륭원을 참배할 때마다 머문 임시 거처였는데, 평상시는 수원부사(수원부가 수원유수부로 승격된 뒤에는 수원유수)가 지방행정을 펼치는 관아로 사용하는 건물입니다.

정조가 현륭원을 1년에 한 차례 방문하였으니까, 화성행궁 사용일은  1년 365일 중 단 하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러한 쓰임을 보듯 화성행궁의 건축 목적은 처음부터 정조의 거처로 사용하려 한 것도, 수원부 관아 안에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건축된 것도 아닌 신읍치의 관아건물을 확장·증축하는 가운데 조성된 것입니다.

 

 

 

박명원의 상소가 있자마자 수은묘 이장이 봇물 터지듯 진행되었는데, 수원부에서 이루어진 최우선의 공사는 현륭원 터에 산재한 관아와 민가의 철거작업입니다. 다행히 우리 조상님들의 집짓는 솜씨는 탁월해서 상소가 있은 지 두 달 이틀 만에 신읍치에 향교가 완성되었고, 이보다 보름 정도 후에는 동헌과 객사 등 278칸의 건물이 완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까지 많은 부속 건물을 건축함으로써 수원부 관아 건물은 총 576칸에 이르게 됩니다.

 

화성행궁의 흥망성쇠를 이야기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창씨개명이 강요되었는데, 이보다 무려 30년이나 앞선 강제합방 직후에 화성행궁이 수난을 겪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조선인에게 자애로운 은혜를 베푼다’는 허울 좋은 이름을 붙여 화성행궁에 “자혜의원”이라는 것을 설치하더니, 종래에는 파괴하고 그 자리에 병원을 크게 짓고, 수원군청과 헌병대 등을 설치 운영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는 화성행궁 터와 그 인근은 경찰서 ․ 의료원 ․ 우체국과 터미널 등이 들어서, 수원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수원사람들이‘화성행궁 복원을 추진해야 한다’며 조직을 결성하고, 복원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그 많은 시설들을 이전시킨 다음 1989년부터 2002년까지의 1차 공사를 진행하였지요. 그 결과 원래의 화성행궁 576칸 중 482칸을 복원하였고, 2003년에 관람객의 입장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 초 정도전은 한양 땅에 궁궐과 시가지 그리고 거주지 등을 배치하는 계획을 세웠고, 궁궐 각 건물 이름에 심오한 뜻을 담아냈습니다. 좋은 정치가 백성들을 살기 좋게 한다는 “광화문”이며, 백성을 다스림에 부지런 하라는 “근정전”하며,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다는 “사정전” 등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건물들은 그 이름이 지어진바 대로 그 이름의 뜻에 맞게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화성행궁은 어떻게 사용되어 왔을까요? 또 한 번 말씀드리지만 화성행궁이‘행궁’용도로는 1년에 단 하루, 정조가 현륭원을 참배할 때뿐, 나머지 364일은 수원부 동헌’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야기를“화성행궁”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하는데, 그 이유는 수원부 관아 건물로 지었으면서도 각 건물이 관아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당연히‘그러면 동헌의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는가?’ 하는 의아심이 드셨을 터인데, 그것은 건물 이름을 정조가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마음을 담아냈다는 말이잖습니까? 화성행궁의 각 건물에는 정조의 마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방금 일제가 화성행궁을 파괴하였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전부 파괴한 것은 아니고, 어떤 곡절이 있어“낙남헌”만이 남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 낙남헌을 제외한 모든 건물은 모두 복원된 건물입니다. 이미 방문하셔서 보신 분도 계시겠습니다만, 화성행궁 건물들의 모양새는 크거나 화려하지도 않으며, 안주인이 머무는 곳이라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사랑채 등에 어울리게 지은 것도 아니며, 모양과 쓰임새가 독특한 누구누구네 종갓집들처럼 그러하지도 못합니다.

 

우리들 주변을 둘러보면,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우아하게 정원을 꾸며놓은 한옥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실상이 이러하니 ‘화성행궁 건물의 겉모양만 본다거나, 또 겉모양을 아무리 꾸며서 이야기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제 개인의 소견입니다.
따라서 아주 특별나다 싶으면 모를까 건물이야기는 하지 않고, 화성행궁 담장 안에 있는 건물에 숨어있는 정조의 마음을 살펴보는 이야기, 쉽게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를 다음부터 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