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리으리한 용상에 앉아 천양주 술잔을 기울이며 무희들이 풍악에 맞추어 춤추는 것을 내려다보던 용왕이 문득 하품을 하더니 시녀에게 분부하였다.
“별감, 무감들을 불러라”
“네”
“별감, 무감들 대령하였습니다.”
“조선국 금강산이 천하절승이라 하며 선계의 선인 영랑이 그곳에 내려와 있다 하니, 내일 금강산에 가겠다. 길 떠날 차비를 하라. 금강산은 별주부가 살던 곳이니 별주부와 시녀만 따르게 하라”고 말하였다.

 

다음날 배를 타고 용왕의 일행은 해금강에 와 닿았다. 별주부가 배에서 먼저 내리며 신바람 나서 말하였다.
“대왕마마, 이곳은 소신이 수궁에 들기 전에 살던 곳이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며 목을 길게 빼고 반가운 듯 사방을 들러 보았다. 용왕은 무엇에 흘린 듯 배에서 내리지 않고 넋을 잃고 서 있더니,
“별주부야, 저것은 우리 수정문과 똑같구나.”
하며 손을 들어 물 가운데 서 있는 돌기둥을 가리키니, 별주부가 아는 체하며
“네, 저것은 금강의 한줄기가 바다에 뛰어들어 기둥처럼 된 것으로서 소신이 천 년 전에 보았사온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은 줄로 아뢰오며, 저것을 가리켜 사람들은 총석정이라 하옵고 저기 저 구름에 감겨있는 높은 봉우리는 하늘 신선 넷이 내려와 놀던 곳이라 하여 ‘사선봉’이라 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음, 그래. 과연 네 말대로 신선이 내릴 만 한 곳이로다.”
“대왕마마, 영랑 선인이 계시는 곳으로 가시는 길에 또한 경치 좋기로 이름난 삼일포라 하는 호수가 있사온데 들렸다 가시옵소서.”라며 별주부는 더욱 신이 나서 말하였다.

 

 

 

 용왕 일행이 별주부의 길 안내로 삼일포에 닿으니 호수가 은모래 밭에 분홍빛 해당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호수 둘레는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절벽의 노송들은 물위에 그림자를 던졌는데 호수 가운데 솔 섬 주변에서는 하얀 해오라기들이 한가로이 자맥질을 하고 있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신비하였다.
 왕은 삼일포의 절경에 심취되어 혼자 중얼거렸다.
 “천하절승이 수궁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지상에도 이런 별천지가 있구나. 참 아름답도다.“
 이곳저곳을 두루 살피며 올라가다가 너럭바위 위에 잠시 쉬며 가지고 온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난 후 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한동안 지켜보고 있던 용왕이 감탄하였다.
 “골짜기 안의 기암괴석들을 씻으며 흐르는 물이 돌을 만나면 작은 폭포도 되고, 조금 패인 돌을 만나면 작은 골 물이 되고, 넓은 돌 위를 지날 때면 마치 구슬 밭을 펼쳐 놓은 듯하니 참으로 기이하도다. 너는 왜 진작 내게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느냐?“

 

 

 

 한편 시녀들은 산에 가득 핀 진달래 앞으로 달려가며 한 시녀가 “아이참, 곱기도 해라. 이거 수궁에 꺾어 가지고 갈까?”하니 또 한 시녀가 “저것 봐요. 저것도 꺾어 가지고 가지요.”하며 철쭉꽃 피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또 한 시녀가 있다가 “주부 어른 저것은 무엇입니까?” 하니 주부가 선뜻 “응, 그건 불로초요. 금강산의 불로초는 저렇게 크고도 아름답소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이 다시 높은 봉우리를 바라보기도 하고 발아래 계곡을 굽어보기도 하며 오르고 또 오르는데 한 곳에 이르니, 봉우리 위에는 흰 구름이 감돌고 높은 봉우리 위에서 내려 떨어지는 폭포의 물안개가 하늘에 무지개를 그리고 또 한쪽으로는 갖가지 꽃들이 만발하였는데, 바위 위에 노송들이 뿌리를 드러내놓고 서 있으니, 이 또한 기이한 승경이었다.

 

 해금강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연이어 나타나는 아름다운 산수의 절경과 기묘한 경치에 그만 자기를 잊은 용왕과 시녀들은 한 곳에 머물러 서서 굳어진 듯 떠난 줄 몰랐다. 이윽고 용왕이 “별주부야, 물과 돌이 기이한 것은 이루 말할 것 없다마는 한줌의 흙도 없는 이 바위산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저 나무 들은 무슨 조화냐?”라고 물었다.
 “흙도 없는 바위산이오나 바위틈에 뿌리박고 피어나는 나무들과 꽃이 철따라 산을 단장하니 산의 이름 또한 철에 따라 다르옵니다. 각양각색의 꽃이 산에 가득 피고 향기 그윽한 봄에는 이 산을 금강산이라 하옵고, 무심히 흘러가던 구름이 층암절벽을 감돌고 우거진 녹음에서 뭇 새들이 우짖고 수정 같은 맑은 물이 안개를 피우는 여름철의 이 산 이름은 봉래산이요. 온 산에 단풍이 타는 듯 붉고 벽계수에 비친 달빛 아름다운 가을의 이 산은 풍악산이요. 온 산이 눈꽃과 얼음기둥으로 장식되는 겨울의 이 산을 개골산이라 하나이다.”

 

 

 

 정신없이 주어 섬기는 별주부의 말에는 대답 없이 용왕은 높은 봉우리를 얼어버린 듯 바라보다가 문득 “구름이 지나가고 안개가 움직이니 봉우리와 기암괴석이 다 함께 따라 움직이는 것 같구나. 나도 함께...”라고 하였다.
 이때 시녀들이 갑자기 “어머나!”하고 소리쳐서 바라보니 사슴 두 마리가 이쪽으로 반가운 듯 껑충껑충 달려오고 있었다. 별주부가 웃으며 “저것은 사슴이라는 짐승이요. 사슴이 원래 유순한 짐승이지만, 특히 이 금강산의 사슴은 사랑스럽지요.” 하고 말하다가 문득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키며 “저것 보시오. 저 바위 안의 고양이와 쥐를...”하고 말하니 시녀들이 웃었다.
 “별주부어른, 거짓말 마시오. 우리도 그림에서 보아서 알지만 저건 고양이가 아닙니다. 저리 큰 고양이와 쥐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또 고양이와 쥐는 상극인데 어찌 한자리에 있으리까?”

 

 “그건 모르는 소리요. 이 금강산의 고양이와 쥐는 크기로 유명하고 또 사이좋기로도 짝이 없소. 아, 이 산에 먹을 것이 없어 고양이가 쥐를 잡겠소? 머루, 아광이, 찔광이, 산열매가 없는 것 없고 산삼, 불로초, 송이, 꿀 없는 것 없으니 배부른 고양이 수고스럽게 쥐를 잡으리까? 또 이 산의 신령이 서로 잡아먹지 못하게 엄한 영을 내렸다 합니다.”하고 나서 별주부가 눈을 들어 한곳을 바라보다가 “대왕마마, 이제는 거의 다 왔사옵니다.”하며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키기에 보니 마치 귀신같이 생긴 바위가 보였다.

 

 “참 이상도 하다. 이 금강산돌과 봉우리는 모두가 기이한 생김새를 하고 있으니...”
 “대왕마마, 이 금강산 돌들은 집 모양, 다리 모양, 사람 모양, 짐승 모양, 절구 모양, 심지어는 돌이 공중에 둥 둥 떠있는 것도 있사옵니다.”
 시녀들이 깔깔 웃으며 “주부어른도 참, 돌이 어찌 공중에 떠 있겠소?”하였다.
거기서 얼마 가지 않아 문득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오더니 생황소리 은은히 들려오는데, 그 소리 어디서 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앞서 부지런히 걷고 있던 별주부가 별안간 소리치며 발길을 멈추었다.
“대왕마마, 저기 영랑선인이 나와 계시옵니다. 우리를 보시며 웃고 계십니다.”

 

 

 

과연 별주부가 가리키는 높은 곳에 백발노인의 옷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서 있었다.
용왕이 급히 달려 올라가는데 영랑이 마주 내려오며 “수고로이 오셨소이다.”하니 용왕이 또한 두 손을 모아 인사하며 “영랑선인께서 이곳에 와 계신다하기에 불원천리 찾아왔소이다. 금강산의 경치가 이렇듯 좋은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오며 보니 참으로 절승이더이다.”하였다. 영랑이 빙그레 웃으며 “금강산 초입을 보신 것을 가지고 금강산 경치를 어찌 말하리까? 자, 그럼 내일 더 보시기로 하고 우리 어서 저리로 가십시다.”하고 앞에 서서 가볍게 훨훨 걸었다. 큰 너럭바위 앞에 이른 영랑이 발길을 멈추고 서며 “자, 여기가 나의 소일터요. 어서 이리 와 앉으시오.” 하고 앉기를 권한 다음 벼랑 굴 쪽을 향해 소리쳤다.

 

 “동자야-”
 “네-” 하는 대답소리와 함께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나오는데 동자가 옥반에 앵무배가 아니라 호로병 하나에 표주박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별주부와 시녀들에게 과일과 불로초를 꿀에 재운 것과 향기로운 술을 가지고 나왔다.
 영랑이 술을 따라 용왕에게 권하며 “금강산 영랑이 동해용왕께 대접할 것은 이 밖에 없소이다. 자 어서 드시오.”
 용왕이 받아 한 모금 마시니, 그 향기로운 맛이란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었다. 용왕이 속으로 “흠, 이것이 신선들이 마시는 선주라는 것이구나.” 생각하며 거듭 잔을 기울였다. 어느 덧 노을은 지고 은쟁반 같은 달이 하늘중천 높이 솟아 온 계곡을 두루 비치니, 그야말로 계곡은 달세계였다. 산에 비친 달, 물에 비친 달, 울창한 숲에 비친 달, 어느 달은 달이 아닐까 마는 이날 밤 여기에 비친 달은 참으로 무어라 표현할 수 없었다. 또한 벼랑을 씻으며 흘러내리는 물은 비단 필을 드리운 듯 하고 하늘에 닿은 듯 높은 벼랑에서 나는 듯 떨어지는 물은 은하수를 기울인 듯 하며 또한 계곡의 흐르는 물이 암석에 부딪쳐 하얀 꽃으로 부서지는데 물방울마다에 달빛이 비치니 영롱한 양고아주로 되었다.

 

 

 

 “동자야-”하고 또 부르니 “네” 대답하며 동자가 나오는데 자기키보다 더 큰 거문고를 안았다. 영랑이 허허 웃으며 “네 벌써 내 뜻을 알아 가지고 왔구나.” 하며 영랑이 거문고를 받아 무릎위에 놓고 둥기둥 둥당 둥기둥 둥기둥...하고 거문고를 튕기니 달빛 아래 거문고 소리 또한 그윽하기 그지없다. 용왕이 그만 황홀경에 취하고 선주에 취해 정신을 잃고 있는데 또 한쪽에서는 기이한 광경이 벌어졌다. 난데없이 백학 네 마리 날아와서 영랑의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용왕이 너무 흥에 겨워 영랑에게 말하였다.

 

“내 시 한수 읊겠소이다.
누가 나를 늙었다 하느뇨
늙은이도 이러 한가
꽃 보면 반갑고
술 마시면 만사가 태평이로다.

 

 이튿날 용왕은 영랑 신선의 신통력으로 힘 안들이고 짧은 시간에 외금강, 내금강을 두루 돌아보고 나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용왕이 수궁으로 떠나기에 앞서 영랑에게 숙연히 “동해를 지키라하신 상제의 어명만 아니면 나도 돌아가고 싶지 않소이다.”하고 하직을 고하는데 영랑의 옆에서 두 손을 포개 얹고 작별인사를 나누는 그들의 얼굴을 번갈아 올려다보던 동자가 문득 단현 쪽으로 달려가더니 생황을 가지고 나와 영랑에게 주며 “돌아오실 때 크게 부사이다. 저는 숲에 가서 솔잎을 따다가 생황 소리가 나면 달려오겠나이다.”하니 영랑이 허허 웃고 생황을 받으며 용왕을 향해 “이 애가 날더러 손님을 바래다주라는 구려.”하고 나서 “네, 동자의 뜻대로 하리다-”하고 웃으며 동자의 능금 같은 볼을 살짝 쥐었다 놓으니 어린 동자 또한 영랑을 쳐다보며 해쭉 웃는다. 그들 일행이 구름타고 어느덧 다시 옥같이 흰 돌다리에 이른 것은 저녁노을이 짙어갈 무렵이었다. 저녁노을이 타는 듯 붉어 희고 맑고 고운 옥교의 아름다움을 더한층 돋아 주었다.

 

“그럼 부디 수궁 길을 무사히 가시옵소서.”하고 영랑이 말하자 용왕 또한 작별인사를 하였다.

 

이윽고 배에 오른 용왕이 눈을 들어 옥교 쪽을 바라보는데 향기 그윽한 가운데 오색채운 내리어 영량을 휘감고 차오르니, 그는 간데없고 공중에서 생황소리만 은은히 들려왔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 옥같이 희고 다리같이 생긴 바위를 “옥교암”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