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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있는 존재를 여실하게 보는 것이 공이다"

미디어붓다 | mediabuddha@hanmail.net | 2017-10-31 (화) 15:20

 

 "모든 법은 자성이 비었다. '모든 법'은 유위법과 무위법도 포함하고 있다"

 


 

 2. 반야바라밀다와 보살
 
   1) 제법개공
 
아함에 설해진 열반은 절대적인 세계라고 말할 수가 있다. 팔정도의 수행을 통해 실현된 그 곳은 모든 번뇌(탐 ‧ 진 ‧ 치)와 무지가 사라져 생사의 괴로움을 멀리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소승불교는 그러한 열반을 불교의 궁극적 목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출세간적인 불교가 될 수밖에 없다.
 
‘생사’라는 것은 우리 중생들의  현실 세계에 해당되는데. 열반은 그것을 부정,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함에 설해진 열반을 과연 그렇게 절대적 존재라고 볼 수가 있을까? 생사와 열반, 유위법과 무위법이라는 그 두 법을 이제 새로운 차원에서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 두 법이 서로 연(緣)이 되고 과(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즉 생사가 있음으로써 열반이 있고 열반이 있음으로써 생사가 있다. 현대적 술어로 표현한다면, 생사와 열반은 ‘상의상관’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A,B 두 법이 이렇게 서로 연이 되는 상의상관의 관계 속에 있다면 그 두 법에는 독자적인 존재성 즉 자성은 없다고 말해야 한다. 상대방의 도움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독자적인 존재성이 없다면 A, B 두 법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법이라는 말이 된다. A는 곧 B요, B는 곧 A이다. 동시에 A, B라는 두 개의 존재는 하나의 본질적 존재(性)에 대한 일종의 존재 양식(相)이 될 것이다.
 
여실하게 볼 때 이렇게 평등한 두 법에 대해서 누가 만일 그들의 독자적 존재성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식별이요 분별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분별은 두 법에 대한 실상을 보지 못한 것이므로 망념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 마음에 이런 망념이 있으면 이 무명 망념을 연하여 생사의 괴로움이 일어날 것이다(緣起). 아함교설의 십이연기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상의상관의 관계 속에 있는 생사와 열반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생사는 곧 열반이요, 열반은 곧 생사이다. 그런데도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여 그 중의 열반을 독자적 존재성을 지닌 것으로 절대시한다면,  이것을 과연 여실한 견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시 그러한 분별 망념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대승불교는 바로 이러한 자각과 반성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의 초기 경전 중에서도 성립이 빠른 것은 반야부 계통인데, 그 중에 하나인 <금강경>에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설해지고 있다.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해야 하나니, 모든 중생의 무리를 내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여 멸도(滅道)하리라.  이렇게 무량 무변 중생을 멸도하지만 중생으로 멸도된 자는 없나니라. 왜 그러냐면 보살에게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니라. 열반을 절대적 존재로 보려는 견해를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경에서 말하는 ‘모든 법(諸法)’은 유위법은 물론 열반과 같은 무위법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두 자성이 공(空)하다고 한다.
 
자성이 공하다는 것은 아함경의 무아라는 말과 통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휠씬 더 철저한 개념이라는 것이 짐작될 것이다. 자성이 빈 법은 ‘공(空)’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이 공을 허공이나 무(無)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허공은 물체가 없는 공간(space)을 의미하고, 무는 있던 것이 없어졌을 때 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공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 눈앞에 있는 존재 그것을 여실하게 보는 입장에서 바로 공인 것이다.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을 떠나 공이 없고 공을 떠나 색이 없다. 수 ‧ 상 ‧ 행 ‧ 식 또한 그와 같다.”고 반야심경은 설하고 있다.


<반야경>에는 모든 법은 생한 일도 없고 멸한 일도 없다. 옴도 없고 감도 없다. 중생의 마음이 더럽고, 부처의 마음은 깨끗하다는 것도 없다. 중생은 본래부터 성불해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는 “모든 법은 꿈과 같고 거품과 같고 번개와 같다“ 이러한 표현은 초학자를 당황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본뜻은 우리의 분별 망념을 철저히 타파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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